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5. 28. 15:58ㆍ살아가는 이야기
내가 신독(삼갈 愼 홀로 獨)이란 단어를 처음 접한 곳은 민망하고도, 불경스럽게 고등학교 때의 재래식 화장실에서였다. 광김의 후손으로 윗대의 훌륭하신 신독재 선생에 대한 글을 올리면서 꼭 이렇게 얘기 하여야 하나? 라고 잠시 고민을 하였으나, 그러나 사실을 사실 그대로 올리지 않으면, 모두 거짓으로 보일 수도 있기에 선생에게 죄송스런 마음으로 이글을 올린다.
그 당시에 왜 "愼獨" 이란 글씨를 화장실 문 안쪽에 흰바탕에 검은 글씨로 쓴 조그만 팻말을 용변을 보기위해 앉아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눈높이에 맞게 못으로 고정하여 화장실을 사용하는 학생들이 모두 볼 수 있게끔 되어 있었는가?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그 시절 신독"愼獨" 을 내 나름대로 옥편을 보고 글자 그대로 해석을 해보니 "혼자를 삼가라!!" 의 뜻인 것을 알았다. 그런데 왜 그런 글씨가 걸린 곳이 다른 곳도 아닌 하필이면 냄새나는 화장실인가?
그때 어린 내가 내렸던 결론은 아마도 학생들이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면서 담배도 피우고, 벽면에 낙서도 하고, 그렇게 하니 선생님들이 그것을 방지해볼까 하는 생각에서 "네 혼자 있어도 누군가는 본다 그러니 함부로 담배나 낙서를 하지 말거라!!! " 그런 깊은 뜻이 아니었을까~
신독(愼獨)은 '다른 사람이 보거나 듣는 사람이 없는 곳에 혼자 있는 때에도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나 생각을 하지 않는 마음과 태도'라고 해석하여 왔으며, 유가(儒家)들의 가장 중요한 수양 방법으로 여겨왔다고 한다.
愼獨齊 선생에 관한 글을 읽은 것은 무척 오래 전 일인데 어느 일간신문에 신독재 선생의 일화와 선생의 묘소사진이 있었는데 봉분이 평평하여 봉분으로 볼 수도 없었고, 비석도 그 시절의 시각으로는 규모도 작은 초라한 비석이 묘소 옆에 서 있었던 그런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신독재 金集은 아버지가 송시열의 스승인 沙溪 金長生으로 우리가 조상에 대해 차례를 지내는 제사의 형식을 처음 가다듬고 집대성(?)하였다고 한다.
사계와 신독재는 조선중기시대를 살다 간 부자지간이었는데 동방 18현으로 아버지와 그 아들이 문묘에 나란히 배향된 것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그 두분 뿐이라고 한다.
동방 18현은 신라 1,000년 역사에서 2분, 고려 400년에서 2분, 조선시대 500년에서 14분의 대유학자들을 공자님을 모신 사당인 성균관과 전국의 모든 향교에서 배향하는 聖人 다음가는 賢人이라고 한단다. 대제학 1명을 정승 10명과 안 바꾸고, 대제학 10명과 현인 1명과 안 바꾼다는 옛말로 보아 그것은 대단한 광산 김씨 문중의 영광으로 보아야겠다.
신독재는 평소 일상생활을 하거나 글을 쓸 때도 의관을 항상 갖추고, 꼿꼿하게 생활을 하였음은 물론이고, 밤에 잠을 자면서도 모로 눕는 일이 없이 바른 자세로 일관하였다고 한다.
죽음을 앞두고 후손에게 유언하기를 "내 무덤은 봉분을 낮고 작게 만들 것이며, 작은 비석만을 세우라!"고 하였단다. 지금 기준으로 본다면 그게 뭐 대수냐? 라고 하겠지만 명분과 격식을 목숨보다 중요하게 생각했었던 그 시절을 생각해 보면 그런 유언은 시대를 한참이나 앞으로 넘고 또 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의 본관은 光山이었는데, 조선의 3대 명문은 자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으나 광산 김씨, 달성 서씨, 연안 이씨 라고 들은 적이 있는데 맞는지 모르겠다(혹시 틀렸으면 댓글로 달아주시길 바란다!!)
신독재 선생의 묘소가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된 일화가 전해오고 있단다. 김집선생이 세상을 버렸다는 소식을 들은 어느 스님이 상가에 찾아와서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고은사 자리는 조선에서 다시찾기 힘든 명당으로 그 자리로 선생의 유해를 운구해 오라는 계시를 받고 왔다고 하면서 절을 다른 곳으로 옮길 터이니 그곳에 묘소를 정하라고 하였단다.
