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鄕校와 宗親會

2019. 4. 21. 21:31살아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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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邱 鄕校에 왔다. 대구에 살면서도 대구 향교는 처음이다. 유림도 아니면서 이곳에 온다면 관광객일 텐데 특별한 행사가 있지 않다면 향교를 구경하려고 오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사실 큰 구경거리도 없다.






정문 왼쪽으로는 유림(儒林) 회관이 있는데 대회의실과 소회의실 그리고 지하에 식당이 있었다.







대구 시내 한가운데 있지만, 터도 넓고 제법 위용이 있어 보인다.







멀리 향교 건물 중 대성전과 함께 기본 건물로 유림들이 모여 학문과 동의를 연마하던 명륜당(明倫堂)이 보인다.






낙육재(樂育齋)는 1721년 경상감사 조태억이 경상도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하였다고 하는데 글자 그대로 사람을 교육하는 것이 낙이었던 것 같다.






맞배지붕으로 지은 낙육재의 옆모습이 정말로 아름답다. 기둥의 무늬와 굵기의 조화가 정말 기가 막힌다.






연륜의 빛깔이 녹아나는 배흘림기둥의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지역 유생을 교육시키는 양사재(良士齋)라고 하는데 낙육재와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다.







양사재도 낙육재처럼 맞배지붕에 흘림기둥으로 비슷한 건축 방법을 사용했다. 이렇게 설명하는 내가 우습네~





길손이 구경했던 다른 향교에서 대성전은 향교 안에서도 담을 쌓고, 출입문을 통해서 안으로 드나들었는데 아마도 이곳은 죽은 者의 공간이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대성전(大成殿)정문으로 보이는 저 대문은 대성전과 양사재를 이어주는 '내삼문'이라고 한다. 내삼문(內三門)은 동헌이나 객사 앞에 통로가 셋 있는 삼문()을 말하는데 가운데 문으로는 수령과 사신·빈객들이 드나들었고, 왼쪽 문으로는 향토의 양반이나 아전들이, 오른쪽 문으로는 군관이나 장교 또는 백성들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요약하면 신분에 따라서 드나드는 문이 달랐다는 얘긴데, 여기서도 문(文)을 무(武)보다 우대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친일파 미친놈이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겠지만, 일제강점기를 무조건 나쁘다고만 해서는 안 된다고 보는 것이 길손의 일관된 입장이다.

조선 시대의 냉혹하고도 끈질긴 양반 상놈의 신분 제도를 일거에 타파한 것이 누구의 솜씨인가? 일본 쪽바리들의 솜씨가 아니던가? 만약에 그때 신분제도를 타파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저런 내삼문에 와서 고통을 겪을 사람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대성전(大成殿)과 낙육재, 명륜당을 이어주는 작은 문인 이것은 동소문이다.






동소문 옆 담으로 대성전을 넘겨다 본다. 대성전 현판이 작게 보인다.






두산백과에 보니 대성전(大成殿)은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殿)을 말한다. 공자를 중앙에 모시고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4성()을 좌우에 모셔 합사()한다. 중국에서는 산둥성[] 취푸[]의 것이 가장 크다. 

 

한국에서는 공자를 비롯하여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5성과 민손() ·염경(  ) ·염옹(  ) ·재예() ·단목사() ·염구(  ) ·중유() ·언언() ·복상() ·전손사(  ) 등 10철(), 송조 6현()의 위패를 대성전에 모셨고, 양무()에는 공자의 70제자를 위시한 한 ·중 양국의 현인() 111위를 배향했는데, 한국인의 18현()은 설총() ·최치원() ·안유()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조헌() ·김집() ·김인후() 등이다. 한국의 것은 보물 제141호로 지정되었는데 서울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내 문묘 안에 있다.


