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이장희 울릉 天國에 가다.

2012. 7. 15. 12:32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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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너… 울릉도가 하와이보다 좋아 뒤도 안 돌아보고 이사
한 잔의 추억… 장군봉 올랐다 낚시하다… 해 떨어지면 와인 한 잔

울릉도 북쪽 해발 400m 장군봉 밑에 이장희가 산다. 그는 미국의 자유와 풍요에 매료돼 1980년부터 미국에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의 맨 동쪽 마을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고 있다. 그는“미국의 자연을 좋아했지만 나는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한국을 더 사랑한다”고 했다. / 울릉도=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서른 다섯, 스스로 묻다
어영부영 살게 될까봐,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뭘까, 정말 오랫동안 생각…
돈·명예·여자도 아니고결국 '자연'이더라

모기도 없는 우리집
동쪽엔 송곳봉, 남쪽엔 장군봉, 서쪽엔 동해 물비늘이 반짝
관광객들 아무 때나 덮쳐 빨래하는데 들어오면 민망

까맣게 잊었던 음악
내 음악, 뭐 그리 특별한가 시대가 나를 원했던 것뿐
입술 다쳐 기른 콧수염도 사회가 의미 부여한 것
울릉도 와서 다시 곡 써… 나 죽으면?♩♪ 울릉도에 묻어주오♬

교회 옆에 천국이 있었다. 이장희(65)의 집을 찾아 울릉도 북면 평리에 가보니 언덕 위에 자그마한 평리교회가 있고 그 옆에 '울릉천국'이란 팻말이 보였다. 울릉천국은 이장희가 자신의 집에 붙인 이름이다.

이장희는 언젠가 "울릉도에 놀러오라"면서 "멋진 별장을 기대하면 실망할 것"이라고 했었다. 과연 멋진 별장 따윈 없었다. 조립식 주택처럼 보이는 단출한 1층집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실망은커녕 그 황홀한 풍경에 한동안 감탄사만 내뱉었다. 4만3000㎡(약 1만3000평)에 이르는 비탈밭과 숲, 연못이 모두 그의 집 마당에 있었다. 마당 한쪽엔 해발 400m짜리 절벽이 우뚝 솟았다. 울릉도에서는 이 봉우리를 '석봉(石峯)'이라고 하지만, 이장희는 '장군봉(將軍峯)'이라고 불렀다. 마가목과 헛개나무를 심어놓은 비탈 밑에는 고비·삼나물·취나물·엉겅퀴·명이·부지깽이가 심긴 밭이 있었다. '울릉天國'이라고 쓰인 비석이 한쪽 구석에 섰고 그 비석을 여러 개의 석주(石柱)가 에워싸고 있었는데, 각각의 석주마다 이장희와 조영남·윤형주·송창식·김세환 같은 그의 '세시봉 친구들' 사인이 새겨져 있었다.

이장희가 살고 있는 집은 원래 방 3칸과 부엌, 외양간으로 이뤄진 집이었다. 지은 지 100년이나 된 집이라고 했다. 지금은 거실과 방 2칸, 부엌, 욕실 2칸으로 개조돼있다. 이장희는 "일단 구경부터 하라"더니 집 뒤편에 있는 모노레일의 시동을 걸었다. 놀이공원의 그것과 비슷한 모노레일엔 운전석을 포함해 좌석이 4개 있었다. 모노레일은 45도는 됨직한 급경사를 천천히 올라가 언덕 위에서 멈췄다. 그의 집은 정남향, 동쪽엔 송곳봉, 남쪽엔 장군봉, 서쪽엔 동해의 물비늘이 반짝였다. 지난 9일 서울에서 버스로 3시간 반, 강원도 묵호항에서 쾌속선으로 3시간, 울릉도 사동항에서 버스로 1시간을 달려서 닿은 그의 '천국'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언제부터 이곳에 산 겁니까.

"1997년에 집과 땅을 사고 98년부터 매년 2주 정도 휴가를 여기서 보냈어요. 그땐 집의 일부만 손봤었죠. 그러다가 2004년 '라디오코리아' 대표를 그만두고 은퇴하면서 뒤도 안 돌아보고 이리로 왔어요. 지금은 봄에 두 달, 가을에 두어 달 해서 1년에 다섯 달쯤 이곳에 살아요. 나머지는 미국 LA 집에 살고, 서울엔 그저 왔다갔다 들를 뿐이죠." 그는 2004년 주민등록을 아예 이곳으로 옮겼다. 작년 10월엔 '자랑스러운 경북도민상'을 받았다.

―집에 모노레일이 있는 게 독특하네요.

