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꿈을 가졌던 자리에서, 그러나 차떼기로 몰락하고~

2016. 5. 22. 11:51여행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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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충남 천안시 병천면에 있는 '옛 신한국당 연수원'이다. 1919년 3월 1일 대한 독립만세를 외쳤던 유관순 열사의 생가와 가까운 곳이고, 일제의 압제에 맞서 대한 독립만세를 처절하게 불렀던 아우내 장터가 지척에 있다.

 

 

 

 

상봉산 자락에 자리잡은 구 신한국당 연수원은 권력을 최대한 누리고자 했을 권력자들이 최고의 입지조건에 풍수지리적으로도 권세가 100년은 갈 그런 곳을 찾았을 것이고, 급기야 이곳을 그런 최적지로 점지하고, 택했을 것이다.

 

 

 

 

후생관 왼쪽에 있는 향나무는 7,000만 원을 홋가한다고 한다.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하고자 집권당의 유력정치인들과 당료, 당원들이 밤낮으로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았을 그네들의 숙소는 복도가 넓고 내부도 시원하게 넓다.

 

 

 

 

이 향나무도 수령이 100년을 넘긴 것이다.

 

 

 

  

후생관도 많은 식수 인원을 소화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왼쪽의 느티나무는 3억 원이 호가한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그나저나 차떼기당이라 매도 되었던 신한국당에서 저 느티나무를 돈주고 사왔을 리는 없고, 준조세 성격으로 어떤 기업에서 알아서 기증(?)하였으리라고 본다.

 

 

 

 

본관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그가 주창하였던 '세계화'를 이룩하고자 '세계화의 산실'이라는 휘호가 새겨진 표지석이 앞으로 3년 후에 일어날 정권교체와 더불어 신한국당이 어떤 운명을 맞을지 알지 못하고, 1996년에 세워졌다.

 

 

 

 

막대한 정치자금을 불법적으로 끌어모았지만, 결국 대선에 패한 뒤에 차떼기 당이란 오명을 역사 앞에 뒤집어쓰고, 와신상담의 시간으로 침잠하였던 오욕의 세월을 그들은 예견이나 하였을까? 여의도 당사와 이곳 연수원을 국가에 헌납하고, 천막당사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 굴욕의 역사를 이 건물은 기억한다.

 

 

 

 

외진 곳에 자리한 당시 이곳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혹시 최고 권력자가 몰래 이곳에 와서 유력정치인들과 야밤에 연회를 연 장소는 아닐까? 어디선가 깔깔대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지금은 그 깔깔대던 웃음도 안개와 같이 잦아지고, 적막강산만 남은 그곳엔 혹시 어떤 신비스런 힘들이 모여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근처에 관세청 순직직원들의 추모공원까지 있어서 밤에는 불 끄진 이 건물 근처에 머무는 것조차도 큰 용기가 필요할 듯하다.

 

 

 

 

 

 

1975년 8월 5일 보석 밀수조직의 보스인 여수 토박이 허봉용과 그 일당을 수사하던 '서정휴'라는 직원이 자신이 취조를 하던 밀수꾼 피의자의 아들이 휘두른 칼에 안타깝게도 절명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의 손엔 당시에 지급되었던 실탄이 든 권총이 있었음에도 청년을 제압하지 못하고, 그의 칼에 쓰러졌으니 참 안타깝다. 그냥 총을 쏘고 말지 왜 그렇게 허무하게 당했을까? 당시 여수 지역에서 일어나는 범죄의 심각성을 인식한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관계기관에 특명을 내려서 여수지역 밀수폭력조직이 전멸하였다는 전설이 회자되고 있다. 특히 허봉용은 당시 고문 후유증으로 폐인이 되다시피 살다가 일찍 세상을 등졌다고 전해지는데 야설에 의하면 그는 원래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자유당 때 잠깐 여수세관에 몸을 담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일로 세관직원들과의 교분을 내세워 능력은 별로 없었으나 주변 밀수꾼들의 신뢰를 얻으면서 소위 밀수 왕초로 벼락 출세(?)하였다는 얘기가 있다.

 

 

        1975년 9월 13일자 허봉용 관련 경향신문 기사

 

        

1975년 12월 4일자 허봉용 관련 경향신문 기사

 

 

 

 

 

 

2009년 5월 5일 파이낸셜 뉴스는 '여수  밀수사건'을 이렇게 묘사했다.

