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운문사

2016. 1. 2. 19:58살아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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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손도 당연히 운문산(雲門山)의 운문사라고 생각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러나 나의 예측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운문산이 아니라 이름도 생소한 호거산(虎踞山)이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산이다. 이곳 운문사는 국내 최대의 비구니 수행도량이고 역시 국내 최대의 비구니 교육기관인 '승가대학'이 있다.

 

'호거산'을 설명한 매일신문 기사가 있어서 이곳에 옮겨왔다.

 

베일 벗는 호거산(虎踞山)

 

흔히들 운문사는 당연히 ‘운문산 운문사’이겠거니 여긴다. 운문산이란 이름부터가 운문사에 연유해 생긴 것이리니 그러는 게 당연하기도 하다. 청도 쪽에서는 가지산·운문산 구분 않고 통틀어 운문산이라 했을 정도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하나 현장은 딴판이다. 그 절 문패는 ‘호거산(虎踞山) 운문사’다. 운문산 운문사가 아니다. 다시 당혹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일대 산에겐 제 이름을 따르게 해 놓고 정작 사찰 자신은 전혀 엉뚱한 이름을 끌어다 모산(母山)으로 챙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 생소한 문패는 도대체 어떤 연유로 붙은 것일까?

 

하지만 거기 대한 설명은 어디서도 듣기 쉽잖다. 주변 마을에 가 물어도 호거산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만나기 어렵다. 인터넷엔 얘기가 뒤죽박죽이다. 자의적 풀이가 난분분하고 때로는 그게 정설인 양 유통되기까지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절 남쪽 능선에 있는 여러 산들을 모두 포괄해 호거산이라 불렀다고 봐야 한다”며 “운문산이 바로 호거산일 것”이라고 쉽게 포기하고 넘어가려 한다.

 

또 다른 누구는 운문사로 들어가는 도중 오른편(서편)으로 솟아 보이는 특이한 돌 봉우리를 호거산일 것이라 추측한다. 뾰족한 꼭대기에 둥그런 암괴가 올라앉아 신령스런 분위기를 자아내는 ‘등선바위’가 그것이다. 거기에 ‘호거대’라는 얼토당토않은 이름이 덧칠해진 연유도 그런 것일 테다.

 

 

 

왼편(동편)에 호거산 904m봉, 오른편(서편)에 억산 정상봉이 어우러진 모습. 옛 어른들은 이걸 통틀어 ‘호거산’이라 불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거능선의 등선바위서 바라본 모습이다. 904m봉서 앞쪽으로 이어 나오는 산줄기는 ‘호거능선’이다.

 

 

 

 

1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해동지도’에 나타난 호거산. 사진 맨 위에 호거산 표시가 있고, 거기서 출발해 내리는 ‘호거능선’과 그 끝의 낙화암이 표시돼 있다.

 

 

반면 어떤 이는 절 진입로 왼편(동편)으로 솟은 매우 큰 암산(巖山)을 호거산일 거라고 100% 장담한다. ‘북대암’ 위의 ‘복호산’이 그것이다. 그 모습이 ‘쭈그려 앉은 호랑이가 운문사를 바라보는 형세’이며, ‘절이 남쪽을 향해 돌아앉은’ 것은 그걸 피해서라는 설명까지 덧붙인다, 그 산덩이 위의 산성 이름이 ‘호거산성’이라고 주장하며 방증하려고도 애쓴다.

 

그렇다면, 글자로 풀 때 ‘虎踞’(호거)는 무엇을 뜻할까? 사전에 따르면 ‘踞’는 엉덩이를 높은 곳에 얹은 후 두 다리를 내려 세우고 앉기, 즉 ‘걸어앉기’를 뜻한다. 그래서 ‘虎踞’의 일차적 의미는 ‘범같이 무릎을 세우고 앉는 것’이다.

 

그러나 ‘호거’의 실제 쓰임새는 그 문자적 의미와 다르다. 주로 산 모습을 형용하는 말로 구사된다. ‘웅대한 산세’를 뜻한다. 용이 서리고 범이 걸터앉은 듯하다는 뜻의 ‘龍盤虎踞’(용반호거)와 통한다. 그러면서 호거는 ‘특별하고 기이한 암괴’의 모습을 표현하는 말로도 쓰인다. 산덩이 모습과 특별한 암괴 모습 묘사에 두루 원용되는 표현인 것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둘이다.