"모노레일은 울릉도 농가에 흔한 거예요. 워낙 산비탈에서 농사를 지으니까 모노레일 설치비용의 80%를 군에서 대줘요. 나도 더덕 농사도 짓고 나무도 심고 하니까 지원을 받은 거죠."

그는 더덕 농사를 그만두고 밭을 울릉도 농업기술연구소의 체험농장으로 빌려줬다고 했다. 일년 내내 머물지 않아 관리가 소홀해지기 쉬운 까닭이다. 그와 함께 음악을 했던 친구 조원익이 근처에 살면서 이장희가 없을 때 집을 돌봐주고 있다. 늘 이곳을 지키는 것은 세 살배기 골든 리트리버인 '라코'뿐이다.

―미국서 키우던 개를 데려오지 않았었나요.

“걔는 시베리안 허스키였어요. 17살까지 살고 이곳에서 죽었죠. 걔 이름도 ‘라코’예요. ‘라디오 코리아’를 줄인 거죠. 라디오 코리아가 처음 출범할 때 하도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도둑이 자주 들어서 도둑 막으라고 유기견 보호소에서 데려온 개였죠.” ‘1대 라코’는 헛개나무가 자라는 비탈 한쪽에 묻혔다. 작은 십자가가 나뭇잎 사이로 보였다.

―왜 울릉도입니까.

“처음엔 은퇴하면 하와이에 살 생각이었어요. 아름답고 이국적인데다가 미국 본토보다 한국에 가까우니까요. 그런데 친구 하나가 ‘너 울릉도에 가본 적 있느냐’며 울릉도 여행을 권해요. 그래서 울릉도에 와봤는데, 도동항에 내리자마자 ‘한국에도 이런 곳이 있구나’ 하면서 감탄했어요. 그 길로 1주일간 걸어서 울릉도를 여행한 뒤, 농협에 찾아가 ‘여기에 살고 싶은데 땅을 알아봐 줄 수 있느냐’고 부탁해서 이 땅을 구한 거예요. 그게 97년이죠.”

―울릉도에서도 가장 한산한 동네 같은데요.

“나는 번잡한 곳이 싫어요. 자연 속에 있는 게 좋지. 울릉도가 좋은 것 중 하나는 모기가 없다는 거예요. 저녁에도 밖에서 불 켜놓고 밥을 먹을 수 있을 정도예요. 모기향 피울 일이 없으니까요.”

―서울에서 가수 생활을 하다가 LA에서 라디오 방송국 사장으로 은퇴했으니, 번잡한 곳에서만 산 편입니다만.

“그때도 늘 여행은 다녔어요. 강원도 화천 같은데 여행가면 서울 돌아가는 게 아주 싫었어요. 내가 서른다섯 살 때 인생의 위기가 왔어요. 마누라, 애들과 헤어져 살게 됐으니까요. 그때 스스로에게 질문한 것이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게 무엇인가’였어요. 그 해답을 찾아야 어영부영 살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정말 오랫동안 생각했어요. 그랬더니 돈이나 명예, 여자 이런 게 아니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결국 자연이었어요. 그래서 LA에 있을 때도 데스 밸리(캘리포니아에 있는 사막지대)에 수백번 넘게 갔었죠. 사람들이 사막을 잘 모르는데, 사막은 대지의 나신(裸身)이에요. 어딜 가도 전인미답(前人未踏)이죠. 정말 깨끗하고 순수해요. 하여튼 그래서 은퇴한 뒤에는 자연 속에서 살겠다고 결심한 거예요.”

―울릉도에 1년 4~5개월만 사는 거라면 완전히 자연 속에서 사는 건 아니네요.

“그게 나도 이율배반적인 것 같아요. 번잡한 건 싫지만 사람들을 피하려고 애쓰는 것도 아니에요. 은둔생활을 하고 싶지만 완전히 은둔자는 못되는 거죠. 내 친구들은 다들 ‘노인이 됐으면 병원 가까운데 살아야지 왜 거기 있느냐’고 해요. 그렇지만 노인에게는 자연이 어울려요. 그리고 사실 자연 속에서 별 불편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도 복이에요.”

―여기 혼자 살려면 자연뿐 아니라 혼자 사는 것도 즐길 줄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맞아요. 여기서 혼자 있어도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아요.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바쁜 편이에요. 아침 6시쯤 일어나면 커피 끓여 마시고 7시쯤 장군봉에 올라갔다가 와요. 8시 반쯤 돌아와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점심 해먹죠. 그리고 미국에서 만든 대학 강의 DVD가 있어요. 그걸 내 아이패드에 넣어서 매일 한두 시간씩 강의를 듣죠. 주로 철학, 미술, 그리스·로마 시대 이야기 같은 거예요. 그러다 보면 저녁 시간이 되고, 해가 떨어지면 여기서는 별로 할 일이 없어요. LA 있을 때부터 와인을 마시기 시작해서 여기서도 거의 매일 저녁에 와인을 반 병씩 마셔요.”

