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 1억원 기부자 모임에 가입한 경비원 "자식들 다 전세 살아도"

2014. 12. 22. 16:20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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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락(67)씨는 서울 대학로에 있는 한성대 에듀센터의 경비원이다. 한 달 전 그는 1억원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에 가입했다.

경비 일은 24시간 맞교대로 한다. 비번(非番) 날, 서울 성북구 종암동의 언덕배기에 있는 그의 아파트로 찾아가면서 '경비 일은 노년의 소일(消日)로 하는 것이고 쌓아둔 재산이 많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현관문을 열어준 그는 단단해 보였다. 거실에는 여기저기 세탁물이 널려 있었다. 2인용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좋은 아파트에 사시네요. 실내도 꽤 넓은 편이고.

"내가 63세가 돼서야 장만했어요. 사글세·전세로 전전하다가 이 동네에 30평짜리 집을 샀어요. 재개발이 되면서 아파트에 들어오게 된 거죠. 추첨해서 18층 높이에 12층을 뽑았으니 다들 운 좋다고 했어요. 남향에다 전망이 좋죠."

김방락씨는 "나 같은 경비원이 내놓으면, 가진 사람들도 조금씩 베풀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최보식기자

 

 

―경비원 봉급이 120만원이라면서요?

"처음 시작할 때는 90만원이었어요. 국방부 군무원으로 근무하다가 2004년 정년퇴직했어요. 사지가 멀쩡한데 놀 수 없잖아요. 경비라도 해야겠다며 한 게 10년 됐습니다. 안 쫓아낼 때까지 일할 겁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000만원을 낸 뒤 나머지 9000만원은 내년 말까지 완납하겠다는 약정서를 썼지요. 혹시 빚내서 기부하는 건 아니겠지요?

"그러면 안 되죠. 막무가내로 하면 안 됩니다. 정기 저축과 적금을 들어놓은 게 있어요. 중간에 깨기가 그래서 내년 말까지 미룬 거지, 만기가 될 때마다 미련 없이 줘야지요. 남자가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지요."

―저금통장이 몇 개나 되길래요?

"여남은 개 있어요."

―이런, '알부자'이시군요?

"내가 무슨 돈이 있겠어요. 안 먹고 안 쓰고 모은 거죠.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워요. 추워도 보일러를 잘 안 틀어요. 벽에 걸려 있는 저런 액자도 다 얻어온 겁니다. 자린고비 식으로 산 거예요. 남을 돕겠다면서 제 먹을 것 입을 것 다 챙기면 해낼 수가 있나요."

―절약해도 1억원을 모으기란 쉽지 않은데.

"군인연금이 나옵니다. 베트남 참전 수당도 있지요. 그게 다 여윳돈입니다. 내 경비원 봉급만으로 생활이 되니까요."

―그런 연금으로 노후를 좀 더 여유 있게 사시지.

"후년이면 우리 나이로 칠순입니다. 말년에 어떻게 하면 좋은 모습으로 남겠느냐, 어떻게 해야 자식이나 주위에 울림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했어요. 나는 고생을 하면서 큰 사람입니다. 나 같은 경비원이 내놓으면 가진 사람들이나 돈 자랑하는 사람들도 조금씩 베풀려고 하지 않을까. 그러다가 결정한 거죠. 내가 결단력이 있어요."

 

―그런데 자녀들은 결혼해 집을 장만했나요?

"1남 1녀가 있는데 다 전세로 살아요. 특히 딸은 1억원이 안 되는 전세에 살고 있어요. 딸이 좀 섭섭했을 겁니다."

―팔도 안으로 굽는 법인데, 모르는 남들을 돕기보다 자녀에게 보태주는 게 순서 아닌가요?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결혼했으면 저네들이 알아서 살아야지요. 나는 부모에게 돈 한 푼 받은 것 없이 맨몸으로 나와 살지 않았습니까. 내가 자립했으면 저네들도 자립해야지요."

