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민주화운동'인 줄 알았지만, 퇴영적 이념 투쟁이고 歷史 후퇴시켜"

2020. 3. 30. 09:40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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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2020.03.30 03:14

[최보식이 만난 사람]
[간첩 혐의로 두 차례 수감됐던 운동권의 자기 비판… 민경우 前 범민련 사무처장]

코로나 사태가 정점 치달을 때 '더불어시민당' '열린민주당'이 헤드라인을 장식해 끔찍한 기분
진보 운동권서 지금껏 보지 못한 이상한 기류가 현 정권서 생겨나
正義 외친 이들이 부패 기득권 돼


"조국 사태에 반성한다는 더불어민주당이 조국 추종자를 공천하고, 위성비례정당인 열린민주당은 대놓고 '조국 복권(復權)'을 내세우는 걸 보면서 너무 충격을 받았다. 이들은 갈등과 증오에 기반을 둔 권력욕으로 우리 사회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 과거에 나 자신이 시대착오적 이념으로 그렇게 했던 것처럼…."

민경우(55)씨를 만난 곳은 경기도 분당에 있는 수학 입시 학원이다. 그는 '수학공부의 재구성'이라는 책을 내는 등 꽤 이름난 강사라고 한다.

내가 몰랐던 세상을 만나

하지만 그는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1987년) 출신의 골수 좌파였다. 이적(利敵) 단체인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을 10년간 맡았고, 김영삼·노무현 정부에서 각각 간첩 혐의로 기소돼 총 4년 2개월 감옥에서 지냈다. 출감 뒤 민노당에 입당해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정책기획팀장을 맡아 반대 집회를 기획했던 인물이다.

"역설적으로 '한·미 FTA 반대 투쟁'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반대 논리를 세우려고 각계 전문가들을 만나고 숱한 연구 보고서를 읽었다. 대학 시절 '매판자본'으로 봤던 삼성전자가 소니 등을 다 합친 일본 전자업체보다 매출액이 더 크다는 걸 알게 됐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선명하다. 그동안 내가 몰랐던 세상을 만나게 된 것이다."


민경우씨는 “586 정권 실세들은 돈 때문에 발생하는 고통을 경험 못 한 집단”이라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감춰진 세상도 아니고, 정확히 말하면 남들은 다 아는데 당신만 안 보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부끄럽지만 그렇다. 수십 년간 퇴영적 주체사상과 민족의식에 매몰돼 있는 동안, 세상에는 스마트폰과 드론, 인공지능이 개발돼 있었다. 우리는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여겼지만 실상은 시대착오적 이데올로기 투쟁이었고 역사를 후퇴시켰다. 우리가 해보려던 한국 사회의 재편 작업도 애초에 틀렸던 것이다."

그는 운동가의 삶을 접고 2012년부터 학원을 꾸려가는 생활인이 됐다. 이런 그의 일상이 꼬인 것은 조국 사태가 터지면서였다. 작년 9월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 반대' 서울대 집회에서 학생 대표의 요청을 받고 마이크를 잡게 된 것이다.

"선배였고 골수 운동권이었던 나도 조국 임명에 반대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나는 집회에서 '조국이 개혁적인지 아닌지를 떠나 그는 범법자(犯法者)다. 법에 의해 처벌받는 게 법치주의다. 지금 정권은 그걸 거부하고 있다. 법을 안 지켜도 되는 진보는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조국의 문제는 법과 상식, 팩트의 문제였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 명망가들은 마치 미신에 홀린 것처럼 비이성적·비합리적 행태를 보여줬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이상한 기류가 문재인 정권에서 생겨났다. 온라인에서 이 사안을 놓고 운동권 동료·선후배끼리 논쟁이 벌어졌다. 소수 강경파는 논리에서 몰리자, 평소에 안 하던 궤변을 내놓았고 감정적 언사로 공격했다. 팩트 자체를 아예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함께 토론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정의를 외쳤던 이들이 어느덧 부패한 기득권으로 변신해 있었다."

―대학 시절 조국씨와 인연이 있었나?

"동갑이지만 운동권 노선이 달라 친분이 없었다. 하지만 사노맹 조직에서 조국의 후배였던 황희석은 비교적 잘 안다. 그는 1987년 불법 집회를 주도했다가 인문대 국사학과 사무실에 며칠 숨어 있었다. 이번에 비례대표 후보가 된 그가 '조국 사태는 검찰 쿠데타'라고 말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군부 쿠데타'라는 말을 썼던 학생 시절의 사고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의 발전 과정은 아예 머릿속에 없는 것이다."

―황희석 전 법무부 인권국장은 "억울한 희생을 당했던 '조'가 명예 회복하고 새 운명 맞이할지는 이번 총선이 결정"이라고 말했다. 조국이 이런 식으로 부활할 것 같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가 급박해 작년처럼 '조국 퇴진'을 외치며 광화문에 인파가 몰려나올 일도 없다.

"코로나 확산 사태가 정점을 치달을 때, '더불어시민당' '열린민주당' 등이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끔찍한 기분이었다. 여권은 정치 세력으로서 책임과 양심을 포기했다. 어떻게 하면 의석을 더 차지하느냐는 권력 의지의 화신들일 뿐이다."

―당신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1990년대 초 공산주의 동구권 붕괴는 운동권 학생들에게 충격을 줬다. 맹목적으로 추종해온 이념에 회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신은 1995년부터 친북 단체인 범민련에 들어갔다.

"대학 시절 '해방전후사의 인식' '전환시대의 논리' 같은 책이 독소였다. 북한에 대해 감성적 접근을 했고, '우리 민족끼리 주체적으로 하자'는 말에 현혹됐다. 돌아보면 내가 지적으로 낙후한 그룹에 속해 있었다. 시대의 흐름에 거슬러서 우리나라를 극도로 고립된 반미(反美)의 섬을 만들려고 했던 거다."