―원래 집안일을 손수 했습니까.

“결혼생활 할 때는 안 했고, 은퇴한 뒤에는 내가 다 했죠. 밥 해먹고 치우는 데 보통 두 시간씩 걸려요. 거기에 청소·빨래까지 하면 하루 4시간을 집안일에 써야 되는 거예요. 일하는 사람을 둘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은퇴한 놈이 내 일은 내가 해야지, 하고 생각했죠. 지금은 애 엄마가 미역국과 반찬을 잔뜩 만들어놓고 가서 좀 편해요.”

―‘애 엄마’요?

“며칠 전에 첫 번째 아내가 외손주들하고 놀러왔었어요. 나는 지금도 첫 번째 두 번째 아내와 친구 사이로 지내요(그는 첫 번째 부인과 1983년에, 두 번째 부인과 1999년에 각각 이혼했다). 애들은 못 오고 애 엄마가 초등학생 외손주 셋을 데리고 왔는데, 신나게 놀았죠. 오랜만에 울릉천국에 애들이 가득했어요. 아이들이 있어야 천국인 것 같아요. 하하하.”

―그분이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의 주인공이죠.

“그래요. 다른 사람들은 헤어지면 영 헤어지더라고요. 그럴 필요 있나요. 그런데 워낙 이혼하면 안 보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영남이형(조영남)은 나에게 ‘하여튼 너는 희한한 놈’이라고 해요. 나는 아이들(1남 1녀)과도 친구처럼 지내요. 아마도 예전에 우리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옛날 아버지들은 야단만 치고 기타나 때려 부수고…. 아들은 작년에 오고 이달 말에 또 온대요.”


―‘울릉도는 나의 천국’이란 노래를 작년에 발표했죠.

“세시봉 인기 덕분에 ‘울릉도 노래 한 곡 만들겠다’고 방송에서 말했더니, 동네 사람들이 만날 때마다 ‘그 노래 언제 나오느냐’고 물어요. 그래서 하루는 바닷가를 거니는데 죽은 개 라코가 생각나는 거예요. 라코를 울릉천국에 묻었으니까 나도 죽으면 여기 묻혀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나 죽으면 울릉도에 묻어주오’라는 가사가 나왔어요. 그 가사가 나오니까 금방 노래를 쓸 수 있었죠.”

그는 노래 ‘울릉도는 나의 천국’에서 이렇게 읊었다. “비바람이 내 인생에/ 휘몰아쳐도 걱정없네/ 울릉도가 내겐 있으니/ 봄이 오면 나물캐고/ 여름이면 고길잡네/ 가을이면 별을 헤고/ 겨울이면 눈을 맞네/…/ 나 죽으면/ 울릉도에 보내주오/ 나 죽으면/ 울릉도에 묻어주오.”

―어려서부터 남들과 인생에 대한 생각이 달랐나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죽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그때 ‘드라큘라’라는 영화를 보고 죽음의 공포를 느꼈어요. 그래서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다 보니 마구 비약을 해서 결국 내가 죽어도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고 세상은 그대로 흘러가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때 서울 창신동에 살았는데, 앞집에 살던 할머니가 나랑 무척 친했었는데 돌아가셨어요. 그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한 사흘 만에 나는 깨달았어요. 그 할머니의 죽음이 내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래서 그때 아, 죽음이란 게 이런 거구나 하고 생각했죠. 그래서 그때 난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야겠다. 누가 뭐라고 한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겠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인생은 딱 한 번이고 연습도 없고 복습도 안 돼요. 리허설 없이 태어나면 바로 본 공연이야. 그게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 인생의 근본에 있는 핵심적인 생각이에요.”

―콧수염을 기르고 1971년에 가수로 데뷔한 것도 그런 생각 덕분이었나요.

“하하하. 콧수염은 오토바이 사고 때문에 기른 거예요.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가 나서 앞니가 다 부러지고 입술을 크게 다쳤어요. 의사가 입술이 흉하니 수염을 기르는 게 좋겠다고 했지요. 나는 아무 의미 없이 필요에 의해서 길렀는데 그게 그 시대의 아이콘이 된 것 같아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사회가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죠.”

