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리스트 / 강근식과 함춘호

2011. 7. 13. 14:27좋아하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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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막 졸업하면서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선친을 졸라서 세고비아 클래식 기타를 샀다.

당시 5만원 정도로 공무원 1달 봉급에 가까운 돈이었다.

 

 

 

대충 이렇게 생겼는데 기타 줄이 나일론 줄이었다. 스승이 없었으니 당연히 무엇을 사야할지도 몰랐고, 그래서 이놈을 골랐다. 사실은 쇠줄로 된 통기타를 구했어야 했는데...

혼자서 초보 기타교습교본을 보고 코드를 집고, 악보가 있는 포크송 가요집을 구입하여 집에서

허구헌날 두드려대는 것이다.

 

워낙 옆구리에 끼고 살다시피 하니 그럭 저럭 흉내를 내서 당시 유행하던 포크송의 어느정도는

대충 소화를 하였는데, 근동에 누가 기타라도 잘 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불원천리 달려가서

그가 연주하는 것을 턱을 괴고 유심히 살피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쉽게도 그들은 배움에 목말라 하는 나에게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했다. 아니 설명을 제대로 못하였다. 역설적이지만 그게 스승이 꼭 필요한 이유다. 기초가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 그 나물에 그밥으로

도무지 일취월장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재내다가 군 입대를 하고, 제대를 한 후에 기타보다

재미있는 일들이 주변에 널려 있어서 가끔씩 기타를 잡아 보는 외에는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다가

결혼하고 나서는 기타를 아예 없애버렸다.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이 분들이 지금 '세시봉' 어떻구 하면서 전국순회공연을 하는 모양인데

그 당시에 이장희씨의 '그건 너'라는 곡을 들어보면 전자기타소리가 들리는데 작곡가 겸 기타리스트 강근식씨가 연주했다고 하고, 강근식씨가 당시엔 국내 최고의 토종 기타리스트라고 회자가 되었었다.

 

강근식님의 기타 연주가 단독으로 올려진 것이 눈을 닦고 찾아봐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고, 다른 님의 음악파일을 내 블로그에 그대로 옮기는 방법도 모르고 해서,  아예 '행복동 사랑방'님의 블로그에 있는 주소를 여기다 붙여 놓는다. 

 

구닥다리 흘러간 통기타 가수들이 다시 모두 모여서 노래부른 것이다.

http://www.lucas.kr/Mboard.asp?exec=view&strBoardID=sarang&intSeq=2186

 

http://blog.naver.com/kkamdongi?Redirect=Log&logNo=10103701644&jumpingVid=C3425CDD0AAEAF8196946AEEB73BE0713864

 

지금은 암투병 생활을 하시는 최인호 작가의 소설을 영화화한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이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굉장한 히트를 친 일이 있었다. 안인숙의 열연도 한몫을 했겠지만, 그 영화에서 영화음악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강근식씨다.  신디사이저를  국내에 처음 들여와서 밤새 매뉴얼을 보고, 다음날부터 녹음에 투입되었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분의 연주장면이 동영상으로 된 것이 있나 해서 서핑을 해도 옛사람이어서 인지 전혀없다.

쬐금 아쉽네.. 그려~~!!!

 

 

어느날 티비를 보니 이장희씨가 울릉도에 살고 있단다. 전형적인 시골 일자형 방 3칸 집이라고 하더군~  한해의 반은 미국에서, 반은 울릉도에서~ 참 특색있는 분이로구나 하는 차에 또 아래와 같은 뉴스가 나왔다.

 

아래사진의 제일 좌측이 강근식씨이고, 다음이 이장희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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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희-강근식-조원익, 울릉도에서 '기타증정식' 가져

기사입력 2011-03-14 14:46:24

 

 

 [TV리포트 권혁기 기자] 40년 전 대학생 시절 모여 밴드를 결성했었던 이장희(보컬, 기타), 강근식(일렉기타), 조원익(베이스)이 울릉동에서 학생들을 위한 뜻깊은 행사를 갖는다.

