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6. 24. 12:00ㆍ여행이야기
법주사를 나오는데 왼쪽에 넓은 터에 잘 다듬어진 석물이 보인다. 워낙 날씨가 덥고 햇볕이 따가우니 그늘 한 점 없는 이곳 부도원을 들리는 이는 길손밖에 없다. 부도(浮屠)는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묘탑(墓塔)인데 부도에는 다른 석조물과 달리 탑비(塔碑)가 따로 세워져 있어 부도의 주인공과 그의 생애 및 행적 등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당시 승려들의 생활상을 유추할 수가 있다고 하는데 이곳 부도밭에는 흔히 오래된 사찰 주변에서 볼 수가 있는 둥그런 달걀을 세워놓은 것 같은 종형(鐘形) 부도는 보이지 않고, 근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부도가 여러 개가 있다.
사진의 부도는 제일 뒤쪽 중앙에 있어서 중요한 스님의 것이 틀림이 없는데 비석을 보니 불국사 조실로 오래 계셨던 성림당(聖林堂) 월산(月山) 대종사(1913~1997)의 것이었다. 길손이 아는 월산 큰스님은 예산 수덕사의 덕숭문중의 스님으로 부산 범어문중의 월하(月下)스님과 종정 자리를 놓고 겨루다 결국 월하스님에게 종정자리가 넘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도 조계종에서는 덕숭총림이 범어총림에게 세력이 밀리는 것 같다.
자료를 보니 월산스님은 1997년 9월6일(음력8월5일) 오후8시30분 불국선원 염화실에서 입적했다. 법랍 54세, 세수 85세. 월산문도회는 1999년 월산스님의 2주기를 맞는 해에 ‘월산스님 법어집’을 펴냈다. 이어서 2005년 성림당 월산 대종사 부도탑·비를 불국사에 세웠다. 비문은 고은 시인이 짓고 글씨는 운포(雲浦) 정병철이 썼다. 2007년 10주기를 맞아 속리산 법주사에서도 부도탑과 비를 세웠다.
그러니까 월산스님의 부도탑은 경주 불국사에도 있고, 이곳 법주사에도 있다는 것이다. 월산스님은 늘 중도(中道)사상을 강조하셨다고 하는데 길손은 개인적으로 27~28년 전에 월산스님이 직접 붓으로 쓰신 '中道'라는 글을 불국사에서 받아서 표구하여 집에 보관하고 있다.
월산 대선사 부도 앞쪽으로는 법주사 조실을 지낸 효일당 범행 대종사의 승탑(僧塔)이 있다.
진공당(眞空堂) 탄성(呑星) 스님의 부도탑
남산당(南山堂) 정일(正日) 대선사 부도탑
원파당(圓坡堂) 혜정 대종사의 승탑과 탑비
법주사 관계자에 의하면, 이 법주사는 불국사, 금산사와 함께 같은 문중이었고, 법주사는 종가 사찰인데 1960년대 덕숭 문중을 이어오는 근대불교의 중흥조 경허 대선사와 그의 제자 만공대선사, 또 만공의 제자 금오대선사로 이어져 내려왔는데 금오 스님이 1960년대 불교 정화운동(대처승 몰아내기)을 하면서 법주사가 덕숭 문중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금오스님의 제자인 성림당 월산 등 제자들의 부도가 이렇게 새로 조성된 부도밭에 서게 된 것이다. 이 부도밭에는 금오 스님의 제자(사형과 사제 師兄 師弟)들이 모셔져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스승인 금오 스님의 부도탑은 법주사와 수정암 사이에 조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진두의 고승전]
성림당(聖林堂) 월산(月山) 대종사(大宗師)
"수행자는 뒷모습이 항상 깨끗해야 한다."
정화불사와 종단발전을 위해 노력한 월산스님은 한 평생 수좌정신을 곧추 세웠고 청정비구의 삶을 올곧게 살다 갔다. 스님의 삶은 문자 그대로 ‘무소유의 삶’이었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그대들은 왜 중이 되었는가. 출세를 하기 위해서인가, 밥을 구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예쁜 색시를 만나 살림을 차리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술이나 한 잔 걸치고 음풍농월이나 하면서 세상을 비웃기 위해서인가. 아마 백이면 백 사람을 다 잡고 물어보아도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또 묻겠다. 그대들은 여러 가지 중노릇하는 방법 중에 왜 하필이면 참선을 하려고 하는가. 포교를 하는 중도 있고 종단에서 높은 벼슬을 하는 중도 있고 주지를 하는 중도 있고 경(經)을 읽어 강사가 되는 중도 있고 유학을 가서 학자가 되어 오는 중도 있고 또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짓거나 노래를 부르는 풍류중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참선(參禪)을 하려고 하는가.
내가 평생 선방에서 참선을 해봐서 아는데 이 참선이란 것이 보통하기 힘든 중노릇이 아니다. 하루에 8시간, 10시간 많게는 12시간도 넘게 선방에 앉아 있으려면 그것이 보통 고된 일이 아니다. 차라리 속가에 나가 농사를 짓는 것이 훨씬 편하지. 그런데 그대들은 출세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중노릇 중에서도 가장 힘든 참선을 하려고 하니 모르는 사람은 미쳤다고 할 것이다. 그대들이 참선을 하려는 것은 그저 놀고먹기 위해서가 아니다.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자기의 본 마음을 찾아 부처가 되기 위해서다. 그 장한 일을 하려고 그대들은 중이 되었고 중 중에서도 참선 중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참선수좌들아! 지금 여러분들은 어디서 부처를 찾고 마음을 찾고 있는가?
