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수(䞲秀)공원과 광저우 박물관

2014. 12. 3. 10:46여행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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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수공원'의 西門으로 추정되는데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월수공원은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빼어남을 뛰어넘는다" 가 맞을까?

 

 

越秀공원

 

광저우[广]에서 가장 먼저 생긴 공원으로서 일찍이 서한남월국(西)시기에는 명승지로 알려졌던 곳이다. 주봉()인 웨징강[] 및 주변의 구이화강[], 무마이강[], 위리강[] 등 7개의 작은 산과 베이슈[], 난슈[], 둥슈[] 등 3개의 인공호수로 조성되어있다. 이곳에는 전하이러우[], 명()나라 시기에 축조된 성벽, 사방의 포대, 중산기념비[] 등 각 역사시대의 유적들이 남아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웨슈궁위안[越秀公园 (월수공원)] (두산백과)

 

 

                           

                           올라갈 때는 이곳으로 올라갔다.

 

 

 

 

 

 

 

 

월수공원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이 거대한 탑은 중산(손문)기념비다.

 

 

 

                                        孫文(쑨원)

 

 

자는 일선()이고, 호는 중산()이다. 공화제 창시자로 국민정부시대에는 '국부()'로서 최고의 존경을 받았다. 광둥성[] 샹산[:현재의 ]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서당에 다니다가 14세 때 하와이에서 일하고 있는 형 쑨메이[]에게로 가서 호놀룰루의 신교계()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8세 때 귀국하여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전통과 신문화의 갈등으로 고향에서 쫓겨났다. 홍콩으로 이주하여 세례를 받고 광저우[]와 홍콩[]의 서의서원(西:의학교)을 졸업(1892)한 뒤 마카오·광저우 등에서 개업하였다.

광저우 의학교에서 삼합회()의 수령인 정스량[]과 알게 되었으며, 홍콩의 의학교 재학 때부터 혁명에 뜻을 두어 반청운동()에 가담했다. 중국을 서양과 같은 나라로 개혁하려 한 그는, 포르투갈 영지()인 마카오에서 쫓겨난 뒤부터 본격적인 혁명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 때 미국 하와이에서 흥중회()를 조직한 뒤 화교()들을 모아, 이듬해 10월 광저우에서 거병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 변발을 자르고 양복차림을 하기 시작하였다. 1896년 하와이를 거쳐 런던으로 갔으나 그곳에서 청국공사관에게 체포되고, 홍콩의 의학교 때 스승 J.캔틀리 등에 의해 구출되어 영문으로 《런던 피난기》를 발표하여 그의 이름과 중국 사정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영국에 머무르는 동안 견문을 넓힌 그는 삼민주의()를 구상하였다.

1897년 미국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미야사키 도텐[] 등 일본의 지사들과 사귀는 한편, 캉유웨이[] 등과의 제휴로 필리핀 독립원조를 꾀하였고, 1900년 제2차 거병(후이저우[]사건)을 시도하였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 뒤 1905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도쿄[]에서의 유학생 등 혁명세력을 통합하여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하고, 반청()무장봉기를 되풀이하였다.

1911년 10월 미국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신해혁명()의 발발 사실을 알고, 열강의 원조를 기대하며 유럽을 거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임시 대총통()에 추대된 그는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을 발족시켰으나, 청나라가 아직도 건재했기 때문에 이를 타도하기 위해 베이징을 정복할 북벌군을 조직해야만 했다. 얼마 후 북부의 군벌들과 타협하여 정권을 위안스카이[]에게 넘겨 주었다. 당시 타협은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공화제를 도입하기로 합의하였지만 위안스카이는 이를 어기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쑨원은 중국혁명동맹회를 개조하여 국민당을 설립하였고 위안스카이에 대항하였지만 무력에 밀려 폐퇴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사회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쑹자오런[]이 암살당한 것을 계기로 일어난 제2혁명이 실패하자, 또다시 일본으로 망명, 중화혁명당을 창설하고 군벌들이 얽혀 싸우는 틈에 호법운동()을 벌여, 광둥을 중심으로 정권수립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수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군벌 뒤에 제국주의가 있다는 것과, 인민들과 단결하여 반제() ·반군벌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1919년 5.4운동이 일어나자 중화혁명당의 대중성을 도입할 필요성을 느끼고 중국국민당으로 개조한 뒤, 공산당과 제휴(국공합작), 노동자 ·농민과의 결속을 꾀하였다. 그리고 국민혁명을 추진하기 위하여 장병을 양성하고 북벌을 준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혁명은 아직 이룩되지 않았다”는 유언을 남기고 1925년 3월 12일 베이징[]에서 간암으로 사망하였다. 1929년 그의 유해는 난징[] 교외의 중산릉[]에 묻혔다.

