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16. 18:54ㆍ여행이야기
오늘 2024년 2월 15일 오전 10경에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선생의 묘소에 가기 위해 충남 논산시 벌곡면 양산리 이곳에 도착했다. 네이버에 나온 주소를 내비에 무심코 넣었다가 이곳에서 약 2km 떨어진 곳으로 가서 헤매다가 다시 네이버를 검색하여 양산리 산35-11을 입력하여 간신히 입구에 도착한 것이다. 아직도 갈 길은 멀다.
묘소를 안내하는 안내 간판의 위치가 잘못되었다. 대다수 탐방객이 연산면 방향에서 황령재를 넘어올 것으로 보이는데 이 입간판이 차가 진행하는 반대 방향으로 서 있어서 이곳을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온 길이다. 벌곡면사무소에 이 같은 사실을 알리고 가능하면 반대편으로 옮겨달라고 민원을 냈다. 벌곡면사무소가 바로 코앞인데도 불구하고, 면사무소 직원 대부분이 신독재 김집 선생의 묘소에 대해 모르고 있어서 정말 놀라웠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 의하면 김집의 본관은 광산으로,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이다. 아버지는 사계 김장생이다. 1591년(선조 24) 진사로 합격하였고, 1610년(광해군 2)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를 보고 은퇴하여 아버지를 모시고, 고향인 충청남도 논산 지역에 은거하게 된다. 인조반정 뒤 다시 등용되어 부여현감·임피현령·지평·집의·공조참의 등을 두루 지냈으나 김자점(金自點) 등 공서파(功西派)가 집권하자 관직을 버리고 다시 낙향하였다.
효종 즉위 후 김상헌의 천거로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각한 김자점이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하여 정국이 어수선해지자 사임을 하고 낙향하였지만, 다시 대사헌과 좌찬성에 임명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경전연구와 수양에 힘쓰고 도를 즐기며 아버지 김장생의 예학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김집선생묘가 현재의 위치에 자리하게 된 일화가 전해진다. 김집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한 승려가 자신이 있는 고운사의 자리는 찾기 힘든 명당으로 그 자리에 김집의 유해를 모시라는 계시를 받고 왔다고 하며, 절을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이니 산소를 정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벌곡면 양산리 옛 고운사 절터 자리를 김집의 묘소로 정하였다고 한다.
공사 중인 비포장길을 올라가다 보니 삼거리가 나온다. 왼쪽으로는 '원불교삼동원'이라고 되어 있는데 오른쪽 '무궁화 추모 공원'방향으로 올라가야 한다.
임도를 만드는 것으로 보이는 비포장길을 힘겹게 오르니 내비게이션의 끝부분이 저 앞쪽으로 난 임도 방향을 가리킨다. 주변에 작업하는 중장비가 있었으나 사람이 없어서 물어볼 수도 없었다 김집 선생 묘가 능선에 있는 사진을 보았기에 그것을 기억하며, 큰 고민 없이 임도를 따라 올라갔다. 날씨도 흐린 데다가 바람도 을씨년스럽게 분다.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조심조심 올라가 길도 없는 곳에서 주위를 살피는데 무엇인가 바로 앞에서 후다닥 소리를 내면서 갈색의 큰 짐승이 벌떡 일어서면서 넓적한 엉덩이를 내 쪽으로 두고 냅다 앞으로 내달린다. 멧돼지인 줄 알았으나 다행히도 덩치가 큰 고라니였다.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주변을 한참이나 살폈으나 묘소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많은 탐방객이 다녀갔을 것인데 흔적이 없다. 갑자기 길을 잘못 들었다는 두려움이 밀려온다. 다시 차량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무언가에 홀려서 묘소를 찾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운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시켜서 주변을 살피다가 까만 오석으로 만든 김집 선생의 묘소 안내석을 찾았다.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그러면 그렇지! 왼쪽으로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 나온다.
저 앞쪽으로 큰 비석이 보인다. 김집 선생의 신도비다.
문경공(文敬公) 김집 선생의 신도비의 전면이다.
비문 제일 위쪽에 오른쪽에서 왼쪽을 경유하여 뒤쪽으로 돌아가면서 전서체로 '文敬公愼獨齋金先生神道碑銘 ; (문경공신독재김선생신도비명)'이라고 쓰여 있다.
