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10. 21:58ㆍ여행이야기
북천(北川) 건너편으로 상주 임란(壬亂) 북천 전적지(戰跡地)의 모습이 보인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상산관'은 조선시대 각 지역으로 파견된 사신이 머물던 객사라고 한다.
상주 임란 북천 전적지의 현판의 글씨가 마치 악필(握筆)의 서예가 석전 황욱 선생이 쓴 글과 비슷하다.
http://www.dom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930336
태평루를 조금 지나 언덕을 오르니 비석 4기가 있다.
제일 왼쪽의 비석에는 '증 통훈대부장락원정 상산 박공 휘 걸 순절단'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호장(戶長) 박걸(朴傑)의 순국비인 것이다.
왼쪽 옆에 호장 박걸의 새로운 비석이 있었는데
비문을 찬찬히 읽어 보니 그 속에는 비장함과 안타까움이 두루 섞어 있어서 그 피비린내 나는 현장에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박걸은 상산인(상주인)으로 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판관(判官) 권길(權吉)이 잔병(殘兵)을 불러 모아 고성(孤城)을 홀로 지켰고, 호장(戶長) 박걸(朴傑)이 그 뒤를 따라서 죽을 힘을 다해 싸웠는데, 적의 기세가 더욱 치열해서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권길이 의관(衣冠)을 바로 하고 죽자 박걸이 말하기를, ‘우리 후(侯)가 나라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내가 우리 후를 져버릴 수 있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함께 죽어 숙종(肅宗) 을묘년 032) 비로소 충렬사(忠烈祠)를 지어 권길과 함께 향사하고 있는데, 아직껏 포가(褒嘉)하는 일이 빠졌습니다. 청컨대 증직(贈職)하는 은전을 시행하소서!" 하며, 상주의 어느 유생이 상소문을 올리자 숙종이 그리하라 명하여 호장 박걸은 통훈대부로 추증되었다.
이 비석을 세울 당시 호장 박걸의 후손으로 짐작되는 상주경찰서장 박두일이라는 사람과 그 문중에서 세웠다는 내용이 있다.
찰방(察訪) 선산 김종무(金宗武)의 순국비이다. 찰방(察訪)은 조선시대에 각 도(道)의 역참을 관장하던 종6품의 외관직(外官職)으로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은 말을 타고 전쟁을 하는 기병전에 강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역마를 이용한 군사작전을 위해 11개 역(驛)의 찰방(察訪)들에게 역마동원령을 내렸다. 그러나 역마동원령에 말을 몰고 상주에 도착한 사람은 선산 출신의 사근도 찰방(沙斤道 察訪) 김종무(金宗武) 한사람뿐이었다. 역마동원령에 따라 김종무는 사근도에서 말을 관리하는 역노(驛奴) 100여명과 전투에 사용할 군마 130~150여필을 가지고 상주성으로 도착했다(출처 : 김기훈의 역사와 인물)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은 막중한 책임이 있는 직책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척후병도 보내지 않고, 왜군의 동태를 보고, 스스로 찾아와서 첩보를 전하는 백성을 유언비어를 퍼트린다는 이유로 참수함으로써 일반 백성에 의한 왜군에 대한 정보를 스스로 차단하는 우(愚)를 범했으며, 자신의 휘하 군졸들이 결사 항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류성룡의 징비록에 의하면, 순변사 이일은 구차한 자신의 생명을 구하고자 북쪽으로 말을 타고 달아나다가 왜군이 추격하자 장수의 행색을 보이지 않기 위해 갑옷과 투구를 벗어 던지고, 그래도 따라오자 나중에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벌거벗은 나신으로 도망갔다고 한다. 3일 후에 신립이 배수의 진을 친 탄금대에 도착하여 또 그곳에서 왜군과 전투하다가 달아났다고 하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따로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똥별' 등 중에서 제일 나중에 달아날 위인이 몇이나 있겠는가?