쑨원의 정치사상은 삼민주의로 대표되는데, 그것은 태평천국()의 혁명적 전통을 이어받고, 19세기의 자연과학(진화론)·프랑스의 혁명사상(인민주권설)과 영국의 사회학설(H.조지의 등)을 받아들여 중국 현실에 적응시킨 것이었다. 만년에는 연소()·용공()·농공부조()의 3대 정책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미연에 막으려는 ‘자본절제’와 토지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경자유전()’의 견해를 표명하여, 제국주의 단계의 후진국 혁명이론으로써 특권과 독점을 반대하는 삼민주의로 크게 발전시켰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임시정부를 지원한 공으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쑨원 [孫文] (두산백과)

 

 

 

 

 

 

 

 

 

성벽에 저렇게 매달려서 나무가 살고 있다. 나무의 생명력이 보통이 아니다. 중국인들도 저것이 신기한지 앞에서 기념사진을 많이 찍는다.

 

 

 

 

 

 

광저우에서 흔히 볼 수가 있는 기괴한 나무다. 위의 나무줄기에서 사람의 산발한 머리카락처럼 뿌리가 내려와서 다시 땅에 뿌리를 내린다. 척박한 땅에서나 통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 현상이 비가 많고 습도가 높은 비옥한 땅에서 저러는 것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월수공원 내에 있는 광저우 박물관이다. 겉모습을 보아도 오래된 박물관 냄새를 풍긴다. 그냥 공짜로 보여주면 좋으련만, 되놈들이 입장료를 요구한다.

 

 

 

 

 

 

입장료가 10위안이니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2,000원 쯤 된다.

 

 

 

 

 

주 전시공간인 5층 건물이다. 안에는 구석기, 신석기 유물부터 근대 유물까지 전시되어 있는데 왠지 별로 감흥이 나지 않아 주마간산 격으로 휘리릭 보고 내려왔다. 물론 사진도 없다.

 

 

 

 

 

 

 

저렇게 큰 화포를 가지고도 영국에 무릎을 꿇었단 말인가? 이 대포는 어떻게 움직였을지 자못 궁금했다. 어림짐작으로 약 5톤은 되어 보인다.

 

 

 

 

 

화포 안을 들여다 보니 강선이 있다. 제법 사거리가 길었다는 얘긴데

 

 

 

 

 

옆 부속건물에 진열된 청나라 4대 황제인 '강희제'시기의 청화자기이다. 이것은 마음에 들어 사진에 남긴다. 그의 치세에서 태평성대의 진수를 보여 주었다니 성군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고, 예술가를 존중했을  것이니 훌륭한 예술 문화가 꽃피워졌을 것이다. 

 

 

 

 

 

                         

                  박물관에서 바라다 보이는 손문 기념탑

 

 

 

 

 

                  

              박물관 5층 베란다(?)에서 보이는 광저우 시내

 

 

 

 

 

월수공원을 나서니 도로에 굵은 줄기에는 가시가 있고, 위에는 꽃이 핀 커다란 나무가 있어 이국적인 상황을 연출한다.

 

 

 

 

나무 이름을 아시는 분은 댓글로 나무이름을 알려주면 감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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