 

세 사람은 오는 21일 오전 11시 울릉군 북면 천부초등학교 강당에서 "기타증정식"에 참석한다. 울릉도에서 악기를 배우려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악기가 턱없이 부족한 상태. 이에 강근식은 자신이 이사로 활동하는 콜택문화재단을 설득해 통기타, 베이스, 왼손잡이용기타, 일렉트릭기타 등 다양한 25대의 기타와 앰프 등을 기증한다.

 

7년 전 울릉도에 터전을 마련한 이장희는 '울릉천국'이라는 농장을 지었다. 이어 조원익은 3년 전 농장에 놀러 왔다가 울릉도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 농장에 눌러 앉았고, 지금은 동네 초등학교 음악선생의 간청으로 학생들에게 방과후 교사로 악기를 가르쳐주고 있다.

 

이에 김관용 경북도지사는 "앞으로 울릉도출신의 세계적인 음악가의 출현을 기대한다"며 악기를 익힌 학생들이 음악회를 통해 자신의 음악세계를 발표할 수 있도록 울릉천국 연못가에 야외음악당 건립의사를 내비쳤다.

 

한편 이날 행사에는 울릉군 및 울릉군의회 의장 등이 참석해 자리를 빛낼 예정이다.

 

사진=피엠지코리아

권혁기 기자 khk0204@tvreport.co.kr

기사일자:2011-03-14 14:46:24

 

[원문출처 : http://www.tvreport.co.kr/?c=news&m=newsview&idx=1005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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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근식] 세션 기타는 내게 맡겨라! [2003.11.06 제482호]

 

1970년대 스튜디오 세션 도맡은 이장희의 분신… 영화음악에도 이름 남기며 광고인으로 맹활약

 

음악인을 다루는 이 연재물에 ‘유명한 스타는 등장하지 않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만 나오는가’라는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은 연재물의 제목이 ‘악사열전’이지 ‘가수열전’이 아닌 것에 주의하기 바란다. 악사(樂士)란 음악인(音樂人)의 속어다. 곧, 화려한 조명을 받는 가수도, 그렇다고 수입이 짭짤한 작곡가도 아니고 뒤에서 묵묵히 맡은 일을 수행하는 연주인이다.

» 사진/ 강근식은 한국 대중음악의 음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1970년대 초반 뚝섬 스튜디오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모습.

 

짧은 활동에도 대중음악에 깊은 영향

 

가수나 작곡가 가운데 어느 쪽에도 이름을 올리지 않았지만 3~4년의 짧은 활동 기간에 강근식이 한국 대중음악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도대체 그가 누구기에? 1973년을 상징하는 이장희의 노래 ‘그건 너’와 1975년을 상징하는 송창식의 노래 ‘왜 불러’에서의 기타 소리가 강근식의 것이라고 말하면 ‘지대한 영향력’에 대해 동의할 것이다. 곧, 그는 한국 대중음악 음반을 ‘들을 만한 것’으로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존재다. 그것도 그때그때 불려 가서 기타를 쳐주고 오는 세션맨이 아니라 탄탄한 팀워크를 갖춘 스튜디오 밴드(‘동방의 빛’)의 수장이었다.



강근식의 이름이 등장하는 최초의 음반은 양희은의 <고운 노래 모음 2집>(KLS-40, 1972)일 것이다. 양희은이 적은 깨알같은 글씨 가운데 “기타를 연주해준 군인 아저씨 강근식 兄”이라고 표현된 인물이 바로 그다. 지난번 보았던 정성조, 그리고 다음에 볼 안건마와 더불어 강근식은 1970년대 청년문화와 연관된 대중음악의 ‘젊은 명인’이었다.

‘군인 아저씨’ 이전에 그는 무슨 활동을 했을까.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도예과에 입학한 뒤 2학년 때부터 5인조 ‘캄보 밴드’(combo band: 3~4명의 연주자로 이뤄진 소규모 밴드)인 홍익 캄보를 결성해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밴드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길이 ‘미 8군 무대’ 외에는 마땅치 않던 시절 이례적으로 대학교 캠퍼스를 무대로 활동한 것이다. 그 당시는 음악을 제대로 한다면 ‘재즈’를 한다고 생각했던 무렵이었으므로 강근식 역시 조지 쉐링 퀸텟(George Shearing Quintet) 스타일의 음악을 주로 연주했다. 그렇지만 그가 가장 좋아했던 음악은 컨트리 기타리스트 쳇 앳킨스(Chet Atkins)의 연주였다. 홍익 캄보는 TBC(동양방송)에서 주최한 ‘전국 남녀대학생 재즈 페스티벌’에서 2년 연속 1위를 차지하는 등 캠퍼스 아마추어 그룹으로는 드물게 실력 있는 존재로 명성을 쌓았다.