상주 판관(判官) 권길(權吉)의 순국비이다. 판관(判官)은 종5품 관직으로 상주 관아의 행정실무를 지휘, 담당하거나 지방관을 도와 행정·군정에 참여하는 벼슬아치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권길(權吉)은 임진왜란 때 상주판관(商州判官)으로 상주전투에서 싸우다 순절한 문신이다. 권근(權近)의 후손으로 음보(蔭輔)로 기용되어 상주판관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의 군사와 합세하여 상주 북천(北川)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군과 싸웠는데, 호장(戶長) 박걸(朴傑)을 비롯하여 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호응하였다. 최선을 다했지만, 무기와 군사수의 열세로 패하여 순절하였다. 뒤에 상주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권길(權吉) 음보(蔭補)주1로 기용되어 관직이 상주판관에 이르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조정으로부터 중로(中路, 혹은 2로)에서 일본군을 막도록 임무를 부여받은 순변사(巡邊使)주2 이일(李鎰)이 4월 23일 상주에 도착하였다. 4월 18일 일본군이 고령(高靈)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상주목사(尙州牧使) 김해(金澥)는 군관(軍官)들을 데리고 순변사의 행차를 맞이한다는 핑계로 도망해 버리고, 판관 권길만이 상주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때 도착한 순변사 이일은 권길에게 군사가 없음을 꾸짖고 군사를 모으게 하였는데, 그는 상주 인근을 수색하여 700여 명의 군사를 모집하였다.
4월 24일 일본군이 상주에서 20리 떨어진 장천(長川)에 주둔하였으나, 이일의 군대는 척후병(斥候兵)이 없어서 이를 알지 못하였다. 25일 상주의 북천에서 모집된 농민 중심의 군사를 모아서 군사 훈련을 하고 있는데, 일본군 1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가 급습하였다. 적이 사방을 에워싸고서 조총(鳥銃)으로 공격하자, 사장(沙場)주3에서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배하였다.
이에 앞서 이일이 상주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일 때 죽음을 무릅쓰고 나라를 지킬 것을 맹세하자, 호장(戶長) 박걸(朴傑)을 비롯하여 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호응하였다. 그러나 무기와 군사 수의 열세로 패색이 짙어지자, 이일은 탈출하여 충주로 도주하였다. 이때 상주판관 권길, 호장(戶長) 박걸(朴傑), 종사관(從事官) 이경류(李慶流) 등은 함께 싸우다가 모두 순절하였다. 권길이 의관(衣冠)을 바로 하고 죽자, 박걸도 우리 제후(諸侯)가 나라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내가 제후를 버릴 수 있겠는가 하고 따라 죽었다고 전한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제후(諸侯)라는 표현이다. 제후의 사전적인 의미는 "중국 황제인 천자(天子)의 다음으로 귀(貴)한 사람. 고대 중국에서 천자에 딸려 있으며, 천자에게서 일정한 영토(領土)를 받을 뿐만 아니라 일정한 의무를 지고, 그 영내(領內)의 인민(人民)을 지배하는 권력을 가졌던 사람. 그런데 이에는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의 오작(五爵)의 등분(等分)이 있었다"라고 되어 있는데 권길은 관직이 상주의 판관이다. 군수와 비슷한 관료에게 제후라는 명칭은 아주 과하게 사용하였거나 아첨용으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http://www.startup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7517
다른 비석에서는 못 느꼈지만, 판관 권일의 비문에서는 안타까움과 비감(悲感)함이 느껴진다. 믿었던 순변사는 도주하고,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군졸들과 조총으로 무장한 중과부적 왜군의 막강한 전투력에 스러진 권일 판관의 영혼이 느껴진다.
충렬사(忠烈祠) 외삼문인 경절문(景節門) 앞에는 3충신 종사관(從事官) 윤섬, 이경류, 박호와 2 의사(義士) 김준신, 김익 의 순국비가 세워져 있다.
