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10. 15:00ㆍ스크랩
'어릴 때부터 수많은 2차대전 영화를 보았지만 라이언일병구하기처럼 전투를 제대로 표현한 영화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독일군은 서서 사격하다가 적당히 총맞아 죽고, 미군은 기관총탄 빗발 속에서 트위스트를 추며 수류탄 던지는 영화가 대부분이었죠. 우리나라 영화 중에 2차대전을 무대로 한 것은 마이웨이가 처음일텐데, 소총 한 자루 그것도 한 발로 전투기를 떨구고 칼 하나 들고 전차를 오르내리던 무협극까지 있었죠.'
'아! Das Boot(특전 유보트)가 있었군요. 잠수함의 밀실공포가 실감났던 영화였습니다. U-571과는 차원이 다른 영화였죠.'
'언젠가는 유보트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었는데, 마침 손에 잡히는 자료도 있어서 유보트를 정리해보기로 했습니다. 2차대전 유보트의 활약은 다른 분들이 많이 정리했으니까 저는 1차대전으로 좀 더 거슬러 올라가보겠습니다.'
침묵의 살인자, 유보트
1차 세계대전에는 향후 전쟁의 판도를 바꿀 무기 4가지, 항공기, 전차, 기관총과 잠수함이 대대적으로 등장했다. 그 중에서 잠수함은 20년 후의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크게 바뀌지 않았을 정도의 첨단무기였다. 만약 1918년 당시의 항공기가 1940년대 초반의 것과 비슷했다면, 미군 조종사는 F4F 와일드캣 대신에 천을 씌운 VE-7 블루버드를 타고 태평양 항공에서 일본기와 격전을 벌였을 것이다.
잠수함은 수백 년 전부터 존재해왔다. 전세계의 발명가와 몽상가는 항공기, 달 로켓과 잠수함에 대한 꿈을 꿨고 초기 잠수함은 수면 바로 아래에서 천천히 직진만하는 배에 불과했다.
존 필립 홀랜드, 사진=위키미디어
홀랜드의 경쟁자였던 사이몬 레이크Simon Lake는 잠수함이 수평을 유지한 채로 잠수했다가 부상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1903년, 독일의 조선소에서 진정한 최초의 잠수함(Unterseeboot)의 뼈대가 놓이면서 독일 유보트의 신화가 태어났다. 그렇지만 유보트에 사용된 잠수추진용 전기모터, 충전배터리와 엔진구동 제너레이터, 날렵한 모양의 이중선체, 밸러스트 탱크Ballast Tank, 잠수와 부상용 날개, 공기추진 어뢰 등의 기술은 이미 널리 알려진 상태였고 이 모든 것을 제대로 조합한 것이 바로 독일유보트였다 .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독일은 다른 나라보다 처음부터 앞서갔다. 1906년에 배치시킨 U-1은 110년 전의 잠수함이라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제대로 된 잠수함이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50년 동안의 기술혁신을 거쳐, 독일의 첨단 내연기관 기술과 러시아 납품용 잠수함을 제작하던 크루프Krupp의 킬Kiel 조선소 시설이 만나면서 탄생할 수 있었다.
U-1은 프랑스 해양공학자 막심 로뵈프Maxime Laubeuf의 초기 디자인을 이용했다. 독일의 유명한 군수업체 크루프는 나중에 러시아 해군용 잠수함의 시제품을 만든 후에 로뵈프 디자인의 잠수함을 3대 판매했다. 해외에서 소형 잠수함을 주문하던 독일해군도 1904년에 U-1을 주문했다.
The German Submarine U 1, 사진=위키미디어
U-1은 수면에서는 200마력 엔진 2개(사진참조)로, 수면 아래에서는 2개의 충전배터리 동력의 100마력 전기모터로 움직였다.
그렇지만 폭뢰공격을 당하면 외부로 옮겨진 연료탱크의 연료가 새서 잠수함의 위치를 노출시키는 단점도 있었다.
