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1. 26. 14:00ㆍ여행이야기
궁남지 다음 코스로 부소산성(扶蘇山城)을 간다. 첫 느낌은 온화하다.
안내도를 보니 말이 산성(山城)이지 작은 야산에 불과하고, 산성의 넓이도 기대 이상으로 적지만 뒤에 백마강이 있어서 요새의 조건은 최소한으로 충족한 것으로 보인다. 주변에 사는 주민들 운동 겸 산책로로 이용하기엔 안성맞춤인 듯하다.
전시(戰時)가 아닌 평시에는 왕궁의 후원 역할을 했다니 완만한 경사의 길을 따라 용포 자락의 움직임이 보이는 것 같다.
삼충사(三忠祠) 입구에 있는 의열문(義烈文)이다. 역사는 승자의 입장에서 이해되고 정리되었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 의미에서 이곳 삼충사(三忠祠)를 바라보는 길손의 심정은 착잡하고 복잡하다.
의열문을 지나니 앞에 삼충신을 모신 사당이 보인다.
참 뜬금이 없다. 삼충사 해설사가 삼충사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앞을 보니 친구가 든 종이가방에 눈길이 가는데 그 내용이 황당하다. 불특정 다수에게 바르게 살 것을 경고하는 의미의 글귀로 생각되는데 이런 글귀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는 분명히 나쁜 영향을 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삼충사'와 '밤 길 조심해라!' 時空을 초월하여 삼충신이 자신의 나라를 침략하고, 사직을 무너뜨린 라당(羅唐) 연합군에 대한 한이 서린 원망의 말은 아닐까?^^
의열문을 지나니 충의문이 또 나타난다.
삼충사(三忠祠)는 멸망한 백제(百濟)의 충신(忠臣)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의 충절(忠節)을 기리기 위하여 1957년에 세운 사당(祠堂)이다.
성충(成忠)은 백제 의자왕(百濟義慈王)때 좌평으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위해 애 쓰다가 투옥(投獄)되어 식음을 전폐(全廢)하고 의자와의 잘못에 대해 충언을 하다가 죽은 충신(忠臣)이다
흥수(興首)는 라당 연합군(羅黨聯合軍)이 공격(公擊)해오자 탄현(炭峴)을 지키라고 의자왕(義慈王)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계백(階伯)은 신라 김유신 장군의 5만군(五萬軍)이 황산(黃山)벌로 쳐 들어오자 5천 결사대(五千決死代)로 싸우다가 황산벌에서 장렬히 죽은 장군(將軍)이다.
이쯤에서 길손이 비판적인 시각으로 충신에 대해 생각하자면, 왜 충신은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의 전유물처럼 이름 없는 민초의 이름은 왜 잘 거론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충언하다가 투옥되어 식음을 전폐하다가 옥사(獄死)하거나, 탄현을 지키라고 당부한 사람이 충신이고, 계백 장군은 혼자 황산벌에서 라당 연합군과 맞서 싸우다 혼자 죽었나? 그들의 후손들을 욕보이고자 이렇게 글을 올리는 것이 아니고, 이름 없는 무명용사로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나라의 부름을 받고 처절한 전장터에서 화살이나 창, 칼에 베여 신음하면서 죽어간 수많은 전사가 오히려 영웅이요 충신이 아니었겠나?
그런 의미에서 역사학자들은 그들의 행적에 대해 치밀한 고증으로 그들의 충성스런 역할에 대해 세세하게 기록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사적지 안내문에도 성의있게 넣어주시길~~
사당 안에는 왼쪽부터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의 순으로 영정이 놓였는데 문인이 존중받던 시기여서 계백 장군이 오른쪽 끝으로 간 것은 이해하겠으나 흥수(興首)가 중앙 기단에 놓인 것은 약간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후대에 난세에 리더인 왕(王)의 리더쉽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떻게 절제된 생활을 하여야 하며, 또한 나라를 쇠락하게 하여 망하는 길로 나아갈 때 주변의 참모는 어떠한 역할을 하여야 하는지 경계하는 의미에서 상세한 내용의 기술이 있어야 했다고 생각하는데 상세한 설명이 부족하여 그런 의미에서는 매우 아쉽다.
삼충사의 용마루 양 끝에는 봉황의 꼬리 또는 물고기 형상의 치미(鴟尾)가 부착되었는데 부소산의 서복사지(西復寺址)에서 출토된 치미가 유일하게 복원된 것을 복제하여 이곳에 설치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설치한 것은 목제 건물을 화마로부터 보호하는 일종의 주술적인 의미라고 한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만고의 진리를 몸소 보여주는 굽은 소나무
아무 의미가 없는 이 난간 사진을 올린 이유는 지금의 아내와 연애할 때 저곳에 기대어 서서 찍은 사진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화정에서 백마강으로 이어지는 절벽을 낙화암으로 부르는 것 같은데 의자왕의 삼천궁녀가 이곳으로 떨어져도 물에 바로 떨어지지 못하고 절벽에 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삼천궁녀가 줄을 서서 떨어지려면 온종일 걸릴 수도 있었을 것이고, 설령 떨어졌다고 해도 백마강 수심이 깊어야 10m 남짓일 텐데 100명 정도만 먼저 떨어지면 나머지는 사람 위로 떨어져서 쉽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부여읍민들에게 맞아 죽을 소리 하고 있음. 그냥 삼천궁녀의 전설이 말도 되지 않는 허구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썼으니 양해하시기 바람)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 특히 남자들은 삼천궁녀에 대해 너나 할 것 없이 굉장한 호기심을 가진다. 의자왕이 부럽다고 말이다. 나라야 망하든 말든 삼천궁녀와 온갖 호사를 누리고 실컷 즐기다가 죽었으면 그것도 복이 아니겠나? 하는 의미에서~
그런데 뒤에 황포 돛배(?)를 타러 갔다가 그곳에 종사하는 연세가 지긋한 분에게 슬쩍 물어보니 백제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의자왕 삼천궁녀는 허구인데 그렇게 난잡한 생활을 했던 마지막 왕과 백제에 대해 폄하하는 언사와 주변 시선에 많은 부담을 느끼고,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고란사는 부지런하기도 하다. 10월 1일부터 새해 성취 발원 등 불사를 일으켰으니
고란사(皐蘭寺)와 고란초(皐蘭草)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고란사가 생기고 고란초가 생겼나? 아니면 그 반대인가? 길손은 절 이름에 蘭이 있는 것으로 봐서 어림짐작 컨데 고란초가 먼저 이곳에 자생하였고, 그것을 보고 이곳에 법당을 지었을 것이다.
삼성각 바닥에 앉아 잠시 바깥을 쳐다보았다. 삼천궁녀의 영혼이 서린 백마강과 삼성각에서 슬픈 전설에 잠시 귀 기울이며, 그들의 못다 한 말을 엿듣는다.
수많은 꽃잎이 졌던 곳이 혹시 저 절벽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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