그래서 지금의 논산시 벌곡면 양산리 35-3 옛 고은사 절터에 신독재 김집선생의 묘소가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김집 선생묘(金集先生墓) / 충남 논산
[사진출처 : 시나브로님의 블로그 ; http://blog.daum.net/mallarme8906/57 ]
김집의 가계와 그의 생애
1. 김집과 그의 시대
김집은 1574년(선조7) 6월 한양 황화방(皇華坊) 정릉동(貞陵洞),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서 태어났다. 김집의 본관(本貫)은 광산(光山), 자(字)는 사강(士剛), 호(號)는 신독재(愼獨齋)이다. 예학의 태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둘째 아들로서, 충청도 연산에서 가학(家學)을 이어 조선예학(朝鮮禮學)을 완성시켰다.
선조․광해군․인조․효종대를 살면서 당시 산림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으며, 1656년(효종7)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사상(思想)은 시대의식의 소산이고, 시대의식은 시대 상황의 소산이다. 김집의 일생을 살피기에 앞서 그가 살았던 시대를 살펴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집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몸소 체험한 격동기를 살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김집 예학사상의 배경이 되는 시대상황으로 가장 주목이 되는 것은 1623년 인조반정이다.
인조반정은 조선후기 정치사에 있어서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예학사에 있어서도 중대한 전기를 제공한 사건이었다. 이른바 ‘예학시대’로의 본격적인 진입은 인조반정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조 반정은 서인세력이 주도하고 여기에 남인세력이 가세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반정의 명분은 두 가지였다. 그것은 광해군의 패륜행위를 바로잡고, 대명외교(對明外交)의 대의(大義) 상실을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왕실의 패륜은 곧 국가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시발점이 되고,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 준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저버리고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전개하는 것은 유교적 의리와 명분에서 위배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왕실의 패륜은 윤리의 문제요, 중립외교는 의리의 문제로 모두 유교적 예치주의(禮治主義)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 문제였다.
이러한 윤리질서 재건의 문제는 이미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나타났던 정치․사회적 기강의 해이와 윤리질서의 붕괴현상과도 맞물려 그 심각성이 더욱 증대되었다. 따라서 반정(反正)이라는 비상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 당시 인조반정을 이끈 세력의 주장이었다.
반정세력은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고 동시에 그들에 대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하여 산림을 대거 초빙하게 되었다. 이때 신독재도 사계를 뒤이어 산림으로써 벼슬길에 나갔고, 산림의 종장(宗匠)이었던 사계가 서거한 이후에는 그의 뒤를 이어 산림의 종장이 되었다.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은 윤리질서의 재건이라는 시급한 시대적 요구를 예학으로 체계화했다. 조선사회는 국초이래 주자학을 신봉하여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실천이 크게 강조되었으므로, 성리학의 발달에 뒤이어 「가례(家禮)」의 학문적 정리가 있어야 했다.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이 「가례」연구와 보급에 전력했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한기범, 「신독재(愼獨齋)의 예설(禮說)과 예학사상(禮學思想)」)
김집이 살았던 시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격변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다.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세력은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에 반발하여 ‘숭명반청(崇明反淸)’을 표방했고, 후금과의 전쟁은 불가피했다. 정묘․병자호란은 모두 조선사회에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으나, 병자호란이 남긴 물질적․정신적 피해는 더 컸다.
1627년(인조5)에 일어난 정묘호란으로 조선은 후금과 형제지국(兄弟之國)으로서 평화유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조선은 해마다 많은 액수의 세폐(歲弊)와 계속되는 저들의 요구에 응하기 힘들었다. 또 당시 집권층의 강한 숭명배금(崇明排金) 사상은 북쪽 오랑캐와의 형제관계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데 후금은 조선침략 다음해에 내몽골의 챠하르(察哈爾) 지방을 공격하고, 1632년(인조10)에는 만주와 내몽골의 대부분을 차지한 뒤 북경 부근을 공략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에 더욱 강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태종은 사신을 보내 ‘형제지맹’을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치려 했고 세폐도 늘려 줄 것을 요구했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이러한 후금의 무리한 요구에 대해, 두 나라의 관계를 끊는 한편 군비(軍備)를 갖추어야 한다는 논의가 격렬히 일어났다. 그러던 중 1636년(인조14)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등이 인조비 한씨(韓氏)의 조문(弔問)을 왔을 때 후금 태종의 존호(尊號)을 알리면서 군신의 의(義)를 강요했다. 그러자 조정 신하들은 부당함을 상소하며 후금의 사신을 죽이고 척화할 것을 주장했고, 인조도 후금의 국서를 받지 않고 그들을 감시하게 했다. 후금의 사신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도망갔다.