U-1은 선수 어뢰관 하나와 3발의 어뢰(한 발은 어뢰관, 두 발은 재장전용)를 가지고 있었다. 무인 미니잠수함이라고 할 수 있는 어뢰는 크기는 작아도 상대적으로 큰 폭발력을 냈고 전함의 사거리 안에 들어가 근거리에서 공격했기 때문에 정확성도 매우 높았다.
22명의 승무원을 실은 U-1은 거의 30.5m까지 잠수할 수 있었다. 수면 항해속도는 최대 11노트 정도였고 순항 10노트로 1,500해리(약 2,775km)를 항해할 수 있었다. 잠수 항해속도는 최대 8.7노트로 알려져있으며 순항 5노트로 93km를 항해했다.
그리고 통제탑은 세계최고 수준의 잠망경을, 공격적인 부리모양의 선수는 어뢰발사관을 숨기고 있었다.
U-1은 혁신적인 기능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그 위력을 자랑할 기회가 없었다. 1900년대 초반의 잠수함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서 1차대전이 발발할 당시에는 이미 구식이 되었고 훈련용으로만 사용했다.
U9, 사진=위키미디어
그렇지만 U-1은 디젤엔진 잠수함의 원형이 되었고 직계인 U-9은 1914년 9월에 채 한 시간도 안되어서 3척의 영국 순양함을 격침시켰다. U-9은 2주 만에 넬슨제독이 평생의 해전에서 잃은 것보다도 더 많은 영국 해군을 죽였다.
핵잠수함은 모항을 떠나자 마자 잠수해서 몇 개월 동안 떠오르지 않아도 되지만, 1차대전부터 1950년대까지의 초기 잠수함은 필요한 경우에 잠수를 할 수 있다는 것뿐이지 작전기간 중 99%는 수면에서 지냈다. 공격하거나 숨을 때에만 잠수했는데 그것도 깊은 수심으로는 내려가지 못했는데 1944년이 되어 스노클을 수면위로 내놓고 흡기배기를 하게 되면서 잠수시간이 길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잠수함은 수면속도와 내항성능Seakeeing이 중요했다. 겨우 5노트의 속도로 넓은 지역을 순항하며 적의 상선을 찾아 다닐 수는 없었다. 그리고 독일은 잠수함을 날렵한 입담배 모양으로 만든다면 물결에 따라 위아래, 좌우로 요동을 쳐서 승무원이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통제탑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난간, 사다리, 마스트, 방수테두리Coaming(갑판승강구 주변의 침수를 막는 테두리)가 추가되었고 갑판에는 86mm~105mm의 포를 얹을 수 있는 고항력 나무갑판High-drag teak deck이 더해졌다. 1차대전 유보트는 높은 압력과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둥근 형태가 아니라 통제탑이 달린 어뢰정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다.
배터리 동력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유보트 선장은 목표물과 어뢰사정거리를 잘 계산한 후에 잠수할 타이밍과 위치를 결정해야 했다. 그래서 위험항로를 다니는 선박은 평상 시에도 지그재그로 항로를 자주 바꾸며 잠수함의 공격을 봉쇄했다.
한 번만 항로를 틀어도 유보트 선장이 고생스럽게 만들어낸 계산은 모두 수포가 되었다. 이렇게 계산이 틀어지면 수면 아래에서는 잠수함의 속도가 겨우 5~6노트에 불과했기 때문, 20노트로 순항하는 전함은 물론이고 10노트 속도의 상선을 따라잡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유보트는 수면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뒀다. 헐리웃 영화를 보면 폭뢰를 맞은 잠수함이 마지막 수단으로 수면에 떠올라 갑판포로 구축함을 상대하지만 그냥 영화의 과장일 뿐이고, 사실은 갑판포로 1차대전 당시의 주 목표물인 상선을 상대했는데 어뢰보다 훨씬 경제적이고 효과적이었다. 어느 함장도 몇 발 없는 귀중한 어뢰를 작은 상선에게 쏘고 싶어하지 않았다.