 

오래 전부터 남해안은 자타가 공인하는 황금어장으로 수산업이 발달한 곳이고 그 중심에 여수가 자리해 일거리와 돈이 흔했다. 그래서 ‘여수 가서 돈자랑 하지 마라’는 말이 회자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곳에서 수산업 호황은 있어도 수산업으로 떼돈을 벌었다는 갑부는 적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이 말이 밀수에서 나왔을 거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지난 1975년 국내 10대 뉴스에 밀수사건이 하나 포함돼 있었다. 바로 ‘여수 밀수사건’으로 일명 ‘허봉용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한때 여수시민은 자존심이 상하고 분노했다. 당시 밀수가 어디 여수에서만 있었던 일이던가. 부산을 비롯해 충무(지금의 통영), 마산, 목포 등 남해안 대부분의 항구도 밀수가 성행했다. 그러나 여수에 제일 먼저 밀수꾼 검거 불똥이 튀도록 한 그럴만한 사건이 하나 터졌다. 바로 밀수꾼 아들이 지난 1975년 8월 5일 여수세관 수사직원을 살해한 것이다.

그로부터 1개월 후인 9월 11일 당시 김치열 검찰총장은 남해안 일대 해상밀수조직에 대한 일망타진을 전국 검찰에 지시했다. 그러나 이미 여수는 나흘 전부터 대검찰청 특수1과장 김병리 검사가 이끄는 일단의 수사팀이 여수시 수정동 여수신항의 여수세관에 ‘여수지구 밀수폭력특별수사본부’를 설치, 본격적인 수사에 들어간 상태였다.

수사반은 그해 9월 12일 1차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동안 여수항을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밀수해 온 5∼6개파 40여명의 계보를 파악하고 1차로 속칭 갈매기파 두목 박동화 등 4명을 관세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여수의 밀수조직은 자유당 때부터 뿌리박은 조직밀수꾼으로 소위 일본 쓰시마(대마도) 이즈하라특공대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수사반은 밀수조직의 총두목격인 허봉용 등 10여명의 두목급과 운반담당 18명, 브로커 12명 등 40명을 수배 선상에 올렸다.

드디어 9월 22일 허봉용을 비롯한 5개파 밀수두목 4명 등 모두 82명을 구속하는 선에서 1차 수사가 종료되고 순천지청장을 단장으로 하는 새로운 합동수사반을 편성, 종전의 임무를 수행했다. 밀수 비호세력인 공무원에 대해서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는 비난여론에 따라 칼날이 공무원을 향한 것이다.

 

2차 수사가 착수된 것. 결국 현직 경찰서장을 비롯해 10명의 공무원이 구속되고 경찰과 세관직원 167명이 교체되는 초유의 인사파문을 낳았다.

이렇게 해서 약 2개월 가까이 진행된 여수 밀수사건은 막을 내렸다. 여수반란사건 이후 최대의 사건이라 할 정도로 여파가 컸다.

/이용득 부산세관박물관장

 

 

 

 

 

 

 

 

서정휴 세관원의 죽음에 대해 또 이런 글도 있다.

1975.8.5. 어느 세관원의 죽음

1975년 8월 5일 저녁 여수 세관 마당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전날 세관은 밀수선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배를 수색하고 선주를 연행했다. 세관원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것은 선주의 아들들이었다. 선주의 아들들은 밀수품이 배에서 나오지 않았는데다 (밀수품은 후일 육지에서 발견됐다) 조사 도중 아버지가 구타당했다면서 항의했고 서른 네 살의 세관원 서정휴는 그런 적 없다고 맞서면서 한 마디를 던졌다. "나는 나라와 세관을 위해 임무를 다하고 있는 거 뿐입니다."

 

그러자 아들 중 한 명이 칼을 꺼냈다. "세관 위해 목숨 한 번 걸어 볼래?" 형제는 서정휴에게 살기등등하여 다가섰고 서정휴는 권총을 뺐다. 모두 다섯 발의 총을 쐈지만 허공을 향해 쐈을 뿐 차마 사람을 쏘지 못했던 그에게 선주의 아들 형제는 사정없이 칼을 휘두른 후 도주한다. 서정휴는 억지로 일어나 병원에 가려고 세관을 나왔지만 피칠갑을 한 그를 택시들이 태워 주지 않아 속절없이 피만 흘린 끝에 뒤늦게 병원으로 후송됐지만 과다 출혈로 사망한다. 서울대 문리대에 합격하고도 집안 형편 때문에 진학하지 못했던, 부산 마산과 더불어 밀수 천국으로 불리던 고장에서 밀수범들과 정면으로 맞섰던 청년 공무원이 사위는 순간이었다. 그날은 그의 둘째 딸의 생일이었다.

 

1970년대 남해안에서 쥐치나 기타 해조류를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던 활어선 가운데 어떤 배들은 선원들에게 월급을 거의 지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운항은 그칠 줄을 몰랐다. 당연하게도 그 비결은 밀수였다. 활어선 어창 밑에는 물고기 대신 일본 가전제품이나 오토바이 부품들이 그득 들어있는 일이 흔했다. 활어수출선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던 곳이 섬 많고 해안선 복잡하여 밀수항으로는 최적지라 일컬어지던 여수였다.

