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프랭클린 북극 탐험대의 비극과 그들이 남긴 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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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피셔님의 블로그(http://blog.naver.com/bokyumirang?Redirect=Log&logNo=70006541647) 에서 옮겨왔다.

 

 

 

 

 

북극에서 잠들다 - 프랭클린 탐험대의 비극  

 

 2006/07/25 07:04

 

 

복사 http://blog.naver.com/bokyumirang/70006541647

 

 

 

 

Sir John Franklin

(출처: http://www.anbg.gov.au/biography/franklin.biography.html)

 

1845년 5월 19일 북서항로(Northwest Passage) 를 개척하기 위해 북극해로 향하는 129명의 탐험대를 태운 이리버스 호(HMS Erebus)와 테러 호 (HMS Terror)가 영국을 출발했다. 탐험은 영국 해군본부(Admirality)가 조직한 것이었으며, 수많은 장교와 사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탐험대를 이끄는  프랭클린( John Franklin: 1786생) 단장은  이미 60에 가까운 고령이기는 했지만 이미 몇차레의 호주탐험과 북극탐험을 성공적으로 이끈 노련한 탐험가였다. 이리버스와 테러호는 바람의 힘으로 항해하는 범선이기는 했어도, 온수 파이프로 가동되는 난방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고, 돛을 사용하기가 힘들때를 대비하여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스크류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2년으로 예정된 탐험기간을 대비하여 갓 발명된 3년분의 통조림 식량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승무원들의 지루함을 달래고 재교육을 위해서 총 3천여권에 이르는 장서를 갖추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대서양으로부터 캐나다 북쪽의 북극해를 거쳐 태평양으로 빠져나가는 북서항로를 개척하는데 부족함이 없이 보였다. 이 항로가 열린다면 아시아에 닿기 위해 희망봉을 돌아가는 유럽의 배들의 항로는 크게 단축된다.  그리고 이러한 항해경로의 단축이 대영제국의 식민지 경영에 획기적인 도움을 줄 것은 명백했다.

 

 

 

 

 

얼음바다를 항해하는 이리버스호와 테러호의 상상화

(출처: http://www.coolantarctica.com/Antarctica%20fact%20file/History/antarctic_ships/erebus_terror_antarctica.htm)

 

 

 이 두대의 탐험선은 7월 26일 그린란드와 캐나다 사이의 베핀 만(Baffin Bay)에서 몇대의 포경선에 최후로 목격되었고, 이후 2년간 전혀 소식을 알수가 없었다. 대규모의 실종이었지만, 이들의 식량이 3년분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해군본부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다가 3년이 지난후 2만 파운드의 보상금을 내걸고 프랭클린 탐험대의 행방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런 보상금 외에도 프랭클린 탐험대의 실종은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했기 떄문에 많은 탐험대가 이들을 찾아 북극해로 향했다. 역설적이게도 프랭클린 탐험대보다 많은 수의 인명이 이러한 추적작업에서 희생되었다.

 

 

  

Beechey Island의 프랭클린탐험대 무덤

(출처: http://www.resolutebay.com/)

 

1850년 여름이 되어서야 그들의 자취가 발견되기 시작했다.  북극해 열도의 비치섬 (Beechey Island) 에서 프랭클린 탐험대의 첫 겨울(1846년)에 발생한 3구의 사망자의 무덤이 발견된 것이다. 그들의 사인은 폐결핵으로 판명되었고, 더이상의 단서는 찾을수 없었다. 1854년,  허드슨 베이 회사(Hudson's Bay Company : 캐나다의 모피무역을 총괄하며 캐나다 북부의 많은 지역에서 사실상의 정부역할을 했음) 소속의 탐험가 존 라이(John Rae)가 부티아 반도(Boothia Peninsula)에서 한 이누이트(에스키모) 원주민으로부터 결정적인 단서를 얻었다. 그는 몇년전 30-40여명의 백인들이 백 강 (Back River) 근처에서 아사한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운 몇가지 물품을 라이에게 건네주었고, 이것은 프랭클린 탐험대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라이는 프랭클린 탐험대가 굶주림끝에 식인으로 연명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고했는데 , 이것은 영국해군 장병의 명예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되었다. 그 결과 라이는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당시 수많은 탐험가들에게 주어진 기사작위를 받지 못했다.)

