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8. 31. 17:30ㆍ여행이야기
권정생 선생이 생전에 거처하였던 조탑 마을 빌뱅이 언덕 밑의 집을 찾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안동을 들어가는 국도에서 일직 교회를 가면 그 앞에 작은 주차장(?)이 있고, 맞은편 골목으로 따라 들어가면 외진 곳에 집이 있다. 옛날 상엿집이 위에 있었고, 그 밑에 작은 집을 들였으니 그곳이 어떤 곳인지 짐작이 어렵지 않다.
옛날 시골 마을에는 사람이 죽었을 때 사용하는 큰 상여가 있었는데 죽은 사람의 시신 무게까지 감안하면, 장정 10여 명이 함께 져야 장지까지 갈 수가 있었다. 지금처럼 신작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좁은 논길로 밭길로 험한 경사의 산으로 오를 때 여름에 죽은 주검은 이미 썩기 시작하여 냄새가 나고, 썩어 가는 시신에서 나오는 시쳇물을 상여꾼이 뒤집어쓸 수도 있어서 비닐로 관(널)을 감아서 상여에 올렸는데 지금도 그 광경이 선명하다.
지금은 벌써 고인이 되신 선친이 하루는 학교를 다녀오니 우물가에서 온몸을 씻고 있었다. 얘기인즉슨, 관에 비닐로 감아서 시신에서 떨어지는 물이 밑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였는데 여름이어서 시쳇물이 많이 떨어지니 비닐에 고여서 풍선처럼 튀어 나왔고, 험한 산을 오르다가 주변 나뭇가지가 그 비닐 풍선을 찔러서 그만 풍선이 터지는 바람에 그 고약한 시신의 물이 선친의 머리부터 쏟아지고 심지어 입으로까지 근근 찝찝한 물이 들어갔다니 오죽했을까? 그 고약한 물에 옷이 젖은 채로 2~3km를 걸어와서 온몸을 씻고 있었다.
그러기에 상여를 보관하는 상엿집은 동네에서 떨어지고, 외지고, 후미진 곳에 있었기에 늘 그 주변을 지날 때는 간담이 서늘했다. 때로는 귀신 목격담도 있어서 비가 오는 저녁나절에는 정말 원귀가 상엿집을 맴도는 느낌도 들었는데 그런 최악의 장소에 권정생 선생의 집이 들어선 것이니~
집 앞 지척에 있는 이정표에서 보니 그가 종지기를 했던 일직 교회가 가깝게 보인다.
이정표를 따라 몇발자국을 떼니 권정생 선생의 집이 보인다.
권정생 선생은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으며, 해방 직후 1946년 경북 청송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는 가난으로 인하여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전국을 돌며 걸식을 하다가, 1967년에 경북 안동군 일직면 조탑동 마을의 일직교회 종지기로 그 교회에 딸린 문간방에서 혼자 살면서 글을 쓰다가 이를 안타깝게 여긴 동네 청년들이 빌뱅이 언덕 상엿집 옆 터에 지어준 8평짜리 방 두 칸 흙집에 1983년에 이사했다. 1986년 3월 27일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호롱불을 밝히고 살았다. 그는 1983년 4월 11일 이오덕 선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사 온 집이 참 좋습니다. 따뜻하고, 조용하고, 그리고 마음대로 외로울 수 있고, 아플 수 있고, 생각에 젖을 수 있어요,' 그는 그곳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다른 볼 일 때문에 마음이 급해서 평소와 다르게 안내판을 읽지를 못했다. 집 뒤에 빌뱅이 언덕이 있다고 했는데 아름다운 우리말의 언덕이겠지만, 길손이 듣고 보기엔 빌뱅이란 표현이 영 정겹지가 않고, 마치 빌어먹는다는 느낍이 든다. 아니면 남에게 기생해서 사는 것, 빈대 붙어서 사는 것, 빌 붙어서 사는 것, 그래서 상엿집 밖에 터전을 일굴 수가 없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네이버 지도에서 캡처한 것인데 동그라미 안에 A로 표시된 곳이 권정생 선생이 평소에 살았던 집이다. 지번은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707인데 여기서 네이버에 한마디 한다. 네이버에서는 이곳을 권정생 생가로 표현했는데 어찌 이곳이 생가인가? 그는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사소한 것 같지만, 이런 것도 신경을 제대로 쓰길 바란다.