―자녀 교육은 남들만큼 다 시켰습니까?

"아들은 연세대 통계학 박사입니다. 부모가 자식 자랑하면 반편이라지만, 아들은 대학 다닐 때부터 장학금을 받았어요. 결혼해서 지금은 서울삼성병원 암(癌)병동 연구원으로 있습니다. 딸도 그럭저럭 대학을 마쳤어요."

―자녀에게 "아비가 어려운 사람을 위해 1억원 기부하려고 한다"고 했을 때 뭐라던가요?

"사전에 얘기하면 내가 마음먹은 목표를 추구하기 어려워요. 아내한테도 말 안 했어요."

―가족들은 전혀 몰랐다는 뜻인가요?

"알리지 않았죠. 평소에 '돈 있으면 자선단체에 희사(喜捨)를 해야겠다'고 말해왔으니까요. 귀띔은 한 셈이지요."

―선생이 돈을 벌어왔다고 해도 집안 살림은 부인이 해왔는데, 부인과도 상의 없이 해도 됩니까?

"하하, 그렇게 따지면 할 말 없지만, 나대로 생각이 있었어요. 1억원이 애 이름도 아닌데, 상의하면 이런 걸 못 해요."

―그러면 매스컴에 보도됐을 때 반응은 어땠나요?

"아내는 아무 말도 안 해요. 이미 상황 끝인데 어떻게 하겠어요. 이게 뭐 나쁜 일인가요. 부모가 이렇게 하면 자식들에게도 자랑스러운 일이지."

 

                                        김방락씨의 일기장

 

―이런 남편과 살아온 부인이 행복했는지 모르겠네요.

"글쎄, 속으로 불만이 많았겠지요. 군에서 제대하고 내가 막노동을 할 때 결혼했어요. 손 벌릴 데가 없었어요. 처가 살림도 형편없었고. 작은 단칸방에서 살았죠. 하지만 젊음이 재산이었죠. 그래도 우리 때는 노력하면 밥은 먹었는데, 요즘에는 부모가 가난하면 대물려서 가난해요."

―그런 가난의 대물림을 안 하려면 자녀들에게 먼저 신경 써야지요.

"여태껏 뒷바라지했으면 됐지…. 딸은 '어려운 우리나 도와주시지' 하는 마음이 있었을지 몰라요. 사위가 사업한다고 형편이 어려워요. 지금 살고 있는 집 전세금이 오른다고 해서 내가 미리 '입막음'으로 2000만원은 줬어요. 내가 언제까지 해주겠어요. 결혼했으면 둘이서 살 연구를 해야지, 늙은 아버지한테…. 자녀에 대해 책임을 지려면 관(棺) 속에 들어갈 때까지 끝이 안 나요. 나는 내 길이 있고 아이들도 자기 길이 있는 겁니다."

―제가 '속물'인지는 몰라도, 자신은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으면서 평생 남루하게 살면서 남을 돕겠다며 돈을 내놓을 때 다른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삶부터 챙기고 여유분으로 남들을 도왔으면 하지요.

"지금 나는 집도 있고 밥 먹고 살잖아요. 연금이 나오고 일도 하고 있어요. 정말 가진 사람들이 보면 웃기겠지만, 남들을 도울 여유가 있어요."

―자린고비처럼 살았다면서요?

"돈은 거지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라고 했잖아요. 내가 아낄 때는 아끼지만 쓸 때는 화끈하게 씁니다. 다만 쓸데없는 데 안 썼을 뿐이죠."

―부부 동반 외국 여행을 해본 적은 있습니까?

"경비 일 때문에 1박 2일로 어디 갈 수가 없어요. 해외에 가본 것은 군 시절 베트남에 파병 간 게 전부죠. 사실은 제주도에도 못 가봤어요."

―기부 약정을 하면서 "내가 살아오면서 남들에게 받은 부분을 조금이라도 돌려주고 싶었다"고 했는데, 남들에게 무슨 도움을 받았습니까?

