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고백 비(信仰 告白 碑)

2019. 5. 18. 09:00여행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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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삼괴리 361번지에 있는 천주교 신앙고백 碑를 보기 위해 왔다. 주차장에 접해 있는 정자에서 뒤편을 보니 감나무 사이로 천주 상이 보인다.






경북 상주시 청리면 일대에는 옛날 박해시대부터 많은 교우촌이 형성돼 있었다. 이곳 석단산() 아래 현재의 청리면 삼괴2리 안골짝의 커다란 바위에는 자신의 신앙을 명백히 하기 위한 한국 교회 유일의 신앙 고백비가 서 있어 지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상주군에는 1785년 을사 추조 적발 사건 당시 문중의 박해로 서울서 낙향한 서광수 () 에 의해 처음 복음이 전파된 후 많은 사람들이 입교해 천주교를 믿어 1801년 신유박해를 비롯해 1827년 정해박해 등 역대 박해 때마다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했다. 특히 신앙 고백비가 서 있는 청리면 삼괴2리 부락에는 1866년 병인박해 전부터 김해() 김씨 집안 김복운()의 아들 4형제가 열심히 천주교를 믿어 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중 차남인 삼록(, 도미니코, 1843-1932년) 은 특히 신앙이 돈독해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이 신앙 고백비가 공식적인 교회 사적으로 고증된 것은 이제 겨우 10년을 넘어섰다. 김삼록은 신앙 고백비를 세운 뒤 교난을 피하기 위해 고백비 앞에 포플러나무, 미루나무 등을 많이 심어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도록 가려 두었다. 그 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의 손자인 김순경(당시 79세)이 나무들을 베어 냄으로써 비로소 신앙 고백비 앞이 훤하게 트이게 되었다. 1982년 당시 상주 서문동 본당 이성길 신부가 우연히 김순경의 둘째아들을 만나 신앙 고백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됨으로써 교회 안에 처음 알려지게 되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84년 오기선 신부의 답사와 함께 신앙 고백비에 대한 확실한 고증이 이루어지게 됐다.

바위 위에서 의젓한 모습으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고백비에는 천주님과 교황, 주교, 신부, 교우를 위한 기도가 새겨져 있다. 비롯 공식적인 박해는 끝났다 하나 아직 지방에는 사사로운 박해가 끊이지 않고 있던 시절,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신앙 고백을 이렇듯 감대하게 했다는 점에서 신앙 고백비가 오늘 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 고백비의 역사적 유래 *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다른 형제들은 모두 박해의 서슬이 두려워 신앙을 버렸으나 김삼록은 끝까지 천주교를 믿어 하릴없는 도피 생활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 박해의 악랄한 손길을 피해 목숨을 구한 그는 1866년 한불 수호 조약으로 공식적인 박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894년부터 1900년 초 그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기 위한 표징을 단단한 바위 위에 새겼다. 자신과 집안의 문중이 살고 있던 석단산() 아래 높이 127센티미터,폭 39cm, 두께 22cm, 두께 22cm의 신앙고백비()를 건립한 것이다.

출처 : 상주 신앙 고백비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야트막한 야산 입구 길게 누운 바위 위에 서 있는 비석은 마치 갓을 쓴 김대건 신부가 두 손을 모으고, 멀리 있는 천주 상을 바라보는 뒷모습 같다.











자연석을 귀부로 삼고, 글을 쓴 비신 위에 십자가를 만들고, 이수는 마치 갓을 닮았다. 



 









십자가 부분에 천주(天主)라는 글씨가 뚜렷이 보인다.






당시 천주교 박해로 수많은 사람이 절두대에 올라 순교를 하는 엄혹한 시절에 김삼록이라는 사람의 죽음을 무릅 쓴 신앙심도 놀랍거니와 이런 사실을 밀고하지 않은 부락민들의 관용도 매우 놀랍다고 길손은 생각한다. 이 지역은 호랑이가 나올 법한 그런 깊은 산속도 아니다. 인근에 살면서 땔감을 구하려고 갔다면 쉽게 발견이 되었을 공간인데 이 신앙 고백비를 세운 김삼록이라는 이는 그들의 인격을 믿었을 수도 있었으리라. 나는 그 김삼록 교인도 존숭받아 마땅하겠지만,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대지래이, 드무실 부락민에게도 깊은 존경을 보내야 할 것 같다.








김삼록이라는 사람이 이 비문을 쓰고 새길 때 분명히 핏줄의 도움을 받았겠지만, 비문의 내용을 볼 때 아주 한문에 능통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안내자의 말을 들었다. 길손도 그렇게 느끼는데 특히 음독(音讀)을 하는 위함(衛咸)이라는 글자가 그렇다. 그 당시에는 한글보다 한자를 더 많이 사용하였을 것인데 음독을 모를리가 없지 않겠는가?






교황(敎皇)을 교화황(敎化皇)으로 한 것은 혹시 기만 전술이었던가? 아니면 교황을 교화황으로 잘 못 알았던 것일까?







비문 해설 碑에도 나오는 것처럼 신부(神父)를 新夫로 교우(敎友)를 敎于로 한 것인데 이런 목숨이 오가는 일에 대해 인근에 한문 선생에게 물어볼 수도 없지 않았겠는가? 지금은 김삼록 敎人은 천국에서 천사들과 함께 영생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 버스 기사님!! 재치가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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