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3. 10:05ㆍ스크랩
입력 : 2013.09.03 03:23
- 이석우·경제부 기자
올 1월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Dallas) 공항에서 비행기 탑승 시간을 기다리다 이런 안내방송을 들었습니다. 미국 국내선 비행기 내에는 짐을 올려놓는 공간이 부족해 먼저 타는 게 항상 유리합니다. 일등석, 비즈니스석 손님은 비싼 요금을 냈고, 장애인은 약자 배려차원에서 먼저 탑승하는 게 이해됐지만, 사지(四肢) 멀쩡하고 같은 요금을 낸 군인들에게 왜 먼저 타라고 하는지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미국 어느 공항을 가더라도 “군인은 먼저 탑승하라”는 방송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비행기에 일등석·비즈니스석에 빈자리가 있을 때는 승무원은 제일 먼저 이코노미석에 있는 군인을 찾아 “일등석에 빈자리가 있는데 괜찮으시면 옮기시라”고 했습니다. 물론 ‘공짜’입니다. 돌아오는 길, 세인트루이스 공항 터미널에서도 색다른 광경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군복을 입은 군인이 짐을 찾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데, 50대 백인 아저씨가 군인의 등을 툭툭 치며 말을 건넵니다. “어디서 근무하느냐. 힘들지 않으냐. 너의 희생 덕분에 우리가 편안히 잘 산다. 고맙다”며 끌어안더군요. 물론 두 사람은 처음 본 사이였습니다.
19일 미 버지니아주 알링턴국립묘지에서 열린 한국전 참전용사 잭 타이 중사의 장례식에서 의장대가 관을 감쌌던 성조기를 걷고 있다. 1950년 한국전 참전 중 20세의 나이로 숨진 타이 중사는 2002년 미군이 북한에서 실시한 미군 유해 발굴작업으로 58년 만에 조국에 묻히게 됐다. /워싱턴=이하원 특파원 May2@chosun.com
◇미국에서 어떤 신용카드, 멤버십 카드 보다 더 강력한 할인혜택 주는 ‘보증수표’
저는 작년 7월부터 미국 중부 미주리대학에서 1년간 연수했습니다. 여기서 미국과 우리나라가 많이 다르다고 느낀 것 중 하나가 ‘군인’을 대하는 문화였습니다. 한국에선 군복을 입은 군인을 속칭 ‘군바리’라고 부르기도 하고 은근히 무시하는 문화가 있는 반면, 미국에선 군복만 입었다하면 ‘군인님’이 되더군요. 어디서나 군인을 우대하고 존중해 주는 문화가 콸콸 넘쳤습니다.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군인 및 제대 군인 할인’입니다. 우리나라에선 신용카드에 따라 백화점·커피전문점·놀이동산·영화관에서 무이자 할부나 할인을 해준다고 광고를 하지요. 하지만 미국에선 ‘군인증, 제대 군인증’만 제시하면 어떤 신용카드나 멤버십 카드보다 강력한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올 4월 제가 살던 미주리주 컬럼비아시(市)에서 자동차로 2시간 정도 떨어진 캔자스시티에 쇼핑몰 ‘레전드 아웃렛(Legends Outlet)’에 들린 적이 있습니다. 친하게 지내던 칠순 할아버지가 함께 갔는데, 이분은 미군에서 근무하다 10여년 전 제대했습니다.
20% 할인 행사를 하는 폴로(Polo) 매장에 들어가 옷가지를 몇장 주워들고 계산대로 왔습니다. 계산을 하려고 하니 할아버지께서 “잠시 기다리라. 요것을 보여주면 깎아 준다”고 하더니 전역 군인증을 내놓았습니다. 전역 군인증을 본 옷가게 직원은 그 자리에서 바로 10%를 추가해 할인해 줬습니다. 미국 전역에 있는 프리미엄 아웃렛, 먀샬, 티제이맥스 등 대부분의 쇼핑몰에선 군인 할인 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식당에서도 마찬가집니다. 미주리주 주(州) 청사가 있는 제퍼슨시티(Jefferson city)에는 한국인 사장이 운영하는 일식당이 있습니다. 이 식당에서도 군인·제대군인에 대해 10%를 할인해 줍니다.
이곳 사장님은 “미국 식당은 어디에서나 군인 할인을 해 주기 때문에 우리도 당연히 할인 제도를 시행한다. 신분증이 없어도 군복을 입었거나, 머리 깎은 모양새가 군인이면 물어보지 않고 그냥 깎아 준다. 가끔 군인 가족이 식사 중이면 일면식도 없는 다른 손님이 ‘저 테이블 밥값은 내가 계산하겠다’는 사람도 있다”고 하더군요.
한국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차 미주법인은 주(州)방위군을 포함한 모든 현역 군인과 재향군인이 차를 살 때 일괄적으로 500달러씩 깎아줍니다. 현역 군인과 재향 군인에 대해 적용한 할인금액은 지난해에만 2400만달러나 됩니다.
