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12. 10:59ㆍ스크랩
[MBN 화면캡처]
감(깜)도 되지 않는 자들이 어쭙잖은 대통령병에 걸려서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니 나라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런 자들이 대통령이라면 나는 세계 대통령이다. 길손이 존경해 마지않던 강영훈 총리님이 서거하셨다. 군과 행정부, 외교관, 학자, 정치인을 경험한 근자에 보기가 드문 큰 인물이었다. 그는 분명 대통령감이었지만, 고향이 이북이어서 대통령후보 자체가 불가능(?)하였던 것은 아닐까? 당시에는 군부에서 반대한다는 설도 있었다.
남북 총리회담 당시에 총리 일행과 같이 평양에 갔던 어느 언론인의 글이 문득 생각난다. 그는 강영훈 총리와 함께 김일성을 만나려고 주석궁을 갔었는데 긴 대리석 복도 끝에서 강영훈 총리를 맞으려고 나온 김일성이가 만면에 웃음기를 띠고 서있었는데 그 순간 기자는 긴 복도를 걸어가면서 주변 분위기에 압도되어 순간적으로 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고 넋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고 한다. 회담장 안에 들어가서 강영훈 총리를 보니 당당하게 김일성에게 노태우 대통령(?)의 안부 인사를 전하고, 또박또박 말씀하는 것을 보면서 대단한 배포를 지닌 분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요즘 같은 난세에 강영훈 총리 같으신 분이 나타날 수는 없을까?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나라에는 이젠 그런 사람이 없다. 어떻게 5,000만 인구에 그렇게 옳은 대통령감이 되는 사람이 없을까? 이러다가 미국 꼴 나겠다.
분단 45년만에 총리회담 주역 강영훈 전 총리 별세…軍·외교관·정치인으로 평생 봉직
"파란만장한 역정이 나만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민본, 민족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사상은 주관과 신념을 갖고 살아가도록 내 한평생을 확고히 바쳐주었습니다."
제21대 국무총리를 지내며 민주주의 발전과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한 강영훈 전 총리가 10일 오후 3시 7분 입원 중이던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95세.
강 전 총리는 2008년 펴낸 회고록 '나라를 사랑한 벽창우'에서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압축했다.
그의 고향 평안북도 창성군은 고집 세고 힘 좋은 벽창우(碧昌牛)의 본고장이다. 군, 외교, 정치, 행정을 두루 거치면서 한국 현대사의 굴곡 속에서 신념의 길을 걸어와 그에게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1921년 평안북도 창성군 청산면 청룡동에서 부친 강병헌(姜炳憲)과 모친 이병희(李炳姬)의 4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로부터 직접 한학 수업을 받고 서당에 다니다가 열 살 때 청산보통학교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웠다.
이어 영변농업학교에 다니다 일본 히로시마에 있는 다카다중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고, 이후 만주 건국대에 진학해 경제학을 전공했다. 본과 2년 재학 중 학병으로 일본군에 징집되었다가 1945년 광복 후 귀국했다.
1946년 월남해 국군에 입대한 뒤 국방 인사행정 전문가로 활약했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으로 미국으로 가서 공산 세력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한국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육사 교장 재직 중이던 1961년 육사생도의 군사혁명 지지 시가 행진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반혁명분자'로 찍혀 수감됐다가 중장으로 예편당하기도 했다.
미국 유학을 떠나 남가주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워싱턴에 한국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계간지 '저널 오브 코리안 어페어스(Journal of Korean Affairs)'를 발간하기도 했다.
귀국한 뒤 한국외국어대 대학원장을 거쳐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전두환정부 들어서 영국과 로마교황청 대사를 지낸 그는 노태우정부 시절 국무총리(1988~1990)를 지냈다. 1990년 9월 4일, 분단 45년 만에 최초로 남북 총리회담을 성사시켜 남북 화해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특히 1990년 10월 평양에서 열렸던 2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났을 때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우리 국민 감정을 고려해 나는 김 주석에 대한 호칭을 주석 또는 주석님 정도로 하고 각하란 호칭을 안 쓰기로 작심했다. 하지만 대화 도중에 김 주석이 뜻밖에도 내게 '강영훈 총리 각하'라고 하는 바람에 나도 '주석 각하'라는 호칭을 썼다. 상대가 그렇게 호탕하게 나오는데 나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옹졸한 처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또 성수대교 붕괴 사고(1994년), 서울 마포 가스 폭발 사고(1994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1995년) 등 대형 재난 발생 시 긴급구호활동도 전개했다. 이어 사할린 거주 해외 동포 영주 귀국사업 등 인도주의 발전을 위해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7년간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맡아 민간의 대북 지원 사업을 주도하기도 했다. 청렴하고 강직한 이미지로 각인돼 있는 그는 유엔 환경계획 한국위원회 총재와 각종 사회단체 고문 등을 맡아 활발하게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반대 운동에 나서는 등 사회 원로로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저서로는 '한 외교관의 영국 이야기' '소련견제이론' '한국통일문제'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등이 있다.
부인 김효수 씨와 사이에 형제 변호사인 장남 성용 씨, 차남 효영 씨, 장녀 혜연 씨 등 2남1녀를 뒀다.
한편 장례 절차는 김성주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정원식 전 총재,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장례위원장을 맡아 사회장으로 진행된다.
[출처 : 매일경제 - 박의명 기자]
'스크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서남북] 경주 지진, 無知가 쌓아올린 공포의 탑 (0) | 2016.09.23 |
---|---|
'고위공직자 비리수사처'를 설치해야 할 때가 무르익었다. (0) | 2016.07.19 |
"내 문학의 고향, 범어천 보름달에 위로받은 어머니의 詩心" (0) | 2016.04.25 |
심근경색 치료할 유전자 발견 (0) | 2016.03.31 |
[최보식이 만난 사람] "난 '얼굴 마담' 노릇 절대 안 해… 黨의 생리에 맞출 생각도 없고" (0) | 2016.02.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