마음을 떠나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부처를 떠나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제불제조(諸佛諸祖)가 그토록 간절하게 일렀거늘 지금 왜 그대들은 남의 허벅지만 긁고 있는고! 남의 다리 긁으면 거기서 부처가 보이고 마음이 보이는가?”
성림당(聖林堂) 월산(月山) 대종사(1913~1997)는 1913년 5월 초하루 함경남도 신흥군 원평면에서 부친 경주 최씨 흥규(興圭)거사와 모친 곡부 노씨(魯) 사이에서 3남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이름은 종열(鍾烈)이라 했다. 신라 고운 최치원의 후예인 그는 돈독한 불교가정에서 남부럽지 않게 자랐다. 1943년 부친이 사망한 후 안변 석왕사의 양안광스님 소개로 치악산 상원사 전금초스님을 찾아갔다. 금초스님은 망월사로 소개서찰을 써 주었다. 1944년 망월사로 가서 춘성스님의 안내로 금오(金烏)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1945년 덕숭산 만공스님 회상에서 공양주 소임으로 한 철 지냈다. 그 때 만공스님으로부터 ‘이뭣고’ 화두를 받았다. 만공 금봉 금오 전강선사 회상에서 수선 안거를 한 후 3년간 운수행각에 나섰다. 수덕사를 떠나 금오스님의 보림처였던 전남 보길도 남문사에서 비룡스님(한암스님 제자)과 함께 용맹정진 했다. 경북 청도 적천사 토굴에서의 정진은 구도자로서의 방향을 정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48년 문경 봉암사에서 청담, 성철, 자운, 향곡스님 등과 함께 공주청규(共住淸規)아래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정신으로 잘못된 구습(舊習)을 혁파하고 올곧은 승풍을 진작시켰다. 1953년 은사인 금오스님을 모시고 종단 정화불사에 적극 동참, 비구종단의 초석을 놓는 일에 몸을 바쳤다. 1961년 팔공산 동화사 주지, 1963년 설악산 신흥사 주지를 맡았다. 속리산 법주사, 태백산 각화사,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 등지에서 수행했다.
1968년 가을 어느 날 금오스님이 입적을 앞두고 문도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금오스님은 한동안 묵묵히 있다가 문도들을 돌아보며 오른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이때 월산스님이 일어나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참모습 깨닫고 보니/ 부처와 조사 어느 곳에 있는가/ 몸속에 하늘과 땅 본래 감추어 있으니/ 몸을 뒤쳐 사자후를 하노라/ 세우지 않고/ 버리지 않고/ 쉬지 않도다(忽覺本來事 佛祖在何處 裏藏乾坤 轉身獅子吼 不立 不捨 不休).”
이에 금오스님이 대중을 돌아보며 “제반사(諸般事)를 월산에게 부촉(咐囑)하노라” 하며 인가를 했다. 금오스님의 법을 이어받은 월산스님은 법주사 조실에 추대되어 법주사 총지선원(聰持禪院)에서 납자들을 제접하기 시작하여 불국사 금산사 대승사 불영사 등 제방선원의 조실로 추대되어 종풍을 선양했다.
1968년 9월7일 총무원장에 취임했다. 이 해 10월8일 은사 금오스님이 법주사 염화실에서 입적했다. 1970년 불교, 천주교 성공회, 원불교, 유교 등 대표자들이 모여서 창립한 한국종교협의회 초대회장에 취임하여 종교간 화해의 기틀을 마련했다.
1973년 8월초 불국사 주지 직무대행, 1974년 6월 불국사 주지에 취임. 한국의 대표적인 관광사찰에 선원, 강원을 개창하여 수행도량의 본 모습을 복원 진작했다. 또한 평소에 염원하던 남북통일을 위하여 6000여관의 통일대종을 주조하여 토함산정에 대종각을 건립했다.
1978년 제6대 총무원장에 취임했으며 1986년에는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1987년 전두환 대통령과의 면담자리에서 민주적 개헌 방향을 밝혀야 소요가 진정됨을 건의했다.
1988년 3월 재가자들의 선(禪)수행을 위해 경주시에 부인선원을 개원, 100여명의 결제대중이 항상 정진하게 했다. 월산스님은 1996년 봄부터 노환을 보였으나 항상 옛과 다름없이 편안한 모습으로 납자들을 제접하고 제자들을 엄히 경책, 본분종장(本分宗匠)의 위의를 잃지 않았다. 1997년 9월 초 노환이 위중하여 시자들이 임종게를 간청드림에 이렇게 썼다.
“인생을 돌고 돌았으나/ 한 걸음도 옮긴 바 없나니/ 본래 그 자리는/ 하늘땅보다 먼저이니라(回回一生 未移一步 本來其位 天地以前).”
9월6일(음력8월5일) 오후8시30분 불국선원 염화실에서 입적했다. 법랍 54세, 세수 85세. 월산문도회는 1999년 월산스님의 2주기를 맞는 해에 ‘월산스님 법어집’을 펴냈다. 이어서 2005년 성림당 월산 대종사 부도탑·비를 불국사에 세웠다. 비문은 고은 시인이 짓고 글씨는 운포(雲浦) 정병철이 썼다. 2007년 10주기를 맞아 속리산 법주사에서도 부도탑과 비를 세웠다.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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