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18. 16:30ㆍ카테고리 없음
옥연(玉淵)이라는 작은 돌비석이 있다. 옥 같이 맑은 물이 있는 연못(?)이라고 해석해야 하는가?
한자(漢字)의 중요성이 빛을 낸다. 길손도 '옥연사'라는 말을 처음 듣고 옥연사(玉淵寺)라는 사찰을 떠올렸다. 우리 한글도 한자를 뺀다면 안꼬없는 찐빵 신세다. 이곳은 이곳은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사산리에 소재한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 선생의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김영우의 조선 전기 심성론(2004)에 의하면 노수신(盧守愼 : 1515(중종 10)∼1590(선조 23))은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이다. 자는 과회(寡悔)이고, 호는 소재(穌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이며, 시호는 문의(文懿)였다가 후에 문간(文簡)으로 고쳐졌다. 전라도 광주 사람이다. 중종 26년(1531) 17세에 당시 성리학자로 명망이 있었던 이연경(李延慶)의 딸과 결혼하고, 장인의 문하생이 되었다. 1541년 27세에 이언적에게 나아가 배웠다. 1543년 식년문과에 장원한 뒤로 전적 수찬을 거쳐 1544년에 시강원사서가 되고 같은 해 사가독서를 하였다.
인종 즉위초에 정언이 되어 이기(李芑)를 탄핵하여 파직시켰으나,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윤원형(尹元衡)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 1547년 순천으로 유배되고, 이어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죄가 더욱 덧붙여짐으로써 진도에 이배되어 19년간 섬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동안에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하고,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주석하였다. 1565년 다시 괴산으로 이배되었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 나와 즉시 교리에 기용되고, 이어 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 등을 지냈다.
1573년 우의정에 임명되고 1578년 좌의정을 거쳐 1585년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 뒤 1588년에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10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했기 때문에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노수신의 철학사상은 명나라 철학자 나흠순을 수용하였다. 나흠순의 리기일물론(理氣一物論)과 도심인심체용설(道心人心體用說) 등을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나흠순의 욕망긍정론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이황·기대승 등은 나흠순을 선학(禪學)으로 규정하고 노수신도 선학의 혐의가 있다고 비판하였다고 되어 있다.
사당의 대문간에는 덕망이 높은 사람을 추앙해서 우러러 보라는 경앙문(景仰門)이 있는데 출입문이 3개다. 한 개만 해도 족할 것인데 왜 굳이 세 개를 만들었나? 양쪽 2개의 문은 일반인이 출입하는 문이며, 중앙의 것은 선조들의 영혼이 드나드는 문으로 제사 등 특별한 경우에만 개방한다. 유림에서 선비들이 입씨름 할 때는 그럴듯한 명분이 있고, 理由가 있어서 그렇다고 길손은 생각한다.
경안문(景仰門)을 들어서니 선(?)모재(膳慕齋)라는 건물 앞에 우물 정(井) 字의 대리석이 놓여 있다. 길손이 건물의 현판 글자를 아무리 쳐다보고, 인터넷을 검색해도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저런 현판에 관심을 갖은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마는 길손처럼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뜻을 알리는 조그만 안내문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가까히 다가가서 안을 들여다 보니 우물이다. 그러니 왜 옥연사(玉淵祠)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그 이유를 이 우물이 말해준다. 그러나 물은 옥처럼 맑지는 않았다.
추원문(追遠門)을 올라서니 왼쪽에 노수신의 영정이 모셔진 오현양각, 오른쪽 작은 건물이 불천위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이다.
이 건물에는 노수신(盧守愼)의 영정이 있다. 본래는 노수신의 8대조 경평공(敬平公) 노숭(盧嵩)의 영정을 모시던 곳이었으나, 숙종 때 불천위 사당(不遷位祀堂)의 은전이 내려 노수신 사당이 되었다고 한다.
도정사(道正祠) 안에는 노수신과 그의 부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왼쪽은 영의정인 현재 종손의 13대 조부 노수신의 위패位牌), 오른쪽은 그 조부의 부인인 정경부인 광릉 이씨의 위패다.
사당 옆에 난 쪽문을 통해서 멀리 노수신의 조부인 노후와 아버지인 노홍의 신도비가 보인다. 이곳을 들어서면 왼쪽에 遺章閣이 있다.
노후, 노홍의 신도비 앞에서 재실 쪽을 본다.
아들을 높은 벼슬아치로 잘 두면, 그 선친과 조부는 죽어서 영의정 같은 높은 벼슬로 추증(追贈)될 수가 있다. 반대로 과거시험에서 답안지 제일 위에 증조부, 조부, 부친의 벼슬과 이름을 쓰고 답안지를 작성했다니 지금의 잣대로 보면 이해하기 힘든 시대였다.
이 안내판의 내용으로 본다면 노수신의 조부는 의정부 좌찬성에 선친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아들 덕에 죽은 후에 높은 관직에 올랐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20호. 노후와 노홍은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노수신(盧守愼)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로, 각각 영의정과 좌찬성에 증직된 문신들이다.
옥연사(玉淵祠: 노수진 사당)에서 서남향으로 2㎞ 정도 떨어진 원천동마을 뒤 산록에 3대의 묘가 있으며, 묘 앞에 신도비를 같은 형태로 1581년(선조 14)경에 세웠으며, 두 기의 신도비는 형태가 같은 것으로 이수에는 두 마리 용이 조각되어 있다.
노후 신도비에는 비명이 贈左贊成盧公神道碑銘 通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 李山海 撰 幷書 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經筵事 金應南 篆(증 좌찬성 노공신도비명 통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이산해찬 승서, 가선대부이조참판겸동지연사 김응남 전)이라 각자되었다. 두 비석의 오른쪽 맨 위에 다 같이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당시의 뿌리 깊은 사대사상을 엿볼 수가 있다.
노홍 신도비에는 비명이 贈領議政盧公神道碑銘 通政大夫司諫院司諫知製敎朴承任撰 嘉善大夫吏曹參判金應南篆 韓護(石峰)書(증 영의정 노공신도비명 통정대부사간원사간지제교박승임찬 가선대부이조참판 김응남전 한호(석봉)서)라고 각자되어 있다. 글씨는 한석봉이 쓴 것이라고 한다.
추원문 오른쪽 담장으로 앞을 보니 넓은 벌판과 먼 산이 정말 정겹게 보인다. 이런 곳을 두고 명당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조선 시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삼정승은 366명이었고, 영의정은 155명이 재임하였다는데 일설에 의하면 경상도 출신의 영의정은 4명이었고, 대부분 기호지방에서 다 차지했다는데 노수신은 그 4명 중의 한 사람이 상주 화서 출신이었으니 노씨 가문의 자랑이라고 할 만도 하다.
노(盧)씨 가문에서 두 사람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었다. 본관은 광주(光州)·교하(交河)·풍천(豐川)·장연(長淵)·안동(安東)·안강(安康)·연일(延日)·평양(平壤)·곡산(谷山) 등 9개 본관인데 노수신은 본관이 광주라고 한다.
故 노무현 前 대통령은 노수신과 같은 光州가 본관이고, 노태우 전 대통령은 交河라고 하는데 유물이 전시된 '유장각(遺章閣)'이라는 현판 글씨는 노태우 前 대통령의 휘호라고 한다. 그가 대통령이 되고 이곳을 정비하였다고 하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권력 무상이 느껴지고, 부귀영화는 일장춘몽이라는 옛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도대체 이 오래된 건물은 뭔가 해서 기웃거려 보았더니 화장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