» 사진/ 초로의 신사가 된 최근의 모습.

 

그리고 이장희와의 운명적 만남이 있었다. 명동의 생음악 살롱 뉴 멕시코에서 맺어진 둘의 인연은 1969년께 ‘이장희와 강근식’이라는 통기타 듀엣 활동으로 이어졌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영향을 받아 트윈 폴리오(송창식과 윤형주), 투 에이스(오승근과 홍순백), 도비두(김민기와 김영세) 등 대학물 먹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남성 듀엣이 전성기를 이루던 시대였다. 불행히도 강근식의 입대로 듀엣 활동은 단명했다. 다행인 것은 군에 입대한 뒤에도 문선대에서 악사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 앞서 양희은의 음반에 연주인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포크 음악의 전설에 그의 연주가 있다

 

제대 이후 그는 한국 음반업계의 전설인 오리엔트 프로덕션의 나현구 사장(일명 ‘나 사장’)을 만나서 서울 뚝섬과 역촌동의 스튜디오에서 ‘포크 음악’의 무수한 명반들을 만들어 냈다. 조동진(리듬 기타), 조원익(베이스), 이호준(키보드), 배수연(드럼, 뒤에 유영수로 교체)으로 이루어진 ‘동방의 빛’은 탄탄한 팀워크를 이루어 포크 가수의 수많은 음반들을 양산했다. 이장희, 송창식, 김세환, 윤형주 등 ‘스타’가 된 포크 가수들뿐만 아니라 양병집, 4월과 5월, 현경과 영애 등 ‘컬트’의 대상이 된 포크 가수들의 음반 제작에도 관여했다.

» ▷ 이장희(1973_그건 너), O.S.T(1974_별들의 고향), 강근식(1974_Rain Rain Rain), O.S.T(1975_바보들의 행진)(맨 위에서부터).

 

컨트리 기타 특유의 클린 톤과 더불어 퍼즈(fuzz)와 와와(wah wah) 등의 첨단 이펙트 기기를 이용한 강근식의 기타 사운드는 ‘오리엔트 사운드’의 핵심이었다(일렉트릭 피아노와 미니 무그 등 건반악기를 통해 전자 음향을 실험한 이호준의 연주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다룰 것이다. 참고로 이호준은 1980년대 조용필의 밴드인 ‘위대한 탄생’에서 활동한 바로 그 인물이다). 강근식의 기타 연주는 노래의 반주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선율과 리듬을 만들어 내면서 그 자체 독자적인 감정 표현 수단이 되었다. ‘그건 너’에서 이장희가 “그건 너!”하고 소리친 다음 “띠리리 디 띠리리 디”하는 멜로디 라인이나 ‘왜 불러’에서 송창식이 “왜애 불러” 하고 소리친 뒤 “짱”하고 터지는 굉음은 수많은 예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동방의 빛의 명연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별들의 고향>과 <바보들의 행진>의 사운드트랙 앨범이다. <별들의 고향>은 이장희가 부른 ‘한 소녀가 울고 있네’와 ‘한 잔의 추억’, <바보들의 행진>은 송창식의 ‘왜 불러’와 ‘고래사냥’을 앞세워 각각 1974년과 1975년 극장가를 석권하였다. 음악과 영상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음은 두 말하면 잔소리고 안 봐도 비디오다. 자신이 직접 작곡도 담당한 <별들의 고향 3>의 사운드트랙(1981)에서는 유일하게 자신의 노래를 남긴 일도 있다.