경절문 앞에서 보는 상주시 전경이다.
내삼문인 충의문(忠義門) 앞에는 '판관권길사의비'와 '충신의사단비', '임란기념관'과 '자양재'가 있다.
충렬사 사당 안에는 종사관 윤섬, 이경류, 박호 등 중앙군과 판관 권길, 사근도찰방 김종무, 호장 박걸, 의병장 김준신, 김일 그리고 무명용사 1위 등 순국한 9위를 배향하며 위패를 모시고 있다.
내가 전적지를 올라가면서 의사 김준신 의사 비를 잠깐 보니 명나라에서 조선국에 내리는 의사라는 호(별칭)라는 뜻의 '유명조선국사호(有明朝鮮國賜號')라는 글귀를 보고 누군가 태클을 걸겠지 했는데 역시나 그런 일이 있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40754
조선 시대에 지금의 도지사(道知事)에 해당하는 각 도(道)의 최고의 벼슬아치로 그 지방의 경찰권, 사법권, 징세권 따위의 행정상 절대적인 권한을 가졌던 관찰사(觀察使)의 밑에서 지방의 목(牧)을 다스리던 목사(牧使)는 정삼품 외직 문관(무관이 아님에 유의)이며, 병권(兵權)도 함께 가졌다.
태평루 전각이 있는 오른쪽에는 '목사 민후종렬(閔侯種烈)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와 '목사 민후종렬(閔侯種烈) 송덕비頌德碑'가 있다. 성씨 다음에 제후 후(侯)자를 왜 넣었는지 사학자가 아니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고종때 외척세력인 안동김씨가 대원군의 등장으로 수세에 몰리고, 명성황후(민비)가 자신의 씨족인 민씨를 중용하면서 그런 연유로 '민종렬'은 음서제의 덕을 본 것 같다.
http://dalseong.grandculture.net/dalseong/multimedia/GC408P05036
https://blog.naver.com/havfun48/221574711794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080212/8543124/1
https://blog.naver.com/seoih4253/222836092483
목백(牧伯)은 목사(牧使)와 동의어이다. 우리가 도지사(道知事)를 도백(道伯)으로 부르는 것과 같다. 황해도 금천군의 옛 지역인 우봉(牛峰)을 본관으로 하는 이씨 성을 가진 이가 쓰여진 비석이 있는데 자료를 보니 그 주인공은 '우봉 이함희'라는 것이다.
'순상국김공명진송덕비(巡相國金公明鎭頌德碑)' 가 있다. 순상국(巡相國)이라는 관직은 순찰사와 동의어로 짐작된다. 사람은 후세에 명예 등 무엇인가를 남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인지 송덕비나 불망비, 선정비 등이 난립하고 있는데 '김명진'이라는 사람도 선정을 베풀었는지 청도에도 '휼민선정비(恤民善政碑)'가 있다고 한다.
우리의 역사에서 많은 충신도 있었지만, 간신모리배도 많았다. 지금도 일반 회사나 공무원 사회에서 아첨꾼은 숱하게 많다. "유리하다고 교만하지 말고, 불리하다고 비굴하지 말라"라는 경책의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물며 조선시대의 아첨꾼은 얼마나 많았겠나? 순상국(巡相國)이라는 원래의 뜻은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지방을 순찰할 때 쓰는 용어지만, 보통 아첨하는 의미에서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에게 자신의 민원을 제기하는 방법으로 탄원서 등을 올리거나, 불망비나 송덕비 등을 세울 때 대체로 많이 사용하는 일종의 그 당사자를 치켜세우는 용도로 많이 사용했다. 게다가 지방 현령이나 현감, 군수에게도 성주(城主)라는 표현을 했다고 한다. 또한 통상국(統相國)이라는 호칭도 사용했는데 이것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의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http://cheongdo.grandculture.net/cheongdo/popup/multimedia/GC055P02060
이것은 비석의 윗부분이 날아가서 누구의 것인지 짐작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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