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連山) 공원

2018. 7. 7. 13:00여행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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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 할매순대국밥을 먹고, 맞은 편에 있는 연산공원으로 향한다. 이곳은 연산 할매순대국밥 집을 여러 번 들렀어도 이곳 공원은 처음이다.










충청인들이 일반적으로 느리며, 저돌적인 기질이 없어서 애국지사가 있겠냐? 하겠지만, 뜻밖에 의병 활동과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한 애국지사가 많이 있다. 이곳에도 두 분의 애국지사 추모비가 있었는데 이비석은 '농암 곽성진 선생'의 추모비다.





'명석' 오철식 선생의 추모비도 있는데 길손의 무지로 명(明)을 빨리 알아차릴 수가 없어서 인터넷 검색을 하니 2011년 추모비 건립 당시의 신문에는 '함양'이라고 했다가 다른 블로그를 보니 남이 쓴 것을 보고 따라 썼는지 전부 '호(號)'는 빠져있다. 연산면 사무소의 홍보담당에게 물어보니 이런 추모비가 있는 줄도 모른다. 논산군청 홍보과에 물어봐도 똑 같은 대답이다. 군수가 어느 분이 되었는지는 몰라도 논산군수는 소속 공무원들을 데리고 관내에 있는 문화재를 탐방해 보길 권한다. 뉴스에 보니 논산을 빛낸 자랑스런 얼굴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논산에 곽성진, 오철식이라는 애국지사가 있었고, 그의 추모비가 연산공원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한심한 일을 어떻게 설명할까?






공원 정상은 평편하게 다듬어서 잘 정돈이 되었다.







멀리 왼쪽과 오른쪽에 어떤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왼쪽은 충혼탑인데 충혼(忠魂)이란 휘호는 운남(雲南)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이다.








오른쪽에 대한청년단의 이름으로 서 있는 碑는 '순국동지 충혼비'다. 비의 유래를 대충 요약하니 6.25 당시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힌 인민군과 빨치산 등의 무장공비가 대둔산에 은거하며, 6차례에 걸쳐 연산을 습격하여 인근 민가를 괴롭혔을 것이고, 이에 연산면 내 청년단원들이 맞서 싸우다가 31명이 장렬하게 산화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추모비다. 







단장이 '김용언'이란 사람이다. 이름을 찬찬히 훑어보니 이름 중간 字에 '용'이란 글씨가 자주 보인다. 짐작건대 연산에는 '연산 향교'가 있고, 계룡시 두마면에는 조선 중기 예학의 거두요 父子지간에 문묘에 배향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고택이 있다. 그런 연유로 연산 일대는 광산 김씨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을 수도 있다. 용(容) 字는 光山金氏의 돌림자다. 아마도 사촌과 육촌 그리고 팔촌지간의 형제들이 싸움터에 나갔나 보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광산 김씨는 달성 서씨, 연안 이씨와 함께 조선 시대 3대 명문으로 꼽힌다고 한다. 광산 김씨가 그들이 사는 고을에서 존경을 받았던 이유는 자신보다 고을을 위해 자신을 던졌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에 감히 남이 흉내내기 어려운 '도끼 상소[지부 상소(持斧上疏 )]'라는 것이 있었는데 시퍼렇게 날을 세운 도끼를 등에 지고, 새끼로 동여매어 천리 길을 걸어 한양으로 올라간 다음 성문밖에 엎드려서 임금에게 고을 수령의 패악질과 고을이 직면한 어려움에 대해 상소를 올렸고, 때로는 상소가 받아들여 질 때도 있었지만, 받아들여 지지 않으면 죽음이 닥칠 때까지 현장을 떠나지 않고, 계속 상소를 했다는데~ 다만, 군졸의 칼에 죽음을 맞기가 싫으니 자신이 가지고 온 도끼로 자신의 목을 쳐달라고 임금에게 간청해서 그렇게 많이 죽었다는 것이다. 남을 위한 나의 희생이 그리 간단치만은 않은 것이다.   






옛날 궁핍했던 시절, 도토리(꿀밤)를 따기 위해 떡메로 쳤던 흔적이 참나무에 그대로 남아있다.










아주 잘생긴 미끈한 참나무도






떡메의 타격을 피할 수가 없었다.







연산 공원 입구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느티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