―그렇다고 하기엔 당시에 발표한 노래들이 무척 파격적이었죠. 이를테면 ‘마시자, 마셔버리자’ 같은 직설적 가사, ‘그건 너 때문이야’ 같은 반말투 가사도 그랬고요.

“나는 행크 윌리엄스(1940~50년대 미국 컨트리 가수) 노래를 무척 좋아했어요. 그 사람 노래의 가사와 리듬, 분위기가 굉장히 직설적이었어요. 그 영향을 많이 받았죠. 그런 노래들 가사는 내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쓴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신중현씨가 나보다 먼저였던 것 같아요.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이런 유의 가사만 봐도 그렇죠. 나는 내가 무슨 대단한 상징적 인물인 것처럼 비치는 게 싫었어요. 유명인이 되는 것도 싫었고, 자유를 속박당하는 것도 싫었어요. 그때는 부자나 권력자가 와서 노래하라고 하면 가야 하는 분위기였지만 나는 그런 데 한 번도 가지 않았어요.”

―‘그건 너’의 2절은 작가 최인호씨가 썼다면서요.

“그래요. 1절만 쓴 상태에서 인호형한테 ‘2절 한번 만들어볼래?’ 하고 전화했더니 한 30분 만에 쓰더군요.” ‘그건 너’의 2절은 “전화를 걸려고 동전 바꿨네/ 종일토록 번호판과 씨름했었네/ 그러다가 당신이 받으면 끊었네/ 웬일인지 바보처럼 울고 말았네”다.

이장희는 연세대 재학 시절이던 1966년 윤형주 등과 함께 ‘라이너스 트리오’라는 팀을 만들어 잠시 활동한 뒤, 1971년 자신의 이름으로 데뷔하기 전까지 주로 남에게 곡을 써주는 작곡가로 활동했다. 데뷔한 뒤로 동아방송 DJ를 겸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던 그는 1975년 이른바 ‘대마초 파동’으로 구치소 신세를 지면서 대중 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대마초 파동’에는 여러 가지 루머가 있던데요.

“그게 너무 황당한 사건이에요. 내가 박지만(박정희 대통령의 아들)씨한테 대마초를 가르쳤다고 소문이 난 거예요. 나는 그 사람과 알고 지내긴 했지만 친하지는 않았어요. 나중에 누군가 그걸 해명하라고 하는데, 뭐 좋지도 않은 이야기를 해명한다고 또 꺼내겠어요. 그래서 관뒀지요,”

―그때 구치소 생활이 음악계를 떠난 계기였습니까.

“좀 거북한 얘기인데… 구치소에 20일간 있다가 벌금형을 받고 끝났어요. 그러고 나서는 이제 연예계를 뒤도 돌아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한때는 대한민국의 스타였는데 그게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어요. 부를 가진 것도, 명예를 누린 것도 아니죠. 남들은 말리기도 했지만, 어렸을 적부터 생각한 것처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결정하고 떠났지요.”

―그리고 ‘반도패션’을 차린 건가요.

“그때 기성복이 막 유행할 때였어요. 럭키상사에서 반도패션이란 기성복을 내놓았죠. 그래서 지금 광화문우체국 옆에 반도패션 대리점을 냈어요. 그게 잘 됐죠. ‘이장희가 옷가게 한다더라’ 하는 소문도 장사하는 데 도움이 됐고.”

이장희는 그러나 음악계를 아주 떠나지 못했다. ‘대마초 파동’ 직전 그는 ‘사랑과 평화’를 자신의 밴드로 새롭게 출발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의류 판매사업을 시작한 그는 그 계획을 포기한 대신 ‘한동안 뜸했었지’, ‘장미’ 같은 노래를 작곡해 ‘사랑과 평화’를 데뷔시키고 스타 반열에 올려놓았다. 김현식의 ‘주저하지 말아요’, 우순실의 ‘꼬깃꼬깃해진 편지’ 등을 작곡하고, 김완선 3집 ‘나홀로 춤을 추긴 외로워’를 제작했다. 김도향이 쓰고 김태화가 부른 노래 ‘바보처럼 살았군요’도 이장희가 제작했는데, 이 노래가 1980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태평양가요제에 출품되면서 그는 전혀 다른 세계로 넘어가게 됐다.

―그때 미국에 처음 간 겁니까.

몬트리올에 가서 망신당하고 문화적 모멸감을 느꼈지요. 노래는 좋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편곡 실력이 엉망이었어요. 현지 오케스트라에 맞춰 편곡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리허설 때 반주가 계속 사라지는 망신을 당했어요. 어찌어찌 그 행사를 마치고 뉴욕을 경유해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뉴욕에 가보니 미국의 분위기가 마음에 쏙 들었어요. 온 세계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미국의 자유와 풍요같은 걸 느낀 거죠. 그 길로 ‘나는 미국에 살아야겠다’고 결정하고 LA로 건너갔어요.”