정부에서는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의주를 비롯한 평안도에 병기를 보내고 방비를 잘 갖추라는 교서를 평안감사에게 내렸는데, 도망하던 후금의 사신이 그 유서를 빼앗아 보고 조선의 결심을 알게 되었다. 또한 1636년(인조14) 4월에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개원했다.
이에 태종은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는 존호를 받았는데, 그의 즉위식에 참가한 조선 사신 나덕헌(羅德憲)과 이곽(李廓)이 신하국으로서 갖추어야 할 배신(陪臣)의 예를 거부했다.
이러한 사건 등이 빌미가 되어 일어난 전쟁이 병자호란이었다. 청태종은 1636년(인조12) 12월에 직접 조선 침략을 감행했다. 청나라 군사는 서울로 직행하여 심양을 떠난 지 10여 일 만에 개성을 지나서 서울 근교에 육박했다. 조선 조정은 12월 14일 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봉림대군, 인평대군을 강화로 향하게 하고, 인조 자신도 세자와 함께 강화로 가려고 남대문까지 나왔다. 그러나 이미 청군이 서울 근처까지 이르렀단 이야기를 듣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인조와 신하는 적의 포위 속에서 혹한과 싸워야 했으며 식량마저 떨어져 갔다. 각지에서 오고 있는 원병이 산성의 포위망을 배후로부터 끊어주길 기대했으나, 이것도 여의치 않았다. 이에 성안의 조선 조정에서는 차차 강화론이 일어났으며, 주전파도 난국을 타개할 별다른 방도를 내놓지 못했다. 결국 인조는 이듬해 1월 30일 성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의식을 행했다.
이에 청나라와 조선은 군신의 의를 맺고, 명나라의 연호를 버리며 명나라와의 국교를 끊고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청나라에 바칠 것, 인조의 장자와 다른 아들 및 대신들의 자제를 인질로 할 것 등 매우 굴욕적이고 가혹한 강화조약을 맺게 되었다. 소현세자와 빈궁, 봉림대군과 부인 그리고 척화론자인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 등의 대신들은 인질로 심양으로 잡혀갔다.
병자호란의 패배 이후 조정과 유림에서는 청을 배척하고 명나라의 복수를 외치는 척화론(斥和論)이 크게 일어났고 이는 청나라를 치자는 북벌론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북벌계획은 1649년 효종이 즉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효종은 척화론의 중심인물로 당시 낙향해 있던 기호사림을 등용하여 북벌계획을 추진했는데, 이때 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俊吉) 등이 국왕의 명령을 받들었다. 결국 김집의 생애에 있어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그리고 북벌론은 그의 사상과 사상의 특징을 이해하는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 된다.
2. 김집의 가계와 향리 연산
1) 명문거족의 세거지 연산
김집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충청도 연산(連山)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충청도 연산은 광산을 본관(本貫)으로 하는 김씨들이 대대로 살던 지역이었다. 광산 김씨가 연산으로 옮겨와 살게 된 때는 고려말․조선초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원래 광산(光山)은 전남 북서부에 위치하는 지명을 가리킨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광산은 “원래는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였는데, 통일신라 경덕왕 때(757년; 경덕왕16)에 무주(武州)로 고쳤고, 940년(태조23) 고려 태조가 광주(光州)로 고쳐 부르도록 했는데, 광산(光山)은 광주지역의 별칭으로 익양(翼陽)이라고도 한다.” 했다. 이곳 광산에 처음 자리 잡아 광산 김씨(光山金氏) 가문을 연 사람은 김흥광(金興光)이었다. 김흥광은 신라 왕자로 통일신라 말기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경주를 떠나 무진주 서일동(西一洞 ;현 담양군 평장동)에 은거하면서 자연을 벗삼아 살았다.
그 후 이곳에 살던 김흥광(金興光)의 후손 여러 명이 고려시대 장관급인 평장사(정2품직)에 임명되자, 사람들은 마을 이름을 평장동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이처럼 고려시대 중앙정계로 진출했던 광산 김씨 가문은 고려말․조선전기 분화하면서 경기․충청일대와 경상도 등 지방을 향리로 정하게 된다.
