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무릉계곡의 무릉반석과 삼화사

2016. 4. 15. 13:21여행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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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무릉계곡(武陵溪谷)에 갔다. 무릉도원( 源 ; '깊은산 속에 숨어 있는 비경') 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에도 '무릉(陵)리'와 '도원(源)리'라는 지명이 많이 있다고 한다. 요즘 직장을 은퇴한 베이버 부머들이 귀촌을 많이 택하는데 어느 농촌 칼럼니스트의 말을 빌리자면 무릉리나 도원리라는 곳을 택하는 것도 괜찮다고 했다. 자신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무릉리 옆에는 도원리라는 곳이 같이 있었다는 얘기인데 그래도 歸村地를 택하려면 풍광 좋은 계절인 가을에 가지 말고, 낙엽이 떨어지고 황량한 추운 겨울 날을 골라 찾아가야 진정한 모습을 볼 수가 있다고 하였다.

 

무릉도원( 源)은 4세기 무렵 중국의 이야기라고 한다. 후난 성()의 무릉()이라는 지역에 민물고기를 잡으며 사는 어부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남자는 물고기를 잡기 위해 강을 따라 계곡 깊숙이 들어가는 사이에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어부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무작정 자신의 작은 고기잡이 배를 저어가니 계곡 양쪽 물가를 따라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그런데 그 나무들이 하나같이 모두 복숭아나무였다. 달콤한 향기가 계곡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고 꽃잎이 하늘하늘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고 한다. 후일 그 어부가 지방 관리와 더물어 그곳을 다시 찾으려고 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것은 봉래 양사언이 무릉반석에 초서체로 남긴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암각서의 모조품으로 1995년도에 만들었는데 이곳에서 50m 떨어진 무릉반석에 진품이 있다. 안내문 아래의 선명한 글씨 사진은 태풍으로 마모되기 전의 모습이다.

 

 

 

 

 


 

 

금란정 옆으로 1,500평 가량의 웅장한 무릉반석이 펼쳐진다.

 

 

 

 


 

 

 

무릉계곡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반석(盤石)은 석장암동(石場岩洞)이라고도 하며, 1,500여 평이나 되는 하나의 흰 돌로 펼쳐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늘 유명한 명승지의 바위에는 늘 그렇듯이 명멸해가는 자신의 이름이라도 남기고자 글씨깨나 쓴다는 사람들이 다투어 글씨를 남겼다. 그렇게 많이 남긴 글씨는 모두 의미가 없어 보이고 유독 1500년경에 남긴 수려한 초서체의 글귀가 눈에 띈다.

 

 

 

 

 


 

무릉계곡을 찾은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알짜를 보지못하고 그냥 지나친다. 내려와서 보는 것도 옛날 누군가 정으로 쪼아서 남긴 이름이나 보고 가는데 워낙 희미해서 유심히 쳐다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서기 1571년에 조선의 4대 명필 중 1명인 봉래 양사언(蓬萊 楊士彦 ; 1517~1584년)이 반석 위에 새긴 무릉선원(武陵仙源), 중대천석(中臺泉石), 두타동천(頭陀洞天)이란 12자의 초서체 암각서인데 처서체의 훌륭한 작품이라고 한다. 무릉반석에 남긴 가로 10m, 세로 3m 길이의 大作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암각서는 초서체의 수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뜻은  '여기는 신선이 노닐던 이 세상의 별천지라, 물과 돌이 부둥켜서 잉태한 오묘한 대자연에서 잠시 세속의 탐욕을 버리니, 수행의 길 열리네'라고 해석한 것이 인터넷에 돌아 다닌다.

 

 

 

 


 

물이 흐르는 곳에 있는 이 대작의 암각서는 큰물이 질 때 바위와 돌들이 상류에서 떠내려오면서 이 글자 위를 굴렀을 것이고, 이때 글씨의 마모가 심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결정적으로 이렇게 마모가 많이 진행된 것은 2002년의 태풍인 루사와 2003년의 매미 때문이었다고 하니 안타깝기가 그지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강원도 '동해문화원'은 전문가 고증 등을 거쳐 무릉계 암각서를 복원, 향토 문화재적 가치를 길이 보존키로 했다는 것이다.  태풍 루사가 몰아치기 전 지역 서예가 등이 탁본해 둔 작품이 현재 남아있어 완전 복원이 가능한 상태라고 하니 빨리 복원되기를 바란다.

 

 

 

 


 

반석 위에서 보면 희미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武陵(글씨는 반대로 쓰여 있음. 즉, 陵武)

 

 

 

 

仙源

 

 

 

 

中臺

 

 

 

 

泉石

 

 

 

 

頭陀

 

 

 

 

洞天

 

 

 


옥호거사(玉壺居士)가 썼다는 것은 확실한데 밑에 윤기준이란 사람은 또 누구든가? 천하제일의 문장 밑에 얌체 짓을 한 사람이? 옥호거사를 흠모한 사람인가? 어디 가도 이런 얌체가 있다.