그는 LA 한인타운의 작은 라디오방송국에 찾아가 “무보수로 일할 테니 취업비자를 내 달라”고 부탁해 미국 체류자격을 얻었다. 마침 그곳에 와있던 작가 최인호와 한 달간 미국 서부를 자동차로 여행했는데, 최인호는 그때의 여행 경험을 토대로 소설 ‘깊고 푸른 밤’을 써서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깊고 푸른 밤’의 주인공 모델이 이장희였다면서요.

“그걸 나중에 배창호 감독이 영화로 찍을 때에서야 알게 됐어요. ‘대마초 사건으로 활동을 중단하고 미국에 온 가수’가 주인공인데, 누가 봐도 내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소설에 나오는 내용은 전혀 사실과 달랐으니까 너무 황당했죠. 그때 인호형한테 전화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무척 화를 냈었죠. 사과를 받았지만 그땐 석연치 않았어요. 인호형이 비겁하다고 생각했죠.” 물론 두 사람은 나중에 알래스카 여행도 다녀올 만큼 다시 가까워졌다.

이후 ‘라디오 코리아’를 설립해 크게 성공시킨 그는 2003년 12월 방송국 사장 자리를 마치고 은퇴했다. ‘라디오 코리아’는 스튜디오와 장비만 갖추고 전파 송출권을 임대해서 방송하던 회사인데, 송출권료를 두 배로 올려달라는 요구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애초에 50살에 은퇴하고 싶었지만 못했는데, 무리한 요구를 받으니 이제 정말 은퇴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듬해 ‘울릉천국’으로 주소지를 옮긴 것이다.

―사업 수완이 좋았다고 하던데요.

“남들보다 못하지는 않았어요. 음악이든 사업이든 똑같은 거예요. 벽돌을 누구보다 완벽하게 쌓는 사람이 그림을 정말 잘 그리는 사람과 다를 게 없어요. 베토벤의 음악이나 나폴레옹의 전략 전술이 완벽하다는 면에서는 같다는 거죠. 동네 치킨집 사장과 삼성그룹 회장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해요.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은 이것이고, 이런 것에 대비해서는 이걸 해야 되고, 이건 놓치면 안 되고, 그런 평형 감각, 집중력, 노력은 똑같은 거예요. 그런 것은 예술을 하든 사업을 하든 농사를 짓든 꽃을 심든 연못을 파든 똑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울릉천국’에는 쉬지 않고 손님들이 찾아왔다. 외지에서 온 관광객도 있었고, 인근 초등학교 교장도 들러 안부를 물었다. 어떤 이들은 멀리서 인사만 하고 돌아갔지만, 대개는 다가와 악수하고 사진도 찍고 싶어했다. 그는 “여기가 관광지처럼 된 것까지는 할 수 없는데, 덮어놓고 들어오니까 곤란하기도 하다. 마당에서 빨래하고 있는데 들어오면 좀 민망한 것 아니냐”며 웃었다.

―대마초 파동 후에도 활동을 계속했으면 좋지 않았을까요.

“나의 시대는 나를 요구했었다고 생각해요. 내가 음악적으로 뭐 그리 특별했어요. 형주, 창식이, 영남이형, 세환이 노래도 다 좋고, 그 사람들 인기가 엄청났었다고요. 그 시대가 내 음악을 필요로 했었던 거죠. 베토벤 시대에는 헨델보다 베토벤을 원했던 거예요. 그리고 베토벤은 파가니니에게 그 자리를 물려줬지요. 나는 다만,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음악을 30년 만에 다시 할 수 있게 돼서 정말 행복해요. 내 나이가 60이 훌쩍 넘었는데 말이지.”

그의 노래 ‘내 나이 육십하고 하나일 때’는 그가 스물일곱 살이던 1974년 고려대 신입생 환영회에 초대받고 그 전날 쓴 곡이다. 38년 전 그는 지금의 나이를 생각하며 “그 때도 울 수 있고 가슴 한구석엔 아직/ 꿈이 남아있을까” 하고 노래했다. “그 노래 가사의 물음에 뭐라고 대답하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나갑시다. 여기 밤에 산책하는 게 정말 좋아” 하며 훌쩍 일어섰다.

 

 

[출처]  [Why] [한현우의 커튼 콜] 이장희 울릉 天國에 가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7/13/2012071301406.html?news_Head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