가장 유명한 유보트는 도이칠란트Deutschland였는데 세계최초의 비무장 잠수수송선이었기 때문에 U-번호 체계보다는 도이칠란트로 불렸다. 길이 65m, 폭 8.9m, 배수량 2,272톤의 미니 제플린(독일의 대륙간 비행선)이었다.
1916년, 도이칠란트는 미국을 2번 (볼티모어와 뉴 런던) 방문했고 미국으로 귀한 화학물과 염료를 가져가고 니켈, 구리, 고무와 같은 전략물자를 가져왔다.
영국은 북대서양 봉쇄로 독일에게 큰 피해를 주었는데 도이칠란트가 수면 16노트의 속도로 운항하다가 봉쇄망을 만나면 잠수해 통과했다. 그리고 영국해군이 미국 동부해안에 펼쳐놓은 경계망도 무사히 피했다.
독일은 도이칠란트를 U-155로 개명하고 6척의 자매함과 함께 장거리 상선습격 작전에 투입했다. ('도이칠란트는 15cm 갑판포를 장착하고 있어서 상선에게는 저승사자와 같았습니다. 잠수거리 1,000km를 돌파했고 42척을 침몰시키는 대활약을 했습니다. 전후 영국으로 옮겨져서 전시되다가 1921년에 폐기처분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서 5명의 인부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U-53도 1916년 가을에 미국의 뉴포트Newport 항을 방문했다. 10월 8일, 미군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항구를 빠져 나오자 마자 5척(영국 3, 노르웨이 1, 네덜란드 1)의 연합군 선박을 격침시켰다. 모두 국제수역에서, 등대선 낸터킷Nantucket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UC5, 사진=위키미디어
('UC1~UC15까지 모든 수뢰전용 잠수함이 침몰하거나 노획당했습니다. 수뢰를 많이 싣기 위해 어떤 무기도 장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UC-11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는 수뢰가 유일한 공격수단이었습니다. 수뢰를 설치하기 위해 연근해 작전을 주로 하다 보니 좌초하기 쉬웠고, 이미 설치된 수뢰를 건드리는 사고가 잦았습니다. 그리고 UC-12는 튜브로 내보내기 전에 수뢰신관이 동작하는 바람에 자폭했고, 마지막으로 만들어진 UC-15는 원인불명으로 실종되었습니다.')
1차대전 유보트는 모든 면에서 우수했지만 미국 잠수함에 비해 승무원 공간이 부족했다.
1950년대 초반 배치된 미국 핵잠수함의 통로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제 체격이 크기는 해도 잠수함 실내가 어느 정도로 협소한 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U-35는 224척, 총 50만 톤의 격침시켰는데 대부분이 갑판포로 격침시켰다. 출항 때마다 평균 9척의 전과를 올려서 1/2차대전 전체에서 가장 화려한 전과를 남겼다.
독일이 1915년에 일방적으로 무제한 잠수함전을 시작하면서 침묵의 살인자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 지를 실감하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상선이 군수물자를 운반하고 있다는 증거가 확실한 경우에만 공격했고 그 경우에도 민간인 승무원은 구조한다는 국제조약을 따랐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해양 전문가는 잠수함의 공간이 너무 부족해서 상선을 공격하기에 부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잠수함은 격침시킨 상선의 포로를 싣거나 노획한 상선을 모항으로 끌고 갈 방법이 없었다.
영국이 해상봉쇄로 독일을 고사시키고 있었고 독일해군은 일반전력으로는 봉쇄망을 뚫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영국을 오가는 상선을 무차별 공격해 맞대응하기로 했다.
더구나 영국해군은 중무장한 Q 무장상선(위장상선)을 대거 도입하면서 독일은 상선이라고 해도 함부로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없었고 전쟁지역에 들어선 모든 선박을 격침시키겠다는 경고를 했다.
