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 고택(古宅)

2016. 10. 18. 15:08여행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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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손의 본관은 光山이다. 광산 김씨의 시조는 신라 제45대 신무왕의 셋째 아들인 김흥광(金興光)이다. 그는 난을 피해 전남 담양 대전면 평장동에 가서 살았기 때문에 본이 '광산'이다. 길손은 처가가 논산 상월이기에 연산을 자주 지나다녔지만, 계룡시 두마면에 있는 이 고택을 찾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길손은 양간공파이지만 '사계 고택'이라는 현판을 보면서 옷깃을 여민다.

 

 

 

 

'사계 김장생' 선생은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선생과 함께 동국(동방) 18현으로 부자지간에 문묘에 배향되었는데 이는 광산 김씨의 자랑이다. 조선시대에 총 265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인 광산 김씨(光山 金氏)는 달성서씨(達成徐氏), 연안이씨(延安李氏)와 함께 조선 3대 명문에 속하는 집안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문중 중에서도 광산 김씨를 흔히 광김(光金)이라고도 하는데 3대명문이라고 하면 광김의 사계 김장생,달성 서씨의 약봉(藥峰) 서성(徐省), 연안 이씨의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가문을 가장 명문으로 꼽는다고 한다.

 

 

 

 

 

 

 

대문을 들어서니 맞은 편으로 본채인 '은농재(隱農齋)가 보인다.

 

 

 

 

 

 

 

들어서면서 오른쪽 대문과 붙어있는 이 건물은 사계 기념관이다. '은농재'에는 기념관이 3개가 있는데 이곳은 '체험관'으로 제사 상차리기 등의 체엄을 할 수가 있는데 아래의 사진과 같다.

 

 

 

 

 

 

'상례비요(')는 일반인이 쓰기에 편리하도록 서술한 상례(喪禮)와 제사에 관한 초보적 지침서로, 김장생의 상례비요는 서인은 물론 남인과 북인의 당원들도 참고하였고, 법으로 규정하지 않았는데도 1910(융희 4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조선 백성들의 상례 규범이 되었다고 하며, 상례비요 원본은 신의경(申義慶)이 지은 책인데, 김장생이 보충, 삭제, 교정하여 완성한 것이다. 김장생의 상례비요를 신의경의 원본과 구별하여 증보상례비요라 부르기도 한다.

 

 

 

 

 

 

 

'建陽多慶'이라는 글귀가 붙어 있는 대문 왼쪽으로는 계룡시에서 나온 관리인이 사용하는 사무실이 있다.

 

 

 

 

 

이곳은 사계 김장생 선생의 삶과 학문과 사상을 설명한 '학습관'이다. 아래의 사진은 저 건물 안에 있는 것이다.

 

 

 

 

 

 

 

 

 

저곳은 '예절관'으로 사계와 예에 관한 것을 보여준다.

 

 

 

 

 

 

'영당(影堂)'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곳에는 소각문(小閣門)이 있다.

 

 

 

 

 

소각문을 들어서면서 왼쪽으로 보이는 건물

 

 

 

 

 

 

 

이 작은 건물은 고택의 제일 윗자리에 있는데 사계 김장생 선생의 영정이 있다.

 

 

 

 

 

 

 

 

 

 

 

 

 

 

 

 

 

 

 

 

 

 

 

 

 

은농재 바깥에 있는 별채의 모습이다.

 

 

 

 

 

 

별채에서 바라보이는 은농재

 

 

 

 

 

은농재 옆에는 종손(金善文)이 사는 살림집이 있는데 넓고 깨끗하여 보기가 좋다.

 

 

 

 

 

 

 

 

 

 

 

 

 

 

 

종손을 만나보고 싶어 입구에서 기침하였으나 기척이 없어 뒤꼍으로 들어가다가 이 진돗개를 보고 혼비백산했다. 길손은 웬만해서는 개에게 겁을 먹지 않는데 출입문 대리석 바닥에 앉아 있다가 조용히 일어서며 머리를 숙이고 나오면서 낮게 으르릉거리며 경고를 하는 녀석을 보니 머리끝이 선다. 산속을 얼마나 쏘다녔는지 털에는 도깨비 가시가 잔뜩 붙어 있고, 마주보는 얼굴에는 살기가 흐른다. 절집의 개는 착하기 이를 데가 없는데 아마 은농재를 경비하려니 저렇게 험상궂게 변했는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