 

그럼 청도 옛 기록에는 어떨까, ‘호거산’이 나타날까 아닐까?

나타난다. 청도읍지 ‘오산지’(鰲山志·1673년)의 다음 구절이 그것이다. “절 서쪽 산은 호랑이 형상을 해 호거산이라 부른다, 그 기운을 누르려고 골짜기 입구에 계연(鷄淵·닭못)을 뒀다, 호랑이가 닭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경내사찰’ 항목서 운문사를 설명하던 중 끼어든 기술이다. 정식으로 ‘산천형세’ 항에 들어가지는 못했으나, 호거산은 이로써 운문분맥 여러 산 중 운문산 외에 설명이 붙은 유일한 산이 됐다. 귀하고 중요한 기술이 아닐 수 없다.

 

하나 이것만으로는 어느 게 호거산인지 구분해내기 불가능하다. 말로썬 가리켜 보이기에 한계가 있다. 운문사 서쪽에 산이 하나 둘 아니니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지목하는 데는 그림이 훨씬 유용하다. 고지도가 적격이다. 하지만 ‘동국여지도서’ 청도군도(1760년)나 청구도(1834년) 등에는 호거산이 없다. 반면 ‘대동여지도’(19C)는 호거산을 운문산 동쪽 서쪽에 두 개나 그려 놨다.

 

고지도 중 그래도 참고가 될 만한 건 ‘영남지도’(경상도71주군도) 청도군도다. 거기서는 호거산이 ‘대비사’ 절 바로 남쪽에 그려져 있다. 대비사는 운문분맥 904m봉(962m봉 산덩이의 일부) 및 그 서편 954m봉(억산)서 북으로 내려서는 두 산줄기 사이 금천면 박곡리 골짜기 안에 있는 고찰이다. 이로써 호거산의 대략 위치는 드러난 셈이다. 그러나 영남지도에는 달랑 대비사 절 그림뿐이다. 산줄기는 그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호거산이 904m봉인지 954m봉(억산)인지는 구분 안 된다.

 

호거산 위상이 더 선명히 표시된 지도는 18세기 중엽 것이라는 ‘해동지도’다. 거기서 호거산은 큰 산줄기가 갈라져 내리는 기점으로 그려졌다. 그 산줄기 아래에는 ‘낙화암’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이게 결정적 단서다. 주변 상황을 종합하건대 그 산줄기는 운문산과 억산 중간에 있는 산덩이에서 북으로 뻗어 내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운문면-금천면을 가른다. 고지도가 그 산줄기를 주목한 이유도 바로 이 생활권 분리 기능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림 속 산줄기의 출발점도 저절로 명백해진다. 그건 904m봉이다. 962m봉과 하나가 돼 있는 그 산덩이의 동쪽 경계는 딱밭재, 서쪽 경계는 억산재다. 이게 호거산이라는 이야기다. 지금은 운문호 물에 잠겼으나, 거기서 출발해 내리는 산줄기 끝 부분에는 낙화암이라는 명소도 분명 있었다.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이 호거산을 희한하게도 등산객들은 ‘범봉’이라 부른다. 등산지도들에서도 그렇게 통한다. 하지만 현지 마을들에는 그 산덩이를 지칭하던 특별한 이름이 없다고 했다. 북쪽 청도 박곡리·신원리와 남쪽 밀양 원서리 석골마을서 모두 그랬다. 동편 운문산이나 서편 억산은 중시했어도 그 중간에 끼인 이것은 주목하지 않았다는 얘기일 테다.

 

그런데도 등산객들이 범봉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 석골마을 어르신은 착오의 결과일 거라고 봤다. 운문산서 서편 석골마을 쪽으로 500여m쯤 내려선 지점에 ‘범바위’라는 게 있고 그 산줄기를 ‘범바위등’이라 부르는 바, 그 이름을 잘못 듣고 갖다 붙인 결과일 거라는 얘기다. ‘등’(嶝)은 등성이를 말한다.