―북한에 국내 동향 문건을 전달한 간첩 혐의로 두 차례 징역형을 살았는데?

"그때는 '간첩 행위'라는 의식이 없었다. 조총련 정치국장과 200여 차례 통화하면서 그쪽에서 부탁하는 정보를 수집해 보내줬다. 남북 교류가 진행되던 시기여서 다른 라인에서는 이런 일이 더 많이 벌어졌을 것이다."



2005년 출소 직후 환영받는 장면. /민경우씨 제공


- 운동권 출신은 이런 친북 활동을 '민주화운동'이나 '민족통일운동'으로 포장하고 있다. 본인도 그렇게 평가하나?

"어디에서 선을 그을지…, 조금씩 그 경계선을 무너뜨려왔다. 매우 완화된 잣대를 갖고 있다. 지하당인 중부지역당이나 김일성에게 충성 맹세를 한 사람들도 다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주장하니까. 586 청와대 실세나 여당 의원들도 이 문제에서 다 걸린다."

돈 버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당신은 그때 민족통일운동을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북한 주민을 탄압해온 세습 독재 정권에 봉사한 것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때는 생각이나 지적 역량이 여기까지 미치지 못했을 수 있겠지만.

"북한의 세습 독재에 기여한 것이다? 이런 지적을 하다니…, 심정적으로 못 받아들이겠지만…, 잘못된 사상 세례를 받고서 그때는 민주화운동이라고 여겼지만, 지금 와서 보면 우리 사회와 역사에 반동하는 행위였다."

―여전히 북한 정권에 대해 운동권 시절 감성이 남아 있는지, 아니면 전향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나는 출소한 뒤로 '보안관찰 대상'이었다. 반성과 전향을 안 했다.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에서 해왔기 때문에 전향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학원을 꾸려가고 현실에 부딪히면서 내 과거의 운동에 문제가 많았다는 걸 깨달았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뒤 전향서를 제출했다."

―임종석이나 조국의 경우 이런 질문에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다. 586 운동권 세대는 퇴영적 이념에 빠져 있었던 것을 여전히 자랑스러운 훈장으로 여기고 있는데?

"나를 포함해 586 운동권은 사회에 해악을 끼친 게 아닌지 자문할 때가 됐다. 이들은 현실에서 자신의 이념을 확인해보는 절차를 빼먹었다. 현실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겪어본 적 없어 여전히 젊은 날의 관념성에 지배돼 있다. 내가 정신 차리게 된 것은 직접 학원을 꾸려 돈을 벌어보면서였다. 누군가로부터 돈을 받아내야 하고 또 돈을 줘야 하고, 그게 전쟁이었다. 돈에 얽히면서 인생을 많이 배웠다."

―권력 집단에 들어가 있는 586 세대에 대해 자기 손으로 돈을 안 벌어봐 현실을 제대로 못 본다는 비판이 있었다.

"현 정권의 586 정치 실세들은 돈 버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돈 때문에 발생하는 고통을 경험 못 한 집단이다. 이들은 최저임금이 오르면 고용이 줄어든다는 당연한 사실도 이해 못 하거나 관심이 없다. 현실의 복잡성을 알지 못하기에 '부동산 공유제' '특목고 폐지' 같은 말을 꺼내는 것이다. 돈이 움직이는 현장에서 형성되지 않은 사상과 정책 노선은 쉽게 허물어진다."

―생활인으로 돌아오면서 어떻게 수학 입시 학원을 하려고 마음먹었나?

"원래 내가 이과 출신이다.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다가, 학생 운동을 하려고 이듬해 다시 시험을 쳐 인문대에 들어간 경우다. 수학 입시 학원을 시작할 때 운동권 후배들을 불러 모았다. 하지만 이들은 수학을 가르칠 실력이 안 됐다. 강의실에서 좌편향 현대사를 가르치려고 했다. 그전까지 절대 진리였던 '함께 가자 우리의 길'이라는 주사파의 대중 노선은 허구였다."

―학원 강사였던 후배들을 해고했다는 뜻인가?

"운동권에 있을 때는 부족하면 위로하고 설득하고 같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시장은 완전히 다르게 움직였다. 2년쯤 지나 학원을 말아먹었다. 후배들을 내보내면서 법적인 갈등으로 비화됐다. 내가 마치 악덕 고용주처럼 됐다. 고발돼 지방노동청에 몇 번이나 출두했다. 우리나라 노동법이 정말 문제가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 어떤 선배가 이런 말 해줬으면

―운동권 시절에 비해 너무 돌아선 것 아닌가?

"그전의 학원에서는 직원 10명이 있었는데 지금은 두 명이다. 하지만 생산성이 똑같다. 사회가 어떻게 조직돼야 하는지를 많이 생각하게 됐다. 현 정권이 들어서자 휴머니즘을 포장한 말들이 넘쳐났다. 운동권의 선전 구호가 그랬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말일수록 무책임하고 공허한 걸로 판정 난다."

―당신처럼 수학도 잘하는 사람이 그동안 세상을 왜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나?

"이십 대 초반에 누군가로부터 주입받았거나 책에서 읽었던 편향된 지식에서 못 벗 어났던 것이다. 그 시절 안목 있는 선배가 이런 말을 한마디 해줬으면…. 큰 재력가였던 부모님은 이런 이념의 세계에 대해 몰랐다. 아버지가 억지로 나를 미국 유학에 보냈으면 내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뒤늦게 미국 등 바깥세상을 구경했을 때 어떻던가?

"아직도 해외에 나가 본 적 없다. 그전에는 '보호관찰 대상'이라 제약이 있었다. 이제는 의욕이 없어졌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30/202003300005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