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벌판(?)

2016. 10. 29. 22:00살아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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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질 녘에 욱수천을 걷는다. 최근 며칠 사이로 부쩍 찬 기운을 느낀다. 잘 가꾸어진 욱수천 산책로를 걷다 보니 기계 소리 멎은 공장 터에 웬 낯선 간판이 걸려있다.

 

작은 갈대 위로 보이는 황량한 느낌의 '만주 벌판', 나는 만주 벌판이라는 상호를 이곳에서 처음 보는 것이다. 겨울이 다가오는 주변의 분위기도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운데 간판도 을씨년스러움을 더한다.

 

'만주 벌판' 그곳은 고구려, 발해, 대조영, 광개토대왕, 안중근, 홍범도, 김좌진이 연상되는 성스런 곳이다.

 

그러나 저곳은 2년 전부터 문을 연 보양탕 집이다. 보양탕을 먹지 못하는 길손은 들어가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그 가을 풍경을 담는다. 

 

 

 

         북방(北方)에서 - 정현웅에게/백석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무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츰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금은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여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옛 한울로 땅으로―나의 태반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늘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夔行). 191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했다. 오산중학과 일본 도쿄 아오야마학원을 졸업하였다. 1935년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1936년 첫 시집 을 출판하였다. 방언을 즐겨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모닥불', '고향', '여우난골족', '팔원'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토속적, 민족적이면서도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8.15 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사망연도가 1995년임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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