길손이 사계(沙溪) 김장생(金) 신독재(愼獨齋) 김집()을 파란색으로 강조한 것은 그 두 사람이 광산 김씨(光山 金氏) 가문의 부자지간으로 나란히 문묘에 배향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신독재(愼獨齋) 선생은 호에서도 풍기듯이 늘 혼자를 삼가는 생활을 했다고 한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늘 혼자 있어도 하느님이 곁에 있다고 생각하고 생활에 있어서 매사 근신하였다면, 신독재 김집 선생도 늘 혼자 있어도 남이 보는 듯이 자신을 삼가면서 살았다고 하는데 일설에 의하면 잘 때도 의관을 벗지 아니하고, 반듯하게 잤다고 한다.  


40여년 전에 어떤 신문에서 신독재의 묘소 사진을 본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봉분이 아주 낮고, 비석도 아주 작은 비석이 서 있었는데 그 이유는 김집 선생의 유언 때문이라고 했다. 조선시대에서는 갓을 써도 큰 갓을 써야 대감과 지체 높은 사람으로 행세하던 시절에 스스로 몸을 낮춰서 그런 유언을 한 인품에 감동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묘소 사진을 보면 봉분을 올리고, 비석을 크게 했는데 후손들이 김집 선생의 유지를 제대로 받들지 못한 우매한 짓을 했다고 생각한다.

 



대구 향교 유림회관 소강당에서 어떤 행사가 열리고 있다.









광산 김씨 대구.경북종친회 제45회 정기총회가 열리고 있다. 대구 시내를 비롯한 인근 경산, 김천, 상주, 군위, 예천, 안동 그리고 멀리 봉화, 영양 등에서 광김 일문이 핏줄을 찾아 이곳에 왔다.






대구.경북종친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서울에서 오신 종친회장의 축사가 이어지고










먹고살기 바빠서 허둥대다가 문득 정신이 드니


니 本鄕이 어디더냐?


내 본디 본향은 원래 있던 곳이오.

돌아가는 본향이 그곳이 아니겠소?


그곳이 어디더냐? 그곳은 니 어머니의 자궁이더냐?


어머니 자궁보다 더 멀고 깊은 곳이라오. 자연이란 말이오.


그렇게 뿌리를 찾게 된다. 종친회 같은데 얼굴을 자주 보이게 되면 역설적으로 죽음에 가까워졌다는 신호로도 읽힌다. 꼭 그렇지만은 않겠지만, 현직에서 물러나서 문득 무료함을 느끼면 일가를 찾는 것이 자연의 섭리로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종친회나 향우회에는 젊은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곳 대구에서는 광산(光山)  金氏가 흔치 않은 것 같다. 아니 상식이 부족해서 그런지 조선시대 3대 명문가를 못 알아보는 것 같아 섭섭하기도 하다.


"당신 본관이 어디오?"

"광산이오만~"


"전라도 광주 광산 말이오?"

"그렇소만~"


"............."


별 것 없네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러나 광산 김씨의 시조는 원래 전남 광산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신라 신무왕의 셋째 왕자가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평장동에 가서 살았기 때문이다.



위키백과에서는

시조 김흥광은 신라 김알지 후예의 왕자로써 통일신라 말기 나라가 어지러워 장차 국난이 일어날 것을 알고 경주를 떠나 무진주 서일동(현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일설에 시조 김흥광은 《동국만성보》 및 《조선씨족통보》에는 신라 49대 헌강왕의 왕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광산김씨 정유대동보》, 《신라김씨선원보》, 《계림대보》, 《경주김씨보》 등에는 신라 45대 신무왕의 셋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김길(金吉)은 고려에 귀의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고려 태조 왕건은 김길은 삼중대광(三重大匡)에, 김길의 조부인 김흥광은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하였다. 이후 조부의 작호(爵號)이자 세거지(世居地)인 광주 광산(光山)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으며, 후손들 중 평장사(平章事:정2품)가 8명이나 배출되자 사람들이 서일동(현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명칭은 지금까지도 남아 평장리(平章里)로 불리고 있다.