 

기자가 만났던 현지인들 중 904m봉 산덩이를 호거산이라고 콕 집어낸 사람은 유일했다. 삼계계곡 ‘쌍두봉가든’ 박정곤(50)씨였다. 그는 단번에 그걸 ‘호거산’이라고 지칭했다.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들은 바라 했다. 그 산덩이 생김새에도 훤했다. 7~8부 능선에 암괴들이 굴같이 얽혀 호랑이가 살 만하다고 했다.

 

누구도 잘 모르는 전래 지명을 그는 어떻게 알까? 듣고 보니 그는 평범하고 수동적인 지방생활사 전승자가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이런 일에 관심이 많아 노트를 들고 다니며 어른들 증언을 채록했다. 친·외가가 일대에 고르게 분포해 옛 지명이나 생활사 이야기를 두루 채집할 좋은 조건도 갖췄다. 그가 모은 적 있는 자료 중에는 매우 희귀한 것도 적잖은 듯했다. ‘불매노래’ 같은 것이 단적인 예였다.

 

그럼 962m-904m봉 산덩이에는 정말 ‘호거산’에 어울리는 분위기가 있을까? 옛 사람들 소감을 짐작해보기 위해 운문사 입구 신원리 마을서 운문사계곡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봤다. 생각지 못한 장면이 펼쳐졌다. 그 전면으로 잡히는 풍경의 핵심에 바로 그 산덩이가 솟아 있었다. 동편으로 운문산 일부가 나타나고 962m봉이 중앙에 앉았으며 서편으로 억산바위가 솟았다. 다른 지점서 볼 때는 워낙 특징 없어 존재마저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던 962m봉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 962m봉 자체서는 별 느낌이 오지 않았다. 그냥 어디에서나 만나는 평범한 산덩이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훨씬 인상 깊게 올려다 보인 것은 억산바위였다. 포효하는 호랑이 모습이 연상될 듯했다. 둘을 합쳐 하나로 보고 ‘호거산’이라 통칭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앞서 살핀 해동지도가 962m봉만을 호거산이라고 지칭했다고 볼 근거도 전혀 없었다. 그것과 주변 다른 산을 구분하는 어떤 흔적도 남겨놓지 않았다. 정밀한 지도제작법이 없던 조선시대에 그렇게 산덩이를 세밀히 구분해서 봤으리라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무리일 수 있다. 게다가 호거산이라고 해서 굳이 호랑이와 연관 지어 보려 애쓰는 것도 잘못일 수 있다. ‘기이한 암괴’ 모습 또한 ‘虎踞’라고 표현한다는 사전의 설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억산바위가 ‘호거’에 더욱 제격이 돼 가는 셈이다.

 

다른 곳에서는 어떨까 싶어 운문호 아래 방지초교 앞에서 바라다봤다. 동편으로는 길디긴 호거능선이 이어져 있었다. 가지산은 그 뒤로 묻혀 한 치도 안 보였다. 호거능선 서편으로는 억산~인재~육화산 능선이 펼쳐져 있었다. 962m봉은 억산 동편에 조그맣게 드러날 뿐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보는 풍경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 역시 억산바위였다.

 

방지고개 너머서는 어떻게 보일까 해서 동곡리 우회도로 변 119센터 앞에 섰다. 동편으로는 역시 호거능선이 좍 펼쳐졌다. 시루봉이 매우 선명히 짚였다. 전면으로는 운문산~962m봉~904m봉~억산바위~억산~인재~육화산 능선이 한눈에 들어왔다. 억산에서 북으로 출발해 내리는 능선(억산북릉) 끝부분에 돌출한 ‘귀천봉’(개물봉)까지 그랬다. 그러고 보니 운문분맥 최상위급 관망대는 바로 여기였다. 하지만 거기서 보는 962m-904m봉에도 호랑이 모습은 없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역시 억산바위였다.

 

아무래도 962m봉 산덩이와 억산바위 일대가 하나 돼 빚어내는 풍경, 그걸 ‘호거산’이란 단일개념으로 뭉뚱그렸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 시리즈에서는 지목 편의상 964m-904m봉 산덩이를 호거산으로 지칭은 하되, 실제는 인접 억산바위까지 아우른 포괄적 명칭이었을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기로 했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우용 특임기자

 

 

 

 

'호거산'이라고 짐작되는 곳 아래에는 '북대암(붉은 원)'이 있다.