"남한테 실질적으로 받은 것은 없지만, 국가가 있어서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잖아요. 스무 살에 군대에 들어갔고 전역한 뒤로는 군무원 생활을 한 덕분에 늙어 죽을 때까지 먹고살 연금을 타잖아요."

고향이 전북 정읍인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군대에 지원하기 전까지 집안에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가난에 대한 한이 많았을 것 아닙니까?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여유 있게 살아보는 게 꿈이었을 텐데요.

"내 주위에는 어려운 사람이 많았어요. 부모 잘 만나 공부 많이 하고 잘 먹고 잘사는 사람들은 이런 없는 사람들 심정을 몰라요. 그러니 어려운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돕습니다. 청문회에 나온 장관 후보나 힘있는 사람들은 세금 덜 내고 집 계약서를 어떻게 해서 돈을 빼먹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이들이 행여 돕는다고 하면 생색 내고 사진 찍히는 데만 하지요. 사실 이런 사람들이 앞장서 돈을 내놓아야 합니다. 나 같은 사람도 하는데, 돈 없어 못 하겠습니까."

―세금을 내고 있는데, 개인 기부를 강요할 수는 없지요.

"남북이 대치하고 있어 국방비 등 돈이 많이 들지 않습니까. 세금으로 어떻게 어려운 사람들을 다 신경 쓰겠습니까. 없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 사실은 애국애족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거실에 놓인 작은 상(床) 위에는 자료와 공책이 쌓여 있었는데 '중국문화산책'이라는 책도 보였다.

―경비 일을 하면서 이런 책도 봅니까?

"안방에 책이 많습니다. 10년째 매일 기도 형식으로 일기도 쓰고 있어요. 내가 학교는 못 다녔지만 집에서 천자문도 배우고 내 나름대로 책을 꽤 읽었어요. 군대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어요."

―역시 말씀하시는 게 다르다 느꼈는데.

"나이 든 기자분이라 말이 통하는군요. 남들보다 지식에서는 꿀리지 않았어요, 학교 졸업장이 없는 걸 빼면…. 그래서 정년퇴직한 뒤 경비 일을 하면서 고등학교 졸업장을 땄어요."

―은퇴한 뒤 검정고시를 쳤다는 뜻인가요?

"검정고시가 아니고, 서울 신설동에 있는 4년제 진영중고등학교를 나왔어요. 주경야독으로 한 거죠. 거기 가면 팔십 먹은 노인도 있고 열댓 살 먹은 아이들도 있어요."

―그 연세에는 실제 용도가 별로 없을 졸업장을 왜 굳이 땄습니까?

"내가 군 생활 8년을 하고 중사로 전역했어요. 사회에 나와 처음에는 막노동을 했어요. 그러다가 국방부 군무원 채용 시험을 봐서 당당하게 합격했어요. 국방부에 '나이롱뽕'을 쳐서 들어갑니까. 이 정도면 내 실력은 인정받을 만하겠죠. 하지만 그놈의 졸업장이 없으니 내놓을 게 없잖아요. 그게 한이 돼서 늦었지만 했던 거죠. 방송대까지 다녀보려다가 경비 일로 시간이 벅차고 눈도 어두워 포기했어요."

―이런 질문이 성립될지 모르나, 혹시 꿈이 있습니까?

"기부하겠다는 게 제일 큰 꿈이었는데 이제 실현됐어요. 또 하나 있다면 손자를 보는 것뿐이지요."

―힘들게 모은 돈을 내놓으면 아깝지 않습니까?

"아깝다고 생각하면 못 돕습니다. 내가 살 아파트가 있고 연금이 있는데 무슨 욕심 더 부립니까. 돈을 쌓아놓고 있는 사람이 나는 이해가 안 가요. 아무리 쌓아놓아도 죽을 때는 못 가져가요. 인생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