조선시대 들어와서도 광산 김씨는 명문가로 명신과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최고의 영예인 문묘 종사와 종묘 배향을 동시에 이룬 6현 중 하나인 김집을 배출해 6대 국반(國班)의 대열에 올랐다. 특히나 문묘 종사 현인을 한 가문에서 2명을 배출한 것은 은진 송씨(恩津 宋氏) 송시열, 송준길과 광산 김씨(光山 金氏) 김장생, 김집 뿐인데 송시열, 송준길이 사계 김장생의 제자들이고 보면 광산 김씨의 업적은 실로 조선시대 유일무이한 업적이다. 그들이 양간공파 대사간 김극뉴 후손들인 김장생·김집 부자이다.

이밖에 정승 5명, 대제학 7명, 청백리 4명, 왕비 1명을 배출하고, 문과 갑과 장원급제자 12명, 문과 급제자 263명을 배출했다.[1] 김장생 후손 중에 대제학이 7명이나 배출되었다.(문형으로 불리는 양관대제학은 7명이나, 예문관 대제학(홍문관 설치 이전)을 지낸 김한로를 포함하면 8명이 된다.)

서석 김만기와 서포 김만중 형제는 나란히 대제학에 오르는 영예를 누렸다. 김만기의 아들 김진규가 예조판서에 대제학, 그의 아들 김양택 또한 대제학과 영의정을 지냈다. 한 가문에서 3대가 대제학, 형제가 대제학을 배출한 것도 전무후무한 일이다.

삼한갑족(三韓甲族) 중에서 최고로 손꼽는 벌족(閥族)을 연리광김(延李光金) 혹은 광김연리(光金延李)라고 하는데 여기서 김(金)은 광산 김씨(光山 金氏)를 말한다.




두산백과에서는 광산 김씨를 이렇게 소개한다.


신라 신무왕의 셋째아들 김흥광()을 시조로 하는 광산김씨()는 한국의 대표적인 가문의 하나로서 '광김'으로 일컫는다. 이 가문은 조선시대에 총 265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여, 본관별 서열로 제5위가 되었다. 여기에서 정승이 5명, 대제학이 7명, 청백리가 4명, 왕비가 1명이 나왔는데, 특히 대제학 7명은 ‘광김’을 더욱 빛나게 한 사계() 김장생()의 자손이다.

광산김씨는 고려 초기 삼중대광()에 오른 3세손 김길()로부터 8대에 걸쳐 평장사()를 배출하여 명문 가문의 기반을 이루었으며, 15세손으로 대광()에 오른 김정()의 아들인 약채()·약항()·약시() 3형제대에서 더욱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김장생()은 예()의 태두로서 그의 학문은 이조판서를 지낸 아들 집()에게 계승되어 부자가 문묘()에 배향()되는 전무후무한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집의 아우 반()의 여섯 아들은 모두 출중하고, 후손이 크게 번창하여 ‘광김’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청구영언》을 낸 가인() 김천택(), 영의정 김상복(), 우의정 김희(), 이조판서 김상휴()·기만()·기은(), 대제학 김만기()·만중() 형제 등이 모두 이들의 후손이다. 이 가운데 총융사(使)를 지낸 만기와 《구운몽》 《사씨남정기》의 작가로 유명한 김만중의 후손 중에서 많은 인물이 나와 ‘사계 자손’의 주축을 이루었다.

예조판서·대제학을 지낸 김진규()는 김만기의 아들이며, 대제학·영의정을 지낸 김양택()은 김진규의 아들로서 3대 대제학, 형제 대제학의 진귀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시문집 10권을 남긴 문인 김춘택(), 고종 때 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낸 김영수()는 김진규의 형이며, 판서·참찬을 지낸 김진구()의 후손이다. 조선시대 총 265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했고 정승이 5명, 대제학이 7명, 청백리가 4명, 왕비가 1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