대문도 없는 집이지만,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 왼쪽에 2명이 들어가면 꽉 찰 변소가 있다. 안내판 뒤쪽이다. 통시(화장실의 경상도 방언 ; 정낭) 와 처갓집은 멀수록 좋다고 했는데 집 옆에도 작은 공터가 있었는데 하필 부엌에서 빤히 보이는 곳에 냄새나는 푸세식 화장실을 만들었는지 이해하기가 조금 어려웠다. 권정생 선생이 화장실 문을 열어놓고, 앞에 보이는 들판을 보면서 동화 구상을 했을까? 여름이면 양철 지붕이 열을 받아서 무지하게 더웠을 텐데~
원래 길손은 어떤 목적의식이 있어서 왔다면 온 집안을 이 잡듯이 뒤져서 그 연유와 인과관계를 변증법적(?)으로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저렇게 따져보고, 그랬을 것인데 참 시간이 야속했다. 이렇게 사진을 찍고 보니 부엌을 들어가 보지 못했다. 부엌 사진이 없어서 그 먼곳을 다시 가야 하나? 아궁이 앞에 앉아서 권정생 선생이 어떤 고뇌를 했고, 통시에 들어가 출입문을 열고 앉아 바깥도 보고, 많이 아쉽다.
건물이랄 것도 없지만, 건물 왼쪽이 부엌이다.
권정생 선생이 기거하던 방문에는 마치 금줄처럼 뭔가 쳐졌는데 권정생을 만나다라는 글은 식별이 되고, 문고리에는 누군가 흰 국화를 끼웠다. 옛날 집에는 한지로 문을 발랐는데 밖에 사람이 오는 것을 보려고 작은 유리를 문에 붙였는데 권정생 선생도 밖이 많이 궁금했나 보다. 그게 왼쪽, 오른쪽 두 개나 있다.
언제 누가 갖다 놓았는지 책상 위의 꽃바구니의 꽃은 화석이 되고, 무심한 방명록은 덩그러니 방문객을 맞는다. 책상은 학교에서 가져온 것 같은데 책상 밑에 있는 물이 가득 담긴 페트병은 어떤 용도로 사용하려는가? 방문객보고 마시라고 한 것을 아닐 것 같고, 아마도 권정생 선생의 영혼이 밤이면 이곳을 배회하면서 목마르면, 드시라고 둔 것인가? 그렇다! 이곳에는 분명히 권 선생의 영혼이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느낀다.
강아지 똥도 좋아하시는 분이 강아지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 바둑이는 어디 가고 허전한 개집(?)만 남았는고?
야은(壄隱) 길재(吉再)가 읊은
“오백년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데 업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조탑 마을 권정생을 두 발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권 선생은 간데 없네/ 어즈버 개집만 홀로 있어 꿈이런가 하노라!'
집 뒤에는 부스러지기 쉬운 돌로 이루어진 바위가 있었는데 저곳에도 권 선생의 자취가 묻어 있을 것이다.
집과 바위 사이에는 작은 도랑이 있다. 그 도랑물이 많으면 권 선생 집으로 들이칠 것이어서 작은 둑을 만들었는데 이것으로 보아도 이곳은 집터로서 적당하지 않은 곳이다. 그 작은 둑에 복숭아나무가 있고, 풋복숭아가 여문다.
방문 틀 왼쪽에는 파란색 사인펜으로 쓴 '권정생'이라는 종이에 비닐로 싼 문패를 대신하는 종이가 붙어 있는데 저 글씨는 권정생 선생의 친필이 분명하다. 이글을 보고 권정생 선생을 흠모하는 어떤 이가 저것을 떼 갈까 봐 약간 걱정은 되는데 2018년 1월 23일 대구에 있는 중앙교육연수원에서 있었던 권정생 선생 전시회에서 그의 유필을 보았던 적이 있었기에 자신 있게 말한다.
권정생의 생전 육필이다. 파란색을 즐겨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방을 드나들면서 무수히 밟았을 댓돌도 주인을 잃고,
방문 앞에서 심호흡하고, 허리를 굽히면서 합장을 하고 여러 번 고개를 숙이면서 그의 극락왕생을 빌고 난 뒤에 유리 구멍으로 방을 들여다보는 무례함을 용서해달라고 한 다음에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봤다. 혹시 권 선생이 앉아서 글을 쓰고 계시나 해서~ 그런데 방에는 저렇게 영정 사진이 있고, 향로가 단출하게 놓여있다. 왼쪽에는 동화책이 소박한 책장에 꽂혀 있고
수돗가의 작은 돌확은 무슨 용도로 쓰였을까? 건강이 좋지 않은 권 선생이 빌뱅이 언덕에서 구해온 약초를 빻기 위한 용도는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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