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 속리산 법주사

2018. 6. 24. 10:00여행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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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주사를 찾아가는 것이 얼마 만이더냐? 30대 후반이던가 아니면 40대 초반이던가 상주 땅에서 문장대를 올라 법주사로 내려왔던 그때부터 20년이 족히 걸렸다. 법주사 입구에 굳건히 서 있던 정이품 소나무도 한쪽 날개가 무너져 내렸다.







영남과 호남은 익숙하지만, 호서는 어쩐지 낯설다.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라는 현판을 단 일주문이 우리 일행을 맞는다.











현판은 오른쪽부터 '속리산 대법주사(俗離山 大法住寺)' 라고 씌어 있고, 맨 왼쪽에는 '광무 6년 임인 4월 일중달(光武 六䄵 壬寅 四月 日重迖)'이라고 쓰여있다. 광무는 고종 황제 때의 대한민국 연호인데  광무 6년은 서기 1902년으로 고종 즉위 39년이고(고종 즉위 년도는 1863년) 경술국치 한일합방 8년 전이다. 그러니 이 일주문의 현판은 고종과 대한제국의무능과 일제 강점기의 실상을 몸소 체험하였던 것이다.









세조가 법주사에 들러서 걸었다는 '세조길'의 입구가 보인다.











'보은 속리산 사실기비'는 안내판에는 속리산의 내력과 세조가 속리산에 행차한 사실(事實), 그리고 수정봉(水晶峯)에 있는 거북바위의 전설을 기록했다는데 거짓이 아니고, 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런 사실을 기록한 비인 '사실기비(事實記碑)' 를 세웠나 본데 아마도 단종을 몰아내고 왕권을 차지한 세조 스스로가 한 일을 백성들이 잘 믿지를 않아서 궁여지책으로 저런 비를 세웠던 것은 아닐까? 지금으로 보면 일종의 인증샷이라고 봐야겠다. 이 비석은 1666년(현종 7년)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글을 썼다고 했는데 宋씨들의 전성기였나 보다.








속리산 사실기비 옆에는 '벽암 대선사(碧巖 大禪師)碑가 있는데 비문이 훼손되어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다. 이 碑는 법주사를 크레 중창한 조선 중기의 고승 벽암 대선사의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1664년 5월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정두경이 짓고, 글씨는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이 썼다고 한다.


벽암 대선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해전에 참전하였고, 인조 2년(1624)에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팔도 도총섭에 임명되어 승군을 이끌고 3년 만에 성을 완성하였으며, 인조 14(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전국 사찰에 격문을 보내 승군 3,000명을 모은 후, 항마군(降魔軍)이라고 이름 짓고, 남한산성으로 향했으나 도중에 전쟁이 끝나 항만군을 해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금강문을 들어가기 전에 기이한 돌기둥이 서 있었는데 하단부에 구멍이 있어서 혹시 당간지주인가 했으나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용도를 알 수가 없는 석주(石柱) 옆에는 석주의 내력을 알리는 것 같은 비석이 있는데 길손의 한자 실력이 형편이 없어서 대충 읽어 보니 오른쪽 첫 줄에는 강희(康熙 : 청나라 강희제 연호) 21년(1682)가 있고, 밑으로는 어떤 날짜에 뭘 세웠다고 하고,


둘째 줄에는 전(前) 주지(住持)의 법명(삼주三周?)이 있는 것 같으며,


셋째 줄에는 화주(化主) 김수남(金受男)의 이름이 있는데 화주(化主)는 제를 지내는 제주(祭主)라고 한다.


넷째 줄에는 건륭 15(1750;영조 26)년 어떤 날(5월?)에는 무엇을 새로 개조하였다고 하면서 시(時) 주지(住持)[당시의 주지?] 가선축하(嘉善笁河?)라고 되어 있는 것 같은데


길손이 답답한 것이 이런 비석도 꼼꼼히 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사찰 측에서는 直視하고, 스님들이 탁본해서 해석한 다음에 안내판에 한자를 쓰고, 그 뜻을 해석하여 붙여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금강문(金剛門)을 들어서니 왼쪽에 탱화를 걸었던 당간지주의 위용이 드러나는데 옆에서 당간지주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저기 기다란 굴뚝이 있네~"한다.^^


그것도 그럴 것이 오른쪽 맞은편에는 법주사 큰 철솥이 있었으니 굴뚝으로 상상했을 만하다.












법주사 금동미륵대불이 위용을 자랑한다. 빨리 미륵이 오셔서 평화로운 세상이 되었으면






천왕문 사이를 통해서우리나라 유일의 목조 5층탑인 팔상전(殿)이 보인다.






포항에서 왔다는 중년 남녀 초등학교 동기생들이 왁자지껄 기념 촬영한다고 도무지 자리를 비켜주지 않아서 하늘로 쳐들고 찍었는데도 그들의 얼굴 일부가 나왔다. 어떻게 되었던 좋게 봐주자!!






사람이 안 지나갈 때를 기다렸으나 그런 기대는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도록 기다리는 것하고 진배없어서 포기했다. 아~~ 포항의 중년 남녀 초딩 동기들~~!!







목조탑의 중앙에는 4개의 큰 기둥, 그리고 기둥과 기둥을 이은 구조물이 탑의 중량을 받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이것도 지진을 대비하여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건축의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일목요연하게 잘 지은 것 같다.






멀리 대웅전과 왼쪽으로는 쌍사자 석등도 보이고














대웅전에 있는 불상






경내에는 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상과 특이한 바위들이 있는데







이곳에도 어김없이 자신의 이름을 바위에 새겼는데 왼쪽 아래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 위의 역 경사진 곳에 어떻게 고개를 쳐들고 새겼는지 그 노력이 가상했다. 바위 정면에도 커다란 글씨가 보인다. 하기사 김일성과 김정일도 금강산에 어마어마하게 제 이름을 새겼는데~








바위 앞에 보리수나무가 있고, 그 나무에 제법 튼실하고 커다란 보리똥 열매가 열렸기에 맛을 보았더니 시큼털털한 게 아직 수양을 더 하고 와서 먹어야 제맛을 느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