몽단(夢斷)이 고개에서 - 의마(義馬)묘

2017. 11. 4. 12:30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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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금요일 옥산 하이패스 전용 톨게이트를 지나 천안 병천면으로 진행하는데 내비 아가씨가 몽단이 삼거리에서 굴다리 방향 오른쪽으로 진입하라고 한다. 몽단이 고개란 지명이 특이하여 머릿속에 남았었는데 다음날 돌아오는 길에 또 무심코 지나 수백m를 진행하다가 지금 저곳을 가보지 못한다면, 생전에 다시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도저히 미련이 남아 집으로 가는 방향으로 계속 가지 못하고, 승용차를 돌려서 몽단이 삼거리로 다시 왔다.

 

 

 

 

그다지 높지 않은 몽단이 고개인데 무슨 사연이 있을꼬? 몽단이 고개에는 지은 지 오래된 모텔 두 곳이 영업 중이다.

 

 

 

 

저 멀리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몽단이 삼거리가 나오고, 왼쪽에 의마묘(義馬墓)가 있다.

 

 

 

 

차량이 지나다니는 길옆에 어떤 무덤이 보인다.

 

 

 

 

무덤의 형상이 우리가 보던 흔한 그런 무덤이 아니다.

 

 

 

 

몽단이재(접지골)와 의마총 유래비에 적힌 것을 옮겨보면 이렇다.

 

이곳 유래의 주인공인 박동명(朴東命)은 순천인(順天人)이며, 호는 매은당(梅隱堂)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공은 1575년(선조8년) 비하동 주봉마을에서 출생하고, 1599년(선조32년)에 무과급제 태안군수 제주목사를 봉직했으며, 공은 한 몸으로 1592년 임진왜란(선조 25년 당시 18세),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에 출전하여 62세의 고령으로 순국한 구국의 초석이었다. 비하동 주봉마을에 왕이 하사한 충신 정려문이 세워졌고 공조판서에 추서되었다.

 

1636년(병자년) 인조 14년에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침공 삼전도(三田度)에서 치욕을 당할 무렵 매은당 박동명은 의병을 모아 이춘록(李椿祿)과 조성남(趙城楠)을 전후군으로 하여 12월 24일 군사를 움직여 27일에 남한산성 근처 광주 무계에 당도하여 적과 정면 대결 맹렬히 싸우다가 급기야 적의 화살에 맞아 순절하였다. 그러나 매은당 휘하 김득성(金得成)이 장군의 시신을 찾으려고 정성을 기울였으나 밤은 어둡고 날은 추워 찾을 길이 없어서 헤매던 중 애마가 매은당 저고리를 입으로 뜯은 것을 말안장에 올려놓고 김득성이 도술을 이용하여 화살을 허공에 저어 박장군의 혼을 불러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줄곧 확인을 할 때마다 장군 영혼이 응답해왔는데 몽단이(옛날 樟南嶺) 고개에 이르러 응답소리가 끊어져 고개턱에서 화살을 꽂아놓고 통곡하여 진혼제를 올렸다.

 

이 무렵 큰아들 홍원(弘遠)이 꿈을 꾸었는데, 의관을 정제한 아버지 매은당이 백발을 쓰다듬으며 방으로 들어와 아랫목에 앉으며 "내가 고개를 넘지못하고 구천으로 올라갔으니 내 옷을 거두어 고개에 무덤을 치도록 하라"는 현몽을 하여 잠에서 깨어 아버지가 순절한 것을 알고 몽단이 고개를 향하여 가보니 김득성이 화살을 꽂아놓고 진혼제를 올리고 있었으며, 장군의 애마는 말발굽이 땅에 붙어 7일간이나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슬피 울다가 숨을 거두고 말았는데 이곳을 꿈에서 깨어 났다하여 몽단(夢斷)이 재 또는 말발굽이 땅에서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하여 접지(接趾)골이라 전하여 내려왔다. 매은당 박동명의 묘는 의관장(시신이 없이 의복만 묻은 것)을 하고 애마는 주인을 추모하는 의로움을 더 한층 가상히 여기고 장군의 묘소로부너 150m 하단에 후하게 장사 지내어 영혼을 위로하였으며, 이곳을 말무덤(의마총)이라고 한다. 공이 전사한 지 368년이 지난 오늘 몽단이 재 또는 접지골에 대한 유래비를 세운다.(서기2004년 10월21일)

 

 

 

 

이미지: 나무, 식물, 풀밭, 하늘, 실외, 자연

 

'매은당의마지총 비'라고 되어 있는데 매은당이라는 사람과 의마(義馬)와는 어떤관계인가 궁금하다.

 

 

 

 

밑에서는 몰랐는데 무덤 위쪽으로 올라가서 내려다보니 누운 말의 형상이 보인다.

 

 

 

 

누운 말의 형상이 뚜렷하다. 한낱 미천한 미물이었지만, 전장터에서 전사한 주인을 기리면서 굶어 죽은 의마의 전설에 숙연함을 느끼면서 말 무덤을 만들어 길이 후세에 알린 이들의 노고에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서 이곳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