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7. 11:27ㆍ스크랩
[김동길의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8) 함석헌(1901~1989)
동경고등사범 졸업했지만 그만큼 많이 읽고 많이 아는 사람 없어
민중엔 위로·희망의 말… 권력자들엔 서슬퍼런 말
이철원 기자
나라를 위해 큰일을 했다고 믿어지는 인물이 여럿 있다. 공화국을 세웠거나, 경제를 크게 일으킨 대통령은 한국 현대사에 그 이름이 남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면서 기업을 통해 동족의 삶을 풍요하게 만든 인물들도 우리는 기억한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해도 사상적으로 우리 시대의 커다란 영향을 미친 거인이 있다면 그가 함석헌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일찍이 '사상계(思想界)'에 '생각하는 국민이라야 산다'는 글을 썼다. 철학을 전공해 유럽과 미국 유수한 대학에서 박사 학위 받고 돌아온 철학자는 여럿 있지만 한국 국민의 생각에 함석헌만큼 큰 영향을 미친 사상가는 우리 현대사에 없을 것이다.
그는 평북 용천 출신으로 평양고보와 오산학교를 거쳐 일본에 있는 동경고등사범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했다. 그 이상 학벌은 없지만 함석헌만큼 많이 읽고 많이 아는 사람 없었고, 함석헌처럼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말과 글이라는 예리한 양면도를 종횡무진 휘둘렀다. 민중이라고 여겨지는 '씨알'들에게는 위로와 희망을 주었고 경무대(옛 청와대)나 청와대를 치고 들어가 앉아 있는 권력자들 간담을 서늘케 하는 무서운 말만 토해냈다.
그의 저항 정신은 일제 시대를 사는 동안 한결같았고 해방 후 북에 살았던 2년 동안도 그러했고 월남한 1947년부터 세상을 떠난 1989년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김일성 집권에 반대하고 일어난 이른바 '신의주 학생 사건'의 배후에 그가 있었다고 공산당은 믿었다. 월남한 뒤 박정희나 전두환에게는 불온한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여겨졌다. 일제 시대에는 두 번이나 투옥됐고 오산학교 교사 자리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는 한 번도 일제에 저항한 사실을 자랑한 적이 없지만 세상을 떠난 지 13년 뒤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경기도 연천에 있던 가족 묘지에서 대전에 있는 현충원으로 유해를 옮겨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그는 평범한 기독교 가정에 태어나 한평생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세상을 떠날 때도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을 믿고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기성 교회 신자들과 신앙의 입장이 매우 달랐다. 그는 동경 유학 시절에 일본 제일의 기독교 사상가였던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고 구원이 기성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도쿄 가시와기에서 열리던 성서연구회를 통해 성경을 철저하게 공부했다. 그 시절 그의 동지들이 김교신, 송두용 그리고 유석동 등이다.
그는 무교회주의자로 낙인찍혀 기성 교회는 그를 강단에 세우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서 엄청난 사상적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거의 기독교 청년이었고 그를 최초로 미국에 초청한 단체도 기독교 집단이었다. 기성 교회가 하도 한심하게 굴었기 때문에 그는 교회와 인연을 끊는다고 선언했다.
사서삼경은 물론 노자, 장자에도 능통했을 뿐 아니라 '바가바드기타'라는 힌두 경전에도 조예가 깊었다. 한국의 성자라고 많은 사람이 존경하던 전통적 기독교 신자 장기려(1911~1995) 박사와도 절친한 사이였다. 그는 기독교적 진리를 더욱 밝히기 위해 진리가 숨어 있음직한 모든 고전을 쉼 없이 뒤지고 연구했다. 그가 한평생 간디를 흠모한 것은 사실이지만 간디처럼 살려고 노력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일 1식으로 일관한 그의 식생활은 누구 영향인지 잘 모르겠으나 그는 하루 한 끼만 먹고 90년 가까운 기나긴 인생을 건강하게 살 수 있었다. 함석헌은 "나도 미국이나 영국 같은 나라에 태어났다면 좀 달리 살 수 있었겠지"라고 스스로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함석헌이 우리와 함께 이 땅에 태어난 사실을 나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어려서 서당에 다닐 때부터 익힌 그의 한학 지식은 이 시대 누구도 따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가 매주 열린 일요 강좌에서 가르쳐줬던 그 많은 한시를 나는 아직도 암송하고 있다. 그는 영국 시인 셸리의 '서풍의 노래' 전문을 우리말로 아름답게 옮겨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명번역을 남겼다. 그 시의 마지막 구절 '겨울이 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라는 한마디는 나의 한평생 큰 버팀목이 됐다.
나이가 60, 70이 되어서도 함석헌은 "사랑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라고 고백했다. 그가 열일곱 살 결혼했던 사모님은 오랜 세월 병상에 누워 있다 돌아가셨다. 누구보다도 감정이 풍부했던 함석헌이 이성을 사랑한 사실이 놀랄 일은 아니었으나, 그가 어느 여성을 사랑하는 것 같은 눈치만 보이면 주변 '속물'들이 모두 들고일어나 스승인 그를 비난했다. 함석헌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독일 문호 괴테는 70, 80이 될 때까지 젊은 여성들을 사랑했는데, 왜 한국 사람인 나는 그러면 안 되나" 하며 탄식 아닌 탄식 을 하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는 괴테가 천재였던 것처럼 함석헌도 천재였다.
뛰어난 언변과 글솜씨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던 함석헌. 그 넓고 깊은 생각을 바탕으로 그가 엮은 사상은 전집 20권에 담겨 있고, 그가 토해낸 아름다운 인생의 노래들은 그의 시집 '수평선 너머'에 실려 있다. 그런 특이한 인물이 앞으로 100년 이내에 또 태어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05/201801050152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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