 

 

 

 

 

 

 

 

 

 

수령이 500년으로 추정되는 운문사의 명물 '처진 소나무'이다. 겉모습도 겉모습이거니와 굽은 줄기는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재선충이 북상하고 있는데 이 소나무는 제발 살아남기를 바란다.

 

 

 

 

 

 

 

 

1994년 중창된 대웅보전의 모습이다.

 

 

 

 

 

 

 

길손이 편액을 얼핏 보기에는 분명히 '만장루(萬藏樓)'같았는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만세루()'라고 하였다. 아마도 편액이 오래되어 내가 잘 못 본 것 같다.

 

 

 

 

 

 

만세루에는 범종이 있으나 땅바닥에 내려앉아 있다. 범종의 무게가 만만치 않으니 내려놓은 것은 아닐까

 

 

 

 

 

 

법고도 있다. 더운 여름에는 이곳에서 비구니 스님들을 모아놓고 교육해도 좋을 것 같다.

 

 

 

 

 

 

 

만세루 천정을 쳐다보던 길손의 눈에 특이한 것이 보인다. 연등인 듯하기도 하고, 불이 났을 때 소화설비인 스프링클러 같기도 하고, 벌을 위해서 벌통을 매달았는가?

 

 

 

 

 

 

보물 제835호 대웅보전의 모습이다. 그런데 오른쪽으로 또 다른 대웅보전이 있는데 신축하였나 보다 길손은 대웅보전이 두 개 있는 사찰은 본 적이 없어서 약간 의아하다. 불교신자나 관광객이 헷갈리지 않게 대웅보전 1, 대웅보전 2라고 하여야 하지 않을까

 

 

 

 

 

 

대웅보전(편의상 1) 안에는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어서 '비로전'이라고 하여야 하지 않나? 원래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이 모셔지는데 왜 이곳 운문사는 대웅보전을 두 개로 만들어서 관광객의 정신을 어지럽게 하는가? 그러나 내용을 알고보니 운문사의 아픈 실상이 보인다.

 

원래 보물 제835호의 대웅전에 대한 보물지정은 1985년 1월 8일 운문사의 신청에 따라 문화재청이 지정하였다고 하는데 운문사 측에서 거창한 불사를 일으켜서 다시 대웅전을 짓고 보니, 아뿔싸!! 한 사찰에 대웅전이 두 개가 있는 모양세가 되고 말았을 것이고, 어차피 대웅보전 1에 모셔진 분이 '비로자나불'이니 운문사에서는 살짜쿵 '비로전(毘盧殿)'으로 편액을 바꿨는데 그것은 공무원들의 사고방식이나 일하는 방식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시는 스님들이 그런 우()를 범했다.

 

공무원들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야 하는데 정작 대웅보전이라고 신청한 곳에다가 보물지정을 했는데 다시 그곳에 출장 가서 확인해 보니 자신들도 모르게 그곳의 이름이 살짝 비로전으로 바뀌었으니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문화재청이 공무원 사상을 더 높여서 급 브레이크를 걸었을 것이고, 운문사 측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비로전 편액을 떼고, 원래대로 대웅보전 편액을 다시 달았을 것이다. 길손이 생각해도 참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발생했네!! 그려~~

 

 

 

 

 

 

단청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고색이 창연하다. 비로자나불 부처님께서 자신의 집에 색칠을 다시 해 달라고 하시지는 않는지 모르겠다.

 

 

 

 

 

보물 제678호의 삼층 석탑

 

 

 

 

 

 

대웅보전 1(왼쪽)과 대웅보전 2(오른쪽)가 보인다. 문화재청의 처사를 나무라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대웅전을 두 개나 가지고 있는 운문사의 사정도 딱하다. 빨리 문화재청과 합의를 봐서 관광객들이 헷갈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뜩이나 복잡하고 경제도 어려운데 이런 것으로 머리가 아프도록 한다면 그것은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본다.

 

 

 

 

 

 

 

 

 

 

운문사 백목련은 성급하기도 하지 아직 겨울이 한창인데 꽃망울을 저렇게 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