이 신도비는 조선 효종 10년(1659년)에 세워졌는데 돈암서원 원정비(遯巖書院 院庭碑)처럼 비문(碑文)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이 글씨를 썼으며, 증손(曾孫) 김만기(金萬基)가 전서체 제목을 썼다고 한다. 우암과 동춘당은 신독재 선생의 아버지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의 제자이다.
https://blog.naver.com/mhdc/221837921333
신도비를 지나 가파른 산길을 70m 정도 왼쪽으로 굽어 올라가니 오른쪽으로 묘소의 아랫부분이 보인다.
묘소 입구에서 올라온 길을 되돌아본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신독재 김집 선생의 묘소에 천신만고 끝에 도착했다.
우백호 방향이다.
좌청룡 방향이다.
앞은 신독재 선생의 둘째 부인인 '덕수 이씨' 묘다.
신독재는 조선 중기의 문신 유홍(兪泓)의 딸을 정실로 맞았지만, 유 부인은 병약하여 부인으로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일찍 죽었다. 그래서 신독재의 아버지 사계 김장생의 스승인 율곡 이이(李珥) 첩의 딸, 서녀(庶女) 덕수 이씨(德水 李氏)를 소실로 들였는데 성품이 어질고, 정숙하여 신독재와 평생 해로하였다고 한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선생의 묘다. 아주 오래전에 어떤 신문에서 사진으로 본 기억이 있다. 그가 유언하길 자신의 묘는 봉분을 낮게 하고, 비석도 작게 세우라고 하였다는데 실제로 당시 흑백 사진도 봉분이 아주 낮고, 작은 비석이 서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비석은 옛 비석이되 봉분은 많이 높인 것 같다. 봉분을 그의 유언대로 낮게 했다면, 늘 혼자 있어도 마치 누군가 보고 있는 것처럼! 홀로임을 삼갔던(愼獨) 그래서 호(號)도 신독재(愼獨齋)로 하였던 김집 선생이 봉분이 높은 것보다 낮음으로 인해 후세에 더 큰 울림으로 남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https://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1405096
비석이 마치 철비(鐵碑)인 것 같이 붉은 색 녹물이 흘러내린 듯하다. 철분을 많이 함유한 돌을 사용해서 그렇지는 않을까? 많은 비석을 보았지만, 이런 자줏빛 색을 띠는 비석은 처음으로 신비한 느낌을 준다.
묘소 왼편에는 '文敬公愼獨齋金先生集之墓 (문경공신독재김선생집지묘)' 라고 쓰인 가첨석(加檐石•加簷石)이 없고, 양귀가 잘려진 소박한 비석이 있다.
글은 조선 중기의 문신 이유태(李惟泰)가 짓고, 글씨는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가 써서 1663년(현종 4년)에 건립하였다. 명재(明齋) 윤증(尹拯)의 고택은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번지에 있으며, 명재(明齋) 윤증(尹拯)은 현 윤석열 대통령의 9대조 '윤박(尹搏)'의 사촌동생이다. 그리고 우암 송시열은 '윤박(尹搏)'의 장인이다.
위키 백과에는 송시열, 송준길, 민정중, 민유중, 김수항, 김수흥, 김익훈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고, 송시열의 후대에서도 윤증, 박세당 등의 소론계 학맥으로 분화 계승되었다고 한다. 위로는 아버지 김장생과 이이, 성혼을 거쳐 조광조, 정몽주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성리학 학문을 이어받아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과 소론의 영수 윤증(尹拯) 등에게 전해주어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시켰으며 예학(禮學)을 체계화하였다. 이들은 사계 김장생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다가 나중에 그의 아들 신독재 김집을 스승으로 하면서 보통 김집을 스승님으로, 김장생은 노스승님, 큰 스승으로 불렀다.
요즘 세상에는 아무나 '선생'이다. 의사도 선생님이요! 간호사도 선생님이요! 학교 선생님도 선생님이요!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과거 급제한 사람이거나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거나 뛰어난 인물을 '선생'이란 호칭으로 높여 불렀다고 하는데 내가 기억해도 조선시대에 선생이란 호칭을 받은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다.