그렇지만 강근식 역시 1975년 12월의 대마초 파동으로 크나큰 곤욕을 치렀고, 그 뒤 실질적으로 대중음악계와 거리를 두어야 했다. 그 대신 그는 ‘CM송’을 제작하는 ‘강 프로’(강 프로덕션)를 직접 경영해 수많은 광고음악을 제작했다. 부라보콘, 바밤바, 칠성사이다, 조이너스, 해태껌 등이 그의 대표적 작품이다. 대마초 파동으로 인해 우리는 한 명의 음악인을 잃고 광고인 한 명을 얻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강 프로’는 1970년대 말~1980년대 초 ‘언더그라운드 음악인’들의 아지트 구실을 수행했다. 한때 조동진과 최성원이 강 프로에서 ‘직원’이나 ‘기사’로 근무했고 뒤에는 이영재와 강인원도 그랬다. 그러다가 가끔 동료와 후배 음악인들의 음반에 ‘우정출연’했다. 어니언스 출신의 이수영, 뒤늦게 솔로로 데뷔한 조동진, 이장희의 동생인 이승희의 음반 등 1979~1980년무렵에 발표된 음반들이 그것이다. 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전인권의 데뷔 음반의 한 면에서 편곡과 연주를 맡은 일도 있다. 1981년 숭의음악당에서 열린 조동진의 콘서트 무대에 오른 것이 마지막 공연이었다.

 

귀에 익은 ‘CM송’… 그가 다시 돌아온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내내 그는 광고인으로 열심히 살아갔고, 가끔 영화음악에도 손을 댔다. 그의 평생의 지음(知音)인 이장희는 1980년 이런저런 일로 미국으로 쫓기듯 이민을 가서 그곳에서 방송인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음악인이어야 했지만 광고인과 방송인이라는 낯선 삶을 살아간 두 사람이 다시 만나서 평생의 업적을 정리하는 작품을 만들어내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 바람이 불원간 실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최근 만난 강근식은 “광고회사는 정리하고 새로운 음악을 구상 중”이라고 말했다. 나처럼 그의 기타 소리와 더불어 10대의 성장기를 보낸 사람으로서 이보다 더 반가운 말은 없다.

 

신현준 | 대중음악평론가

[원문출처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9351.html ]

 

 

 

향수로만 남기엔 안타까운 ‘그건 너’
한국팝의사건·사고60년 (23) 강근식, 나현구, 이장희: 잊혀진 사람

지난해 가을 이장희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조영남의 ‘마지막 콘서트’에 게스트로 출연한 일이 있었다. ‘30년만에 무대에 오른 이장희’라는 식으로 떠들썩할 법도 했건만 의외로 조용히 지나가 버렸다. 물론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의 ‘반응’은 범상치 않았다. 1970년대 전반기 그의 대표곡인 ‘그건 너’와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두 곡이 연주되었을 때 스냅 사진처럼 1970년대의 특정 시점이 스쳐 지나갔던 것은 물론이다.

1973년 언젠가 이장희의 ‘그건 너’가 소리소문 없이 몰고 온 파장을 실감있게 표현하기는 힘들다. 그건 김민기나 한대수의 노래처럼 ‘지성의 사색’이라는 여과도 필요 없이 그냥 몸에 꽂히는 효과였다. 구어체의 생생한 가사, 필요할 때 터져 주는 후렴구, ‘음치’ 같지만 강렬한 가창법 등을 운운하는 것은 시대가 흐른 뒤의 맥빠지는 음악평론식 해설일 뿐이다. ‘반항적이고 퇴폐적’인 기운을 겉치레 없이 순전히 음악으로만 표현한 것은 이장희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이건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데 이장희의 작곡과 노래가 전부가 아니었다. 이장희를 ‘포크 가수’라고 부른다면 이 음악의 실체에 절반도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장희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분신과도 같았던 기타리스트 강근식이 없었다면 이장희도 없었다. ‘그건 너’의 후렴구를 다시 들어 보라. 이장희의 노래와 강근식의 기타는 마치 선창과 후창, 이른바 콜 앤 리스폰스(call and response)처럼 능숙하게 주고 받기를 반복한다. 사람의 목소리와 악기의 소리가 이렇게 잘 어우러지기 힘들다는 것은 음악을 조금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

