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4. 28. 09:01ㆍ감동이 있는 이야기
1986년 5월부터 1996년 하순까지 토요일이나 일요일 저녁시간 대에 MBC 문화방송에서는 뽀빠이 이상용씨가 군부대를 돌며, "우정의 무대"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는데, 여자들이야 군대경험이 없어서 별 재미가 없었겠지만 우리같은 예비역들은 군시절을 회상하며 흥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난다.
군인들이 무슨 세련된 연예인도 아니고, 그저 입던 군복과 군화를 신고 때론 율동으로, 때론 노래로
자기들의 장기를 뽐내고 잘한 팀에게는 부대장이 포상휴가를 주기 때문에 장병들의 열기로 우정의 무대가 후끈 달아올랐지요
그중에서도 당연 압권은 "그리운 어머니" 코너입니다.
군 생활해보신 분들은 모두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내가 군생활하던 1970년대 말에는 장병들중에서
똘방 똘방한 몇 사람 빼곤 여자 친구있는 병사가 그리 많지 않았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아프거나 괴로울 때 유독 엄마가 많이 생각나고, 취침시간에 모포에 얼굴을 묻고 소리죽여
울었던 기억이 날 것입니다.
무대 뒤에 한사람의 장병 어머니를 모셔놓고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려준 다음 어머니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무대위로 올라오라고 뽀빠이가 외칩니다.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 어머니거나 아니거나 올라가서 어머니인 이유를 말하면서 자기 어머니가 틀림없다고 모두들 주장합니다.
그날도 "그리운 어머니"코너에 많은 장병들이 평소처럼 우르르 몰려 올라 왔습니다. 뽀빠이 이상용씨가 한사람씩 엄마라는 주장을 유심히 듣고 있는데,
그중의 한 장병이 다른 장병들과는 다르게
"저 분은 우리 어머니가 아니십니다"
뽀빠이가 "어머니가 아닌데 왜 여기 올라왔어요?"라고 하자
병사는 "전 어머니가 내가 어릴 적 돌아가셔서 지금은 안 계십니다."
무대 뒤의 저분은 비록 내 엄마는 아니지만, 내 마음 속의 엄마라고 생각이 되고,
그리고 엄마가 온 전우를 축하해 주려고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순간 속사포 따발총 뽀빠이 이상용이 목이 메여 잠시 가만히 있습니다.
그때 무대 앞 방청석 중간 중간 앉아 있던 나이 많은 하사관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고 숨죽여 울고 있습니다. 부대장도 울고, 뽀빠이도 울고, 보는 우리도 울었습니다.
그렇게 진행이 잠시 중단이 되고, 주변이 숙연해졌습니다. 뽀빠이가 수습을 하여 다시 진행을 하였는데 참으로 가슴 아팠던 장면으로 기억이 됩니다.
아버지 없는 아이보다 엄마 없는 아이가 더 측은해 보이는 것이 그런 이유 중의 하나겠지요
뽀빠이가 이상한 약장사 사건으로 우정의 무대에서 낙마하였지만, 우정의 무대하면 뽀빠이, 뽀빠이 하면 우정의 무대가 생각납니다.
그 이상용이 후일담으로 왜 아빠들을 모시지 않고, 엄마들을 모셨느냐고 묻자, 엄마를 모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아버지는 어머니와는 달리 오랜만에 아들을 만나도 울지도 않고, 크게 반가워 하지도 않고, 오히려 무덤덤하게 안부를 물어볼 뿐 전혀 감동을 느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엄마는 만나자마자 아들을 껴안고 울고 불고 할 정도로 감격적인 모자상봉을 이뤄 보는 이들까지 감동시켜서였다는 것입니다.
* 1989년 " 우정의 무대 열쇠부대 편 " 에서 방영되었던 '그리운 어머니'입니다.
파란부분을 클릭하세요!! http://peace2833.blog.me/100110872042
[추억의 사진]
[사진출처 :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정범태님의 작품 <1965 서울동대문운동장> ]
위의 사진은 정범태님의 작품으로 시골에서 멀리 파월장병 환송식장인 동대문 운동장까지 찾아온 어머니가 완전군장을 한 아들이 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장면이라고 한다. 정범태님이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사진이라고 하며, 이 사진은 그 해 일본 아사히신문이 주최한 국제사진전에서 10대 걸작으로 뽑혀 세계 사진연감에 수록되었으며, 세계 사진연감에 10주년 특집 전10권 중에서 36장의 작품을 선정해 기록된 그 10년에 세계유수의 사진가와 함께 재수록 되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잘된 사진 36장 가운데 정작가의 작품이 들었다고 한다.
아마도 시골에서 어렵게 농사를 짓던 어머니가 아들의 파월소식을 듣고, 걱정스런 마음으로 한달음에 낯선 서울 땅 환송식장인 동대문 운동장을 어렵사리 찾아와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억만리 낯선 월남땅 전쟁터로 떠나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아들아~ 제발 무사히 살아서만 돌아와다오!!" 하는 말씀이 들리는 듯합니다. 금방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어머니,
그 아들은 지금쯤 살아 있다면 60대 후반이 훌쩍 넘었을테고, 눈물짓던 어머니는 어쩌면 지금은
고인이 되셨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1972년 집안의 종손이고, 장남이자 큰 아들인 형님을 맹호부대 소속으로 황망히 월남으로 보내고,
1년 반 동안 거의 실성하다시피 하루 하루를 힘들게 사셨던 어머님이 생각납니다.
당시 퀴논에 있는 맹호부대 주둔지에 갔다가 越南戰 역사에서 월맹 정규군과 치른 가장 큰 전투인 "안케패스 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매일 라디오 방송으로 집에서 뉴스를 듣곤 했는데, 오늘은 몇명이 전사하였다, 다음 날은 십여명이 전사하였다고 하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어머니는 식음을 전폐하고, 이미 월남에 파병갔다 돌아온 인근 마을 파월장병의 집에 무턱대고 찾아가 위안을 받곤 하였지요~
이미 제대한 파월장병의 손을 잡고 하소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만, 지금은 그 때를 잊고 사시는 연로한 어머님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당시 파월되는 맹호부대 환송 노래인 "맹호는 간다" 도 많이 불려졌습니다.
"자유 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한결같은 겨레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오른쪽 앉아 있는 청년은 맹호부대 병사군요!! 늙으신 어머니는 파월되는 막내아들을 보면서 거의 자포자기한 듯한 모습입니다. 떠나는 아들도 차마 어머니를 마지막 보는 자리일 수도 있기에 어머니의 손을 만지면서 간절하고도 안타까운 작별의 인사를 나눕니다. 저 아들도 살아 돌아왔어야 하는데~~ 반드시 그랬어야 되는데~~
1965년 맹호부대 월남파병 환송식 동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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