김집의 집안이 언제부터 연산에 내려왔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고려말․조선초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즉 신독재 김집의
8대조 할머니 양천 허씨 부인은 조선 태조 때 대사헌을 지낸 허응의 딸인데, 광산 김씨인 김문(金問)에게 시집을 왔다. 김문은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고 한림원의 벼슬을 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허씨 부인은 불과 17세의 어린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친정부모는 어린 나이에 혼자가 된 딸의 처지를 불쌍하게 여겨, 몰래 다른 곳으로 다시 시집을 보내려 했다. 허씨 부인은 이 사실을 알고 그 길로 개성을 떠나 시가(媤家)가 있는 연산 고정리(高井里)까지 5백 리를 걸어서 내려 왔다. 허씨 부인이 연산으로 내려올 때 산길에서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서 지켜주었는데, 연산 시댁에 무사히 도착하자 곧바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하나의 이야기지만, 광산김씨가 연산에 자리잡은 것은 김문의 아버지 김약채(金若采)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김약채는 고려조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여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지냈으며,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도중에 잠시 지신사(知新事)에 임명된 일이 있었다. 그는 이것이 후환이 되어 잠시 유배당하게 되지만 조선왕조에서는 다시 문하부(門下府)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가 되었다. 고려 창왕부터 조선 정종 때까지 김약채의 행적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허씨 부인이 1393년(태조2) 과부가 되어 연산의 시가로 내려간 것을 보면 그는 귀양에서 풀려나 연산에서 살다가 다시 벼슬에 나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과적으로 김집의 집안이 연산을 향리로 정한 것은 고려말․조선초기였던 것이다.
1세 흥광(興光) … → 19세 약채(若采)→ 20세 문(問)→ 21세 철산(鐵山)→ 22세 국광(國光)→ 23세 극뉴(克忸)→ 24세 종윤(宗胤)→ 25세 호(鎬)→26세 계휘(繼輝)→27세 장생(長生)→28세 집(集)표] 1 신독재 세계약도(世系略圖)
허씨 부인은 시부모를 모시며 유복자인 아들 김철산(金鐵山)과 어린 손자들을 훌륭히 키웠다. 허씨 부인은 79세 때 세상을 떠나 연산 고정리에 묻혔는데 이러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져 세조는 마을 입구에 정려(旌閭)를 세워주었다.
김철산은 좌의정을 지낸 김국광(金國光), 김겸광(金謙光), 김정광(金廷光) 김경광(金景光) 등 아들 4형제를 낳았다.
김집의 6대조 김국광(金國光 ; 1415-1480)은 1441년(세종23)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 등을 지냈다. 1455년(세조1) 교리로서 세조의 즉위를 도왔다 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올랐다. 그리고 1460년(세조6) 오랑캐(兀良哈)가 침입했을 때에는 함경도 경차관으로 적을 회유했다.
세조는 김국광의 박식한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사리(事理)를 아는 것이 제일[事知第一]’이라는 4자를 손수 써서 내려주기도 했다. 그는 1466년(세조12) 병조판서에 임명된 후 우부승지․좌부승지를 거치면서 새로운 형전(刑典) 편찬을 주도하고 병조판서․우찬성에 올랐다. 또 1467년(세조13) 5월에는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오르고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졌다. 한편 김국광은 예종이 즉위하자 신숙주 등과 함께 원상(院相)이 되어 국정을 맡았는데, 그 뒤 우의정․좌의정을 지내고 부원군에 봉해지면서 훈구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김국광은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에 대한 일화가 전해진다. 즉 세조 때에 함안(咸安) 사람 최옥산(崔玉山)이 그 아비를 죽였다는 옥사(獄事)가 일어나, 사건이 거의 마무리되고 있었다. 세조가 놀라서 ‘어떻게 이같은 일이 있는가?’ 하고, 김국광을 보내어 다시 국문 하게 했다. 그런데 김국광이 그 옥사를 모두 뒤집어, 최옥산은 죄를 면하게 된 반면, 판결과 관계된 관리들은 모두 중죄(重罪)를 받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세조가 그를 유달리 좋아했는데, 사신(史臣)도 김국광(金國光)은 “일을 처리하는데 치밀하고도 명료하였다.” 고 평가하였다.
김집의 5대조 극뉴(克忸)는 사간원 대사헌, 고조 종윤(宗胤)은 진산군수(珍山郡守), 증조 호(鎬)는 지례현감(知禮縣監)을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이름이 드러나지는 않았는데 할아버지 김계휘에 이르러 비로소 사류(士類)의 대열에 올라 명망을 얻게 되었다.
[글 출처 : 광산김씨 판교공 후손의 카페 http://cafe.daum.net/pankyok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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