영국은 심한 충격을 받았다. 해상봉쇄로 적을 고사시키기는커녕 자신이 익사할 판이었다. 전통적인 해상강국 영국은 잠수함을 야비한 전쟁수단이라며 혐오했다. 1914년, 한 제독은 “전세계의 어떤 나라도 이렇게 악랄하고 야비한 전쟁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약간의 시간만 더 있었다면 독일의 유보트는 영국의 모든 것을 마비시키며 휴전협상장으로 끌어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휴전협상장 초대장대신에 미국을 유럽전장으로 초대해서 독일 제2 제국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었다.
미국의 참전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다. 1915년 5월 7일, U-20이 영국 여객선RMS 루시타니아Lusitania를 공격해서 미국인 120명을 포함한 1,200명을 죽였고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이것을 계기로 참전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져있다.
RMS Luisitania호, 사진=위키미디어
치머만 암호 전보, 사진=위키미디어
멕시코가 미국을 공격해 발을 묶어두면 독일이 영국과 평화협상을 끝내고 멕시코를 도와 아리조나, 뉴 멕시코, 텍사스 등을 회복할 수 있게 돕겠다는 제안이었다. 치머만의 계획은 국제정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망상에 불과했다.
유명한 전사학자 토마스 패리시Thomas Parrish는 저서 잠수함The Submarine에서 멕시코가 텍사스를 합병하는 일은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베트를 처녀로 되돌려 놓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다시 잠수함 이야기로 돌아가서, 결국 영국은 황금을 싣고 중남미에서 돌아오던 스페인 상선이 조상(해적)을 상대로 수송선단을 꾸려 대응했듯이, 이제는 입장을 바꿔 수송선단으로 잠수함 공격에 대응했다.
처음에는 수송선단 편성이 자살행위처럼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잠수함이 기다리고 있는 해역에 일부러 선단을 몰아넣느냐는 반대가 많았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미국과 영국 사이에 흩어진 30척을 찾는 것보다 대서양에서 30척으로 구성된 선단을 찾는 것이 더 어려웠고 안전했다.
그리고 수송선단은 유보트에게 많은 부담을 안겨주었다. 대전과에 흥분한 함장은 어뢰를 남발하다가 호위함에 노출되기 쉬웠다. 수송선단을 편성하면서 이전보다 피해가 90%나 줄었고 미국이 참전하기 전에 영국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던 독일의 꿈은 사라졌다.
1919년 종전 후, 미국도 해군의 주도로 S 클래스를 처음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에스보트는 그렇게 좋은 성능은 아니었지만 노획한 유보트를 리버스 엔지니어링하면서 크게 달라졌다. 1927년, 해군 엔지니어링국은 “독일의 관행을 따르지 않아 처음에는 난관을 겪었는데 독일방식대을 그대로 따르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말했다.
1928년, 미해군이 차세대 잠수함을 개발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10년이나 지난 U-135를 원형으로 사용했다. 미국은 어쩔 수 없이 가토Gato급 잠수함 전대를 이끌고 2차대전에 참전했는데 마치 1939년에 노획한 메셔슈미트 BF 109를 10년 후인 1949년에도 차세대 전투기 원형으로 사용하는 꼴이었다.
독일이 최소한 바다 밑에서는 세계 제일이었다는 증거인 셈이다.
[원문 출처 : http://bigs.mk.co.kr/view.php?no=1532265&year=2014]
'유 보트'의 엔진룸에는 2개의 디젤 8기통 엔진이 장착되어있다. 독일 차들을 보듯이 기계에서는 세계 제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다.
독일 'MAN'엔진은 지금도 여러 곳에서 잘 사용한다. 고속과 저속의 움직임이 부드럽고, 저렇게 민첩하였으니 연합군들이 쩔쩔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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