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새재에서

2019. 6. 23. 09:30여행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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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이 이곳 문경 새재에 오면 제1 관문을 통해서 제2 관문 조곡관까지는 보고 되돌아온다. 길손도 아직 제3 관문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펜션에서 1박을 하고 아침에 조곡관을 향해 오르는 길 입구에 저런 비석이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산천초목과 맑은 물에만 관심이 있고,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간혹 길손처럼 덜 떨어진 사람이 관심을 갖지만~

 

 

 

이것은 임진왜란 때의 문경 현감 신길원(申吉元)을 기리는 비석이다. 신길원의 자(字)는 경초(慶初)요.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이 비석의 안내문을 읽어보니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군이 문경이 다다르자 주변 모든 사람이 지금은 전세가 불리하니 모두 피하자고 권하였으나 그는 내가 맡은 고을이 여기인데 어찌 피하리오 하면서 도망가지 않고, 종 한 명만을 대동하고 의관을 정제한 채 적의 칼을 맞아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이 비석은 조선 숙종 32년(1706년)에 세워졌으며, 글은 전 사간원 정언 채팽윤(蔡彭胤)이 짓고, 글씨는 성균관 전적 남도익(南圖翼)이 썼으나 비문의 음각이 깊지 않아 맨눈으로 보기가 어려웠다.

 

 

 

제1 관문은 공사 중이다.

 

 

 

 

고을에 수령이 되면, 백성을 덕으로 잘 다스려서 나중에 떠날 때 공덕비라도 세워주면 길이 후세에 내 이름을 남길 것이기에 너 나 할 것 없이 공덕비와 선정비를 앞 다투어 세웠는데 이 문경 새재 입구에도 관찰사부터 현감까지 많은 관리들의 선정비나 영세불망비가 서 있었는데 비슷한 비(碑)를 예를 든다면 거사비, 선정비, 영세불망비, 애민비, 송덕비, 공덕비, 청덕비등의 이름으로 길이 자신의 업적을 기리고자 했는데 아마도 게 중에는 백성에게 탐관오리 소리를 들으면서도 저 스스로 자가 발전하여 부끄러운 공덕비를 세운 이도 있었을 것이다.

 

돌로 된 비석이 대부분이었으나 이것은 무쇠로 만든 영세불망비로 '현감홍후로영영세불망비(縣監洪候魯榮永世不忘碑)란 글이 양각으로 주조되었는데 홍로영은 1824~1827년까지 문경 현감으로 있었으며 이 철비는 순조 26년(1826년)에 세워졌다. 그러니까 보자!! 자신이 떠나고 나면 언제 보았냐? 하면서 세워줄 것 같지가 않으니 자신이 재임할 대 자신의 손으로 세웠든지 아니면 아전을 들들 볶아서 세웠을 수도 있겠다.^^

 

 

 

 

교귀정()은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문경새재도립공원 안에 있는 조선시대 경상감사의 업무 인수인계가 이루어지던 곳에 세워진 정자이고, 이 소나무는 교귀정과 역사를 같이 한다고, 쓰여 있다.

 

 

 

 

조선 시대의 관찰사(使)는 감사(監司)와 같은 동의어로 같은 관직이다. 즉 경상관찰사는 경상 감사와 같고, 지금의 도지사급으로 보면 되겠다.

 

 새로 부임하는 경상 감사가 전임 감사로부터 업무와 관인()을 인수인계 받던 교인처()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신임감사의 인수인계는 도 경계 지점에서 실시하였으며, 이 지점을 교귀(交龜)라 한다. 감사, 병마절도사, 수군통제사 등이 바뀔 때, 거북 모양의 병부(兵符)나 인신(印信)을 서로 넘겨주고 받아서 거북 '귀'를 사용했던 것 같다.

두산 백과에 보니 이 교귀정은 1470년(성종 초) 경에 건립되어 사용되어 오다가 1896년 의병전쟁 때 화재로 소실되어 터만 남아있던 것을 1999년 6월 복원하였다. 건물의 양식은 팔작지붕에 이익공(),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 앞 우측에는 오래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교귀정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원님 행차라는 말이 대단한 행렬을 일컫는다고 한다면 경상 감사의 도임 행차는 실로 대단했던 것 같다. 사진을 확대하여 눈을 뒤집어 까고 살펴보니 대충 이런 것 같다. 위쪽은 부사(府使)가 행차할 때의 그림이고, 아래는 감사(監司)가 행차할 때의 모습인데 경상 감사 밑에 안동 부사 뭐 이런 차이로 감사가 정 1품이라면 부사가 정 1품 또는 종 1품이었으니 직급 차이가 많이 났다.

 

저 그림에 해설이 없으니 내 마음대로 해석을 하면, 아마도 경상 감사가 떠나고 신임 감사가 새로 오니 문경을 다스리는 담당 부사가 날라리를 부는 취타대를 앞세워 앞장을 서고, 뒤에 경상 감사가 뒤따르는 것으로 짐작되는데 대구에서 문경까지 말 타거나 걸어서 오면 이틀이나 사흘이 걸렸을 것이다. 어림잡아 인원이 50~80명쯤으로 추정된다.

 

 

 

 

 

교귀정 입구의 바위에 누가 떼어가지 못하도록 영구 선정비(?)를 세웠는데 바위에 새긴 것을 '마애비'라고 한다. 왼쪽과 오른쪽 모두 동일 문경 현감이다. 전,현직 관찰사의 교대식이 이루어지는 이곳 입구 잘 보이는 곳에 떡하니 저런 것을 만든 것을 보니 저 배짱은 정말 대단한 배짱이다. 내가 당시에 관찰사였다면 이 사람을 불러다가 곤장을 백 대 때리고 덤으로 두 대를 더 때렸을 것인데~

 

왼쪽은 기축 사월 일(己丑 四月 日 : 1889년 음력 4월 고종 26년) 문 졸 립(門 卒 立) 문경 새재 관문을 지키는 관문 군졸들이 바위에 새긴 '현감이후인면애휼비'(縣監李候寅冕愛恤碑)' 이고, 오른쪽은 '현감이후인면선정비(縣監李候寅冕善政碑)'다. 즉 이인면이라는 문경 현감을 주인공으로 하나는 애휼비, 하나는 선정비인데 정말 욕심도 많다. 후손이 길손에게 사자(死者) 명예훼손죄로 고소할 수도 있겠으나 愛恤碑 뜻처럼 백성을 가련하고 불쌍하게 생각하고 사랑했다면, 저 바위에다가 비슷한 내용의 글을 새겨넣으려고 해도 만류했어야 옳지 않았겠나? 비석을 자세히 보니 왼쪽은 안으로 바위를 파서 비문 아래에는 팔괘를 새겼고, 오른쪽은 볼록하게 나오게 해서 서로 합치면 딱 맞을 것 같다.

 

 

 

 

문경 현감 이인면이 만든 선정비는 오른쪽 바위에 새겨져 있다.

 

 

 

 

저 험한 길로 오르다가 호환(虎患)을 당한 이도 있었을 것이고, 어떤 이는 어사화를 머리에 얹고 금의환향을 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낙방하여 고개를 떨구고 털레털레 이 길로 돌아왔을~ 멀고도 애달팠던 '과거 길' 지금은 흔적만 남아 후세에 그 고단함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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