매년 봄 프로야구 개막전에서도 군인과 그 가족들은 ‘특별 대우’를 받습니다. 워싱턴DC 연고팀인 내셔널스는 올 4월 군인 자녀 중 9명을 뽑아 팀의 주전 9명과 함께 개막전 경기장에 서게 하고, 시구(始球)에 나선 오바마 대통령은 군 자녀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이들을 격려하더군요. 개막전에 참석한 수많은 귀빈 가운데 오바마 대통령이 가장 먼저 포옹한 사람도 제복을 입은 장병들이었습니다.
미국 텍사스 센안토니오공항에 복무 중인 군인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하는 광고판이 붙어 있다.
◇관공서, 은행들은 군인의 ‘새치기’를 공식적으로 허용하기까지
미국의 쇼핑센터나 식당, 자동차 판매회사 등에서 군인·제대군인에 대해 할인해 주는 것은 ‘장삿속’일 것입니다. 하지만 군인을 대하는 미국인들의 태도를 보면 군인 할인 제도가 단순히 돈을 더 벌겠다는 심산만은 아닌 듯합니다.
미주리주 콜롬비아시티의 운전면허 발급·자동차 등록사무소(Motor Vehicle & Drivers License Office)는 창구 직원과 말을 한번 하려면 줄을 서서 기본 30분~1시간은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이 사무실의 깐깐한 창구직원도 군복만 입고 나타나면 줄 맨 뒤에 서 있는 군인에게 손가락을 까닥까닥하며 부릅니다.
군인은 먼저 일을 처리해 주겠다고 ‘공식적인 새치기’를 시켜주는 겁니다. 줄을 서 있던 민원인들도 아무 군소리를 하지 않고 당연한 일로 받아들입니다.
관공서나 은행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 대통령이나 정치인도 군인과 참전용사에 대해 각별하게 예우합니다. 야구·골프·풋볼 등 미국의 인기 스포츠 경기장에선 군인을 위한 좌석이 별도로 있거나, 입장권을 할인해 줍니다.
워싱턴DC 내셔널몰 광장을 사이에 두고 있는 베트남전쟁기념관은 국민 기금(840만달러)을 모아 3년 공사 끝에 1982년 문을 열었는데, 1984년부터 거리·시간·건강 등의 이유로 이곳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움직이는 벽(moving wall)’을 만들어 미국 전역을 순회하고 있습니다
보통 지역 마다 5~6일씩 머무는데, 지역 참전용사 협회는 물론 주당국, 시당국은 3~4개월전부터 대대적인 추모행사를 준비해 성대하게 치릅니다.
일화 하나를 더 소개하죠. 한국 국방부에 연수를 온 A소령이 이웃동네에 살았습니다. A소령이 운전 중이었는데, 자동차 한 대가 앞에서 속도를 줄였다높였다 하며 장난을 치더랍니다. 자동차를 길에 세우고 따졌더니, 덩치가 산만한 20대 백인이 내려 다짜고짜 고함을 치며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A소령이 “나는 한국에서 온 군 장교다. 행동 똑바로 하라”고 한마디 했더니 갑자기 꼬리를 내리고 사라지더랍니다. 한국에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A소령은 “미국에서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군인’이라고 신분을 밝히면 유리하다는 얘기를 선배들로부터 들었지만 그 덩치 큰 녀석이 ‘군인’라는 말 한마디에 갑자기 꼬리를 내리는 것을 보고 나도 놀랐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부당한 방법으로 군복무를 기피한 사람에 대해서는 냉혹한 사회적 비판과 불이익이 가해집니다. 그렇다고 복부 중인 현역 군인을 예우를 해 주거나 우대해 주는 문화도 없습니다. 오히려 제복을 입은 군인을 무시하고 때론 적개심을 품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문화가 생겨난 배경에는 군부 독재 경험에다 1990년대 초까지 군 출신이 집권한 나라여서 군에 대한 거부감 등이 있을 것입니다. 한국에선 남자라면 누구나 군복무를 하기 때문에 특별 대우를 할 필요가 적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이젠 우리도 좀 달라졌으면 합니다. 현역 군 장교 중에 군사 독재 시절 달콤한 ‘권력의 맛’을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현재 군 장성들도 대부분 20년 전에는 초급장교여서 시쳇말로 야전에서 ‘박박 기느라’ 권력의 단맛을 본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영·위관급 장교들은 그 시절엔 대부분 입대조차 하지 않았지요.
우선 사병들이라도 잘 예우했으면 좋겠습니다. 최소한 미국 군인은 월급이라도 제대로 받고 군 복무를 하지만, 우리나라 사병의 평균 월급은 12만 9600원입니다. 삼겹살에 소주 한 잔 먹을 수 있는 돈입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는 전시(戰時) 상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현역 군인 상시(常時)할인’을 내건 쇼핑몰·백화점이 등장하길 기대해 봅니다. 설령 장삿속이라도 좋습니다. 젊은 여성들이 할인받으려고 군대에서 휴가나온 남자 친구의 손을 잡고 ‘폭풍 쇼핑’하는 모습 상상만 해도 흐뭇하지 않나요?
[출처 : 조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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