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4. 09:25ㆍ스크랩
盧정부 첫 과학기술 수석보좌관 지낸 김태유 명예교수
“세계경제는 지금 거대한 분기점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런 결정적 순간에 정책보다는 정치, 실리보다는 명분을 앞세우고 국익을 위한 타협조차 적대시하는 옹졸한 행태를 언제까지 반복할 겁니까.”
한국의 미래를 위한 제언을 담은 책 ‘한국의 시간’을 최근 출간한 김태유 서울대 산업공학과 명예교수는 “우리 앞에 닥친 4차 산업혁명(초지능·초연결 혁명) 시대를 기회로 바꾸기 위한 국가적 전략을 급히 수립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해 경제학을 공부한 그는 노무현 정부의 초대 대통령 정보과학기술 수석보좌관을 지냈다. 당시 한국 경제의 신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과학기술부총리제 도입, 이공계 박사 5급 공무원 특채 등 다수의 혁신 전략을 추진했다. 이후 미완의 개혁을 언젠가 완성시키고자 산업혁명 연구에 몰두해온 그는 2017년 연구 결과를 집대성한 ‘패권의 비밀’을 냈다. 그리고 한국 경제의 과거와 미래에 관한 후속 저서가 ‘한국의 시간’이다. 그의 강연은 유튜브에서 조회수 400만건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가 많다.
지난달 29일 만난 김 교수는 “이 책을 조선시대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유배 중에 경세유표를 쓴 것과 같은 심정으로 집필했다”고 했다. 경세유표의 서문엔 이런 말이 나온다 ‘털끝만큼 작은 곳 하나도 병들지 않은 곳이 없으니, 지금 개혁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할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한국이 나아갈 길에 대한 제언을 담은 책 ‘한국의 시간'을 최근 낸 서울대 산업공학과 김태유 교수는 지난달 29일 인터뷰에서 “이런 결정적 분기점에 정책보다는 정치, 실리보다는 명분을 내세우는 옹졸한 행태를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박상훈 기자
◇“4차 산업혁명, 국가 미래 다시 가를 것”
-한국 사회에 지금 개혁이 절실하다고 진단하십니까.
“과거 산업혁명은 국가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분기점이었습니다. 인공지능·로봇·바이오 등으로 대표 되는 4차 산업혁명은 다시 한 번 국가 간 승패를 판가름할 겁니다. 조선은 18세기 말 영국에서 시작된 1차 산업혁명을 거부한 나라였습니다. 수신(修身)의 도리를 치국(治國)의 원리로 착각하고 주자학으로 나라를 지키자며 위정척사(衛正斥邪)에 집착했고, 그 결과 산업화에 성공한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했지요. 지도층이 실리보다는 명분을 따지는 지금의 한국도 당시의 연장선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 답답합니다.”
-4차 산업혁명의 개념도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듯한데요.
“우리 모두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합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특징은 ‘선승독식(先勝獨食)’입니다. 산업화 시대에는 선진국을 벤치마킹하는 ‘후발국의 이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디지털 플랫폼 같은 특성 때문에 먼저 시작한 기업이 전 세계 시장을 순식간에 독점해버리는 시대가 왔습니다. 따라서 먼저 시작한 나라는 영원한 선진국으로, 또 늦게 시작한 나라는 영원한 후진국으로 전락하기 십상입니다.”
-미국 실리콘밸리 등이 이미 한참 앞서 있지 않습니까. 한국이 승산이 있을까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면 연구를 포기했겠죠. 조선은 수치스러운 실패 사례였지만, 한국은 경이적인 성공 사례입니다. ‘한강의 기적’은 전 세계가 놀란 압축 성장이지요.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조건에서 산업화에 성공한 저력이 있기 때문에 4차 산업혁명에도 성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산업화 시대에 후발국은 어떻게 선발국을 추격할 수 있었나요?
“먼저 산업사회의 성격부터 잘 이해해야 합니다. 산업사회는 성장에 한계가 있는 농업사회와 달리, 기술과 자본을 통해 기업이 생산성을 높이고 이렇게 번 돈을 다시 재투자해 생산성을 더 높이는 가속 사회입니다. 선발국과 후발국간의 경제적 격차가 점점 더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후발국은 국가가 민간경제활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지원하는 경우에만 선발국을 추격할 수 있었습니다.”
◇후발국, 자유시장에만 기대선 승산 없다
정부가 산업정책을 통해 적극적으로 산업을 지원하는 성장 전략을 김 교수는 ‘외생적 성장’이라고 부른다. 자유 시장 경제가 국가의 개입 없이 이뤄내는 ‘내생적 성장’과 차별되는 용어다. 김 교수는 과거 역사에서 후발국이 선발국을 성공적으로 따라잡은 사례를 제시하며 “국가 지원 없이 추격에 성공한 경우는 없다”고 단언했다. 예컨대 신생 독립국 미국이 영국을 추격할 때, 19세기 독일이 선발국 영국·프랑스를 추격할 때, 또 일본의 메이지유신도 정부 주도의 공업 육성 정책이 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물론 한강의 기적도 최근 중국의 약진도 예외가 아니었다.
-정부 개입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말이 다소 모순되게 들리기도 하는데요.
“오로지 정부가 주도한 계획경제 그것만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다가는 망합니다. 공산주의처럼요. 하지만 후발국이 내생적 성장만 하면 선발국과의 격차가 점점 더 확대됩니다. 자유 시장 경제의 내생적 성장의 바탕에, 선발국과의 대비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도록 정부가 지원하는 외생적 성장을 더해야만 승산이 있습니다.”
-그런 산업정책적 외생적 성장이 지금도 가능할까요.
“과거와 같은 방식으론 안 됩니다. 선발국이 구축한 WTO(세계무역기구) 같은 자유무역 시스템이 정부의 개입을 금지하고 위반하면 제재를 가하니까요. 대안은 있습니다. 기업을 직접 지원하는 길이 막혔다면, 불리한 부분을 찾아 그 원인을 적극적으로 해결함으로써 국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도록 간접 지원을 할 수는 있습니다. 기업의 발목을 잡는 규제를 없애고, 우수 인재가 산업 기술 분야로 진출하도록 적극 지원하며, 북극 항로 등 한반도 주변에 새로운 시장과 산업의 활로를 개척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는 “한국은 박정희 독재 정권이 산업화를 이끌었다는 근현대사의 특수성 때문에 마치 산업화와 민주화가 상반되는 듯한 잘못된 선입견을 가진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모든 성공한 산업혁명은 민주주의를 촉진했지 독재를 강화하진 않았고, 산업화에 성공하지 않고 자유, 평등, 박애 같은 민주주의적 가치가 실현된 적이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우리나라가 과연 4차산업혁명 시대를 선도할 능력이 있을까요.
“지금의 정치 풍토와 공직 사회를 빨리 개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정치 명분이 신념으로 굳어진 결과, 모든 정파가 수구화되어 반목과 충돌의 갈등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보수·진보 모두 국익과 민생을 위해서는 정파의 명분과 신념을 일부 양보하고 상대와 타협의 길을 열어놓아야 합니다. 보수는 외생적 성장을 부정하고, 진보는 내생적 성장을 위축시키면서 한국을 중진국의 함정에 빠트린 정치적 행태부터 개선해야 합니다.”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좋은 지도자를 뽑아야 합니다. 4차 산업혁명과 올바른 국가 발전의 원리를 제대로 아는 대통령을 선택해야 합니다. 국가 수준은 정치 수준이고 정치는 국민의 선택이기 때문에 여론을 주도하는 지식인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한국의 시간’이 이제 별로 남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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