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평중 칼럼] 민족보다 국가가 먼저다

2018. 2. 2. 19:39스크랩

728x90

 

북한의 '갑질'에 쩔쩔매는 현 정부의 저자세 안타까워
北 외치는 '우리 민족끼리'에는 唯一체제 거부하는 한국인 빠져
맹목적 민족 감정은 위태로울 뿐… 공허한 구호보다 중요한 건 국가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평창올림픽 논란이 뜨겁다. '평화올림픽' 대(對) '평양올림픽' 담론이 격렬하게 충돌한다. 민주 다원사회의 자연스러운 사회현상이다. 한반도 전쟁 위기를 줄이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평창을 '활용'하려는 문재인 정부의 노력은 정당하다. 하지만 평창의 성공을 위해서는 문재인 정부의 전략적 행보가 필수다. 북의 평화 공세는 철저히 계산된 것임을 역사가 증명한다. 현재 북한은 전방위적 국제 제재로 제2의 '고난의 행군' 직전이다. 정말로 사정이 급한 쪽은 김정은이다.

북한의 '갑(甲)질'에 쩔쩔매는 문재인 정부의 모습이 안타까운 건 이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저자세는 전략적으로 미숙하다. 북한은 언제나 자신들이 필요할 때만 선택적으로 남북 대화에 응했다. 남북 교섭에서 지나친 기대나 정권 차원의 정략(政略)이 금물인 이유다. 따라서 우리는 상호주의를 준수해야 한다. 북한의 올림픽 참가를 이끌되 인류 보편주의의 잣대로 한반도 비핵화와 이산가족 상봉을 요구해야 마땅하다. 북한의 평화 공세에 적극 대응하는 플랜 A와 함께 '평창 이후' 북한이 돌변했을 때의 플랜 B도 갖춰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지금처럼 북한의 억지에 끌려간다면 민주 정부의 품격이 크게 훼손된다. 대중(對中) 굴욕 외교로 우리의 자존심이 상처를 입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김정은 같은 독재자에게 굴종하는 행태는 촛불이 상징하는 민주시민들의 존엄과 충돌하며, 정의로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위엄을 위협한다.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과 한반도기(旗)가 거대한 민심의 역풍을 부른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반도 위기는 스포츠나 남북 정상회담 같은 일회성 행사로 풀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막상 올림픽이 시작되면 스포츠의 열정이 우리 사회를 강타할 것이다. '우리 민족끼리'가 합창되면서 민족 감정이 날개를 달고, '우리는 하나다'며 통일론이 분출할 터이다. 그러나 여기엔 중대한 함정이 숨겨져 있다. 한국 사회에서 '우리 민족'의 뜻이 자명한 데 반해 북한의 '우리 민족끼리'는 치명적 독소를 품고 있다. 전체주의 체제인 북한엔 인민의 목소리가 없다. 오직 수령만이 발언권이 있다. 그래서 유일 체제다. 북한판 '우리 민족'은 김일성 일가(一家)에 완벽히 종속된 존재다. 북한 헌법이 우리 민족을 "김일성 민족"이라고 부르는 것이 단적인 증거다.


 

북한이 새로운 '선전화'를 공개하며 '자주통일 공세'를 펼쳤다. 북한의 대외선전용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는 지난달 18~21일 매일 한개씩 '자주통일'을 주제로 하는 선전화를 공개했다. /연합뉴스


북한의 '우리 민족'은 수령에게 충성하는 북한 인민과 북한 유일 체제에 동조하는 극소수 한국인을 합(合)한 것이다. 김정은 독재를 단호히 거부하는 한국의 대다수 자유시민은 '우리 민족'이 아니다. 이것이 북한이 외치는 '우리 민족끼리'의 적나라한 실체다. 한국 시민과 북한 인민이 함께 한민족을 이룬다는 우리 사회의 통념과는 정반대다. '북한이 평창 동계올림픽을 자신들의 체제를 선전하는 수단으로 쓴다고 해도 그렇게 하도록 두면 된다'는 문정인 대통령 특보의 발언이 위험한 것은 이 때문이다. 미래 지향적인 세계시민들의 스포츠 축제를 수구 반동의 유일 사상으로 오염시키는 건 언어도단의 중대 사태가 아닐 수 없다.

결국 북한의 '우리 민족끼리'는 우리를 찌를 비수를 감춘 거짓 수사(修辭)에 불과하다. 올림픽 현장에서 '우리는 하나다'가 울려 퍼진다 해도 순간의 감성적 위안 그 이상(以上)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우리는 하나다'와 '우리 민족끼리'가 오히려 평화를 해치고 전쟁을 부추길 수 있는 가능성이다. 북한판 '우리 민족끼리'는 우리가 민족주의적 감성의 회로(回路) 위에서 당연시해 온 한민족의 실체를 부정한다. '우리는 하나다'가 상이한 두 정치 체제와 삶의 방식을 강제로라도 합쳐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당위 명제로 해석된다면 6·25전쟁 같은 비극을 낳을 수도 있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김정은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김정은은 핵으로 한반도 전체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과대망상까지 공언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민족이 국가보다 먼저다'만을 외치는 맹목적 민족 감정은 위태로울 뿐이다. 한반도에서 북이 핵을 독점하는 현실에서는 통일이 불가능 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대치는 통일이 아니라 남북 양국(兩國) 체제가 담보하는 장기 지속적 평화이다. 통일보다 중요한 건 평화이며, 민족보다 앞서는 건 국가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공허한 '우리 민족끼리' 구호 대신 국가의 화두에 집중해야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있어야 시민적 자유와 번영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2/01/201802010303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