 

 

 

John Rae ( 1813-1893)
(출처: http://northernblue.ca/cbirth/index.php?/categories/3-Exploration)

 

 

  라이의 보고를 듣고 프랭클린의 부인은 사재를 털어 맥클린턱(F. L. McClintock)이 이끄는 탐험대를 조직, 프랭클린 탐험대의 행방에 대한 더욱 상세한 정보를 추적하게 하였다. 1859년 맥클린턱은 킹 윌리엄 섬 (King William Island)에 쌓아논 돌무더기에서 프랭클린 탐험대의 부단장 크로지어(F.R. M. Crozier)가 남긴 메시지를 확인하였다. 그 메시지는 이리버스와 테러가 1846-47년 겨울을 유빙에 갖혀 보냈다는 것과 1847년 6월11일프랭클린이 사망했다는 것,. 그리고 1848년 4월 25일 유빙에 갖혀 항해가 불가능한 두 배를 포기하고 나머지 생존자 105명은 백 강으로 향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육로를 통해 남쪽으로 계속 전진하던중 추위와 굶주림에 모두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프랭클린 탐험대의 비극은 끝났다. 후에 발견된 시체를 검시한 결과 라이의 보고대로 식인행위도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프랭클린 탐험대의 메시지가 담긴 돌무더기

(출처: http://www.ri.net/tni2001/main10.23.01.htm)

 

 

 이러한 비참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프랭클린은 (후에 최초의 남극도달에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죽음을 맞이하고도 넬슨류의 영웅의 반열에 든 스콧처럼) 빅토리아 시대의 영웅이 되었고, 당시에는 미망인의 지속적인 영향력 때문에 실패의 원인 대한 본격적인 규명이나 고찰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최근에는 프랭클린 탐험대의 실패를 몇개의 복합된 원인이 결합시켜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프랭클린 탐험대는 최첨단의 항해장비를 갖추고 있었지만,  육상탐험을 위한 준비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탐험대원들이  배를 떠났을 경우는 거의 속수무책이었다.  프랭클린은 이전의 탐험에서부터  이누이트를 보잘것없이 생각했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거나 생존기술을 배우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둘째로  그당시의 북극해의 기온이 평소보다 더 내려가서 여름이 되어도 유빙이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비타민 C공급원인 라임주스가 빨리 상하여 선원들이 괴혈병에 시달렸고 , 당시로서는 새로운 발명품인 통조림을 밀봉하기 위해 사용된 땜질의 납이 음식에 흘러들어 승무원들의 건강과 사기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80년대 캐나다 알버타대의 연구팀이 프랭클린 탐험대의 사체를 부검한 결과 이들의 신체에서 정상치를 훨씬 초가하는 납성분이 검출되어 납중독이  실패의 주된 원인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했다.

  

 테러와 이리버스 호의 운명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이 있다. 북극해를 지나던 항공기가 빙산위에 있는 범선을 목격했는데, 이것이 이들중 하나라는 설이 있고, 또는 그린란드 부근 해역의 유빙군에서 목격된 범선이 이들중 하나라는 설이 있다. 어찌되었든지 이들은 한동안 유령선이 되어 북극해를 떠돌았음이 분명하다.

  

  이들이 발견하고자 한 북서항로는 결국 1850-1854년의 매클루어(R. McClure)탐험대가 최초로 횡단하였지만,  현재에도 북극해의 유빙과 나쁜 날씨때문에 상업적으로는 거의 이용되지 않는다.

 

 
 프랭클린 탐험대의 종말점
(출처: http://www.lordfranklin.com/German_Search.html)

 


 

 

 

 

* 심장이 약하신 분은 아래 동영상을 보지 마시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