덕수 이씨 묘소 앞으로 물길을 막는 작은 둔덕을 인위적으로 조성했고, 그 오른쪽으로 경사가 지면서 마치 물길이 어렵게 돌아나가게 했다. 문인곤 풍수지리학 박사가 쓴 글에 보니 이렇게 만든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 이렇게 물길의 앞을 막아 우백호 쪽으로 좁게 내려가게 만들면, 물이 곧장 빠져나가지 않아 명당 내부의 생기(生氣)가 보존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일부 인용한다면,
'수구사(水口砂)'란 물이 흘러 나가는 곳의 양안(兩岸)의 산기슭에 있는 사(砂)를 말하며 작은 산이나 바위로 되어 있다. 사신사로 둘러싸인 보국내의 물은 혈처 앞을 돌아서 청룡과 백호가 마주보거나 안산과 마주보고 있는 사이로 빠져 나가는데 이곳을 수구(水口) 또는 파구(破口)라 한다.
수구에 수구사가 있으면 명당안의 물이 곧장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여 명당의 기운을 보전하는 역할을 한다. 물이 흘러 나갈때 수구가 꽉 닫힌 듯 좁혀져 천천히 흘러 나가야 명당내부의 생기가 보전된다.
수구사는 흘러가는 물길을 막아 유속을 느리게 하고 수구를 통해 외부로부터 불어 들어오는 바람을 막아 명당의 장풍기능을 좋게 한다.
https://life.g-enews.com/view.php?ud=201607200717366216532_3
마침 국순당 막걸리가 승용차에 있어서 이곳에 가져왔다.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이(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를 마음으로 새기면서 예를 갖췄다.
문인석(文人石)도 신독재 선생의 성품을 닮았는지 온화하고 기품 있게 서있는다.
묘소 옆의 소나무도 신독재 선생에게 절을 하는 듯하다.
산신에게 올리는 제단
누군가 이곳을 탐방하면서 오른쪽에 있는 문인석 건너편의 골짜기를 보고 '여근곡(女根谷)'이라며, 그 연유로 신독재의 자손이 번성하였다는 주장을 보면서 얼핏 보면 그렇기도 하고 아닌 듯도 하고, 그렇게 보는 것은 자유겠지만, 예학의 거두인 신독재 묘소에서 그것을 떠올리는 것은 예도 아닐 것이고, 불경스럽게 느껴진다.
신독재 묘소로 올라오다가 오른쪽에 있었던 다른 묘가 눈에 들어온다. 저곳은 어떤 이의 유택일까?
아래쪽에 있는 묘로 내려와서 신독재 김집 선생의 묘소를 보았다.
신독재 선생의 묘소에 용맥(龍脈)의 정기가 모인 자리, 즉 혈(穴)이 맺혔다가 떨어지는 자리가 가파르다.
https://blog.naver.com/mhdc/222279364967
처음 올라갈 때 신도비를 막 지나자, 오른쪽에 나타난 가파른 산에 있는 묘가 김집 선생의 묘소인가? 하였으나 사진상으로 보이는 형태가 아니고, 시멘트 길이 위로 더 포장이 되어 있어서 신독재 선생 묘소에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이곳에 들렀다.
위에 있는 묘가 김집 선생과 덕수 이씨 사이에서 낳은 아들 '김익형(金益炯)'의 묘의 묘비다.
김익형과 합장된 '창녕 조씨'의 묘비
김집 선생의 아들 김익형의 묘 아래에는 김집 선생의 손자인 '김만리(金萬里)'의 묘가 있다.
김집 선생의 손자 '김만리(金萬里)'의 묘소
김만리(金萬里) 의 묘비
내려가는 길이다.
왼쪽의 가파른 산 위에 신독재의 묘소가 있다. 어떤 영웅호걸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한국인의 95%는 죽음에 대한 준비 없이 죽음에 이른다고 한다. 나 같은 필부는 죽어서 아무런 이름도 없이 연기처럼 사라지겠지만, 두고두고 후대의 귀감이 되는 사람을 사후에라도 교감하기 위해 이런 발품을 팔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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