연대 생물학과를 중퇴한 이장희와 홍대 조소과를 졸업한 강근식의 만남은 1960년대 후반의 ‘생음악 살롱가’에서 활동하던 듀엣 ‘이장희와 강근식’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이장희는 연대 재학시절 윤형주와 함께 ‘라이너스’라는 보컬 그룹으로 활동했고, 강근식은 ‘홍익 캄보’라는 그룹을 만들어 학내에서 활동했고, 그러다가 세시봉 그룹의 일원인 이상벽(!)의 소개로 운명적으로 만났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랴. 이장희도, 강근식도 잊혀진 마당에 말이다.

어쨌든 이장희와 강근식은 ‘한 잔의 추억’ ‘한 소녀가 울고 있네’ ‘나야 나’ 등으로 이어지는 로킹(rocking)한 리듬의 곡으로 이유없는 불만에 차 있던 젊은 애들(특히 남고생)의 꼭지를 돌게 만들었고,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촛불을 켜세요’, ‘잊혀진 사랑’ 등의 발라드로 여고생들의 가슴을 살랑거리게 만들었다. 10대 청춘 군상들이 시커멓거나 새하얀 것 아니면 입을 옷이 없었던 시절의 일이다. 이 모든 현상의 정점을 보여주는 사건은 1972년 12월 2일 드라마 센터와 1974년 4월 14일 이화여대 강당에서 열린 ‘이장희 리싸이틀’일 것이다.

이장희와 강근식보다 더 잊혀진 인물도 있다. 다름 아니라 이장희의 음반을 필두로 비로소 때깔이 좀 나는 앨범(LP)을 국수 뽑듯 말아 내던 나현구 사장이라는 이름이다. 오리엔트 프로덕션이라는 또하나의 전설적인 프로덕션이자 스튜디오를 통제했던 나현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프로듀서였다. 이장희를 비롯하여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이연실, 조동진, 양병집, 김의철, ‘현경과 영애’ 등 포크 계열의 가수들을 발굴하거나 스카우트하여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음반시장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주역이었다. 서울대학교 공대 출신으로 음반업계에서 보기 드문 대졸 경력을 가진 그의 활동은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맹숭맹숭한 말 이전에 ‘팩트’라도 알려져야 할 것이다.

그러니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신파조의 발라드로 개그 프로그램에서나 사용하는 몰역사적 문화적 수준에 대해서는 말도 하고 싶지 않다. 14집까지 발표되었던 컴필레이션 시리즈 ‘골든 포크 앨범(Golden Folk Album)’의 음원들이 주인이 바뀐 채 ‘가요골든히트’라는 이름의 편집 음반으로 선별적으로만 나오고 그나마 지금은 구하기도 힘든 업계의 현실에 대해서는 이야기도 꺼내고 싶지 않다.

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게 만들었던, 대마초 파동으로 불리는 ‘그때 그 사건’은 12월이 되면 정확히 30주년을 맞는다. 무슨 사건이냐고? 말하기도 싫다. 그런데 기념도 뭐도 아무 것도 없이 조용하다. 가수 데뷔 30주년 어쩌고 하는 공연은 많고, 심지어 인디 음악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도 있지만 정말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역사적 조명은 없다. 이렇게 계승되지 않고 당시를 경험한 사람들의 노스탤지어로만 남아 있는 ‘대중문화의 역사’라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출처:한겨레신문 10.20일자

 

 

 

 

80년도  중순경으로 넘어오니 재미있는 듀엣들이 생겨났다. '하사와 병장'  '논두렁 밭두렁'  '4월과 5월'  '현경과 영애'  '시인과 촌장"  바로 함춘호씨가 시인과 촌장의 멤버였었다고 하는데 사실 기억은 잘나지 않는다.

 

그의 기타실력도 빼어나다.

 

 

비틀즈의 Let it be 를 추가열이 노래부르고, 함춘호가 같이 연주합니다.

 

 

이광조씨의 "광화문 연가"를 재즈풍으로 편곡하여 만든 곡을 함춘호와 추가열이 기타로 연주하며

노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