순천 가서 인물자랑 말고 벌교 가서 주먹 자랑 말고 여수 가서 돈자랑하지 말라는 말은 해방 이전부터 있었지만 이즈음처럼 그 실감이 진한 적은 드물었다. 폭력 조직과 결부된 밀수 조직이 지역 경제를 좌지우지했고 인구 13만 가운데 4만 명이 밀수와 관련해서 먹고 살고 있다는 과장섞인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밀수 자체에 대한 죄의식도 엷어질 수 밖에 없었다. 여수 시민 600명이 서정휴 살해범들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는 진정서를 냈던 사실은 그 슬픈 단면이다. 


마침내 박정희의 유신 정권은 서정휴 사건을 계기로 '여순 사건 이후 최대'의 공권력을 발동하고 남해안 일대에서는 밀수와의 전쟁이 펼쳐진다. 수없는 사람들이 특명감찰반 수사본부에 끌려와서 시멘트 바닥에 하루 종일 꿇어앉았다가 수사관의 발길질에 채이고 뺨을 맞았다. 이후 계속된 수사 속에 부산의 밀수왕 허봉용도 체포되고 전직 경찰이 포함된 밀수 조직의 두목들과 현직 경찰서장 이하 밀수꾼들을 비호하던 공무원들이 줄줄이 쇠고랑을 찼다. 남해안 일대를 뒤덮던 밀수의 그림자는 이후 그 어둠의 기세를 누그러뜨리게 된다.

 

밀수 근절에 헌신적이었던 한 공무원의 죽음이 일으킨 바람은 태풍이 되어 남해안을 강타했다. 지금은 그렇게 가깝게 들리지 않지만 한때 밀수는 우리 삶과 떨어질 수 없었던 일상이었다. IMF 때 벌어진 금모으기 운동을 기억해 보자. 그때 전국에서 국민들이 내놓은 금의 총량은 227톤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금 산출량은 1.5톤을 넘을까 말까이고 200톤을 수입한 적도 없다. 태반이 밀수품이었다는 이야기다. 우리 아이의 돌반지, 물려받은 금가락지가 어느 밀수꾼이 항문 속 에 숨겨 들여왔던 금괴의 잔해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남대문 시장 도깨비 시장을 메웠던 번쩍이는 일제 물건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고 말이다.

이렇듯 밀수는 우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하지만 가려진 역사의 한페이지였다. 천하의 삼성도 사카린 밀수범이었고, 박정희 역시 장준하로부터 "밀수 왕초"라는 말을 듣고 펄펄 뛰지 않았던가 . 1975년 오늘 한 세관원은 그 어둠의 꼬리와 싸우다가 관청 안에서 칼을 맞고 죽었다 .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788 

 

우리에게도 ‘밀수의 역사’가 있었다, 남대문 시장에서 여수 앞바다까지 - 시사IN

1997년,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는 외환위기가 터진 직후 한국에는 금모으기 운동이 그야말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 “국난 극복이 취미”라는 우스갯소리에 걸맞은 국민들은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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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고인이 마지막으로 뛰어들었던 문제의 밀수선 제7 삼양호

 

 

 

추모공원에는 조각작품도 설치되었고,

 

 

 

 

땅을 무시로 파헤치고 다니는 두더지를 잡기 위해 설치했을 것으로 보이는 덫도 보이고,

 

 

 

 

용도가 불분명한 기계부품도 한몫한다. 순직한 직원 중에는 바다에서 침몰하는 감시정(監視艇)에서 미처 빠지나오지 못하고, 순직한 직원들도 있었으니 누군가 선박부품을 가져다가 그들의 넋을 위로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이곳에는 뒷산에서 내려온 고라니가 울타리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연수원을 배회하는 녀석이 있는데 그놈도 아침에 이곳에서 조깅을 한 듯하다.

 

 

 

 

운동장 주변을 산책하고, 상봉산 정자를 향해 올라가는 중이다.

 

 

 

 

이미 남부지방에서는 철이 지난 아카시아꽃이 길손을 반긴다.

 

 

 

 

'상봉정'이 보인다.

 

 

 

 

밑으로 연수원 일부와 대운동장이 보인다.

 

 

 

 

오른쪽 멀리 상록리조트가 보인다.

 

 

 

 

오른쪽 밑으로는 한국기술교육대학교 제1켐퍼스도 있고,

 

 

 

상봉정 앞에는 누군가 새벽을 알리기 위한 징이 설치되었지만,

 

 

 

 

징은 누가 얼마나 세게 친 것인지 깨져서 볼품이 없다.

 

 

 

 

새벽 5시에 나선 길손은 이곳에서 6시 15분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