 

그러나 이 글씨는 봉래 양사언이 강릉부사 재직(1571~1576) 기간에 전임 정두형 부사의 부친상 관계로 신미년(1571)에 광천에 왔을 때 무릉계곡을 방문해 썼다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옥호자 정하언이 삼척부사 재직(1750~1752) 기장중인 신미년에 이곳에서 글을 썼다는 설도 있다니 참고 하시길~

 

 

 

 

 

玉壺

 


 


居士

 

 


 

 

두타산 삼화사 일주문을 지난다.

 

 

 

 

 

길손은 과거 40대 초반쯤에 이곳 두타산에 산행 왔다가 정상에서부터 발목이 시큰거려 거의 반쯤 죽으면서 무릉계곡을 내려온 적이 있었는데 발목이 아프니 수려한 경치도 볼 엄두도 나지 않았고, 그 후에는 다시 두타산을 오지 않았기에 정말 오래간만에 온 것이다. 그때 두타산 정상에 무덤이 한 개 있었는데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그 험한 곳에 어떻게 시신(屍身)을 옮겨갔는지 불가사의했다.


 

 



 







 



 

이 불상은 鐵佛(보물 1292호)이며, 통일신라 말인 9세기말쯤 주조된 것으로 추정한다.

 

삼화사 보광전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시멘트로 만든 대좌 위에 머리로부터 가슴과 배, 등판을 붙여 안치했던 것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철불좌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듯하며, 얼굴에는 비교적 살이 올라 통일신라시대의 풍이 엿보인다. 가늘고 길게 뜬 눈, 오똑한 코, 두툼한 입술은 전체적으로 단정한 모습이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주름이 도식적이며, 복부까지 속이 드러나 허리띠와 드리워진 매듭이 보인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밖을 향하게 하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도록 복원하였다.

 

복원과정 중 오른쪽 등판면에서 약 10행 161자로 된 글을 발견하였다. 내용에 노사나불이란 명칭이 2번 나와 이 불상의 이름을 알려 주고 있다. 또한 시주자의 부모를 위해 880년대에 활약한 결언 스님을 중심으로 화엄경에 따라 불상을 조성했다는 기록을 통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0세기 이후까지 내려오는 이두의 사용과 한자를 국어 어순에 맞추어 배열하는 문장 등으로 미루어 그 당시 국어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로 생각된다. (출처 : 네이버 지식)

 

 

 

 

 

 삼화사 해우소에 갔다가 깜놀했다. 부처님 밑에서 지저분한 것을 거론하기가 참으로 죄송하지만,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두산백과에서는 해우소(所)를 두고,

 

근심을 푸는 곳이라는 뜻이다. 번뇌가 사라지는 곳이라고도 한다. 사찰에 딸린 화장실로서 일반 화장실과는 달리 사용상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첫째, 머리를 숙여 아래를 보지 말아야 한다. 둘째, 낙서하거나 침을 뱉지 말아야 하며, 힘 쓰는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한다. 셋째, 외우고자 하는 게송 이 있다면 외운다. 넷째, 용변을 마친 뒤에는 반드시 옷 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나온다. 다섯째, 손을 씻기 전에는 다른 물건을 만지지 말아야 한다.

 

 

 남자 해우소 대변기 2개(전부)가 겨울에 배수관이 터졌는지 아니면 막혔는지 거무튀튀하게 변한 대변이 켜켜이 쌓여서 길손을 위로 빤히 쳐다보고 있네! "야 이놈들아 빤히 쳐다보지 말고, 빨리 밑으로 꺼지지 못해??~" 눈을 부라려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된 잘못은 관광객이든 신도든 그렇게 된 것을 알고 사용한 사람이 그 첫 째요, 그것을 보고도 방치한 절간이 두 번 째다.

 

똥이 무슨 잘못이 있나? 그렇다고 눈치도 없이 삐직거리며 나오는 똥을 괄약근을 힘있게 조여서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똥 위에 똥을 싼 사람을 잘못했다고 나무라기도 곤란하고,

 

해우소에 들어갔다가 근심만 잔뜩 얻어 가지고 나온다. 참고로 길손은 똥 마려움을 느끼지 못했고, 단지 소변을 누고 나오면서 열린 문으로 똥들이 저절로 보여서 이렇게 타박한다. 사진을 찍으려고 했지만, 차마 똥을 찍을 수는 없었다. 똥인들 빨리 제 갈 길을 가고 싶지~ 냄새나는 좁은 곳에 제 몸 말라 비틀어지면서 똥 누러 온 사람들의 험악하게 인상 쓴 얼굴을 마주 하기도 민망할 것이다.

 

차라리 근심을 얻어가는 득우소(得憂所)라는 편이 낫겠다. 사찰 만을 탓할 수도 없다. 절간 살림살이가 예전만 못해서 그럴 수도 있으니 지나는 관광객들은 시주라도 열심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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