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학(禮學)의 거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 묘소

2020. 12. 11. 21:59여행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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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웅장함 그 자체여서 정말 놀라웠다. 이곳은 충남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 산 7-4번지에 있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 묘소 일원이다. 내비게이션에 의지하여 간다면 반드시 사계 김장생 묘소라고 입력해야 이곳에 당도할 수가 있다. 고정리 산 7-4번지가 워낙 넓어서 찾아가기가 힘들었다.

 

 

 

 

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예학( 禮學)을 이렇게 정의했다.

 

정의

충청남도 논산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 예의 본질과 의의 및 시비를 탐구하는 유학의 한 분야.

 

개설

오늘날 충청 지역은 충절과 선비의 고장, 양반의 고장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고 있다. 그러한 상징의 연원을 따져보면 조선시대 가장 오랜 기간 정권을 잡았던 기호학파의 존재가 드러나는데, 그 중심에는 바로 논산 지역에 뿌리내린 호서사림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 전기 경기 지역의 사림에 종속되어 별다른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던 호서사림은 김장생의 출현으로 주목 받기 시작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은 그 이론적 분열에 따라 퇴계 학맥의 영남학파와 율곡 학맥의 기호학파로 크게 양분할 수 있다. 성리학은 특히 도통의 정통성을 강조하여 정통 학맥의 연속성을 중시해 왔는데 기호학파에서는 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권상하(權尙夏) 등 외줄기로 이어가는 학통을 형성하였다. 원래 기호학파의 핵심인 이이와 성혼 등은 주로 서울과 경기를 무대로 활동하였는데, 율곡의 적통이 김장생으로 이어지면서 충청도 연산(현 논산)이 그 중심지로 등장하였다.

 

호서예학

이황과 율곡의 도학 체계 속에서는 성리학에 못지않게 예학의 문제가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성리학이 유교 규범의 철학적 근거를 해명하는 것이라면 예학은 그 행동 양식인 의례를 규정하는 것이므로 생활 규범으로서 더욱 일반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어 서민 대중의 생활 속에 깊숙이 침투하게 되었다.

김장생과 김집은 부자지간으로 이이의 학맥을 계승하여 기호학파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유학 사상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17세기 전반에 예학의 학풍을 일으켜 17세기 후반 예학 논쟁인 예송(禮訟)의 선하를 열어 주었다.

김장생은 호서예학의 거두로 『가례집람(家禮輯覽)』 등을 저술하여 한국적 예학을 확립하였으며, 그 흐름은 김집 등으로 이어졌다. 당시는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난으로 여러 차례의 국난을 거치면서 사회가 혼란하였는데, 정부와 학계에서는 예학을 심화시키고 예를 생활화시켜 사회 혼란을 안정화하는 데 앞장섰던 것이다. 의례를 중시한 영남예학과는 달리, 호서예학은 주자의 가례를 중시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상 논쟁

김장생의 학문은 아들인 김집과 송시열에게 전해졌으며, 김집의 학문은 송준길, 유계, 이유태, 윤선거를 거쳐 윤증(尹拯)으로 계승되었다. 송시열은 당시 서인의 영수로서 남인인 윤휴(尹鑴)와 격렬하게 대립하여 예송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그의 학맥은 이단하를 거쳐 김원행, 권상하, 한원진 등에게로 이어졌다.

예송은 서인과 남인 사이의 당쟁과 얽혀 권력 투쟁의 구실로서도 작용하였지만, 예송의 본래 정신은 실제의 의례에서 그 원리에 관한 논쟁이요, 의리론적인 신념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이이-김장생-김집-송시열, 송준길로 계승되는 학맥의 5명 모두가 잇달아 문묘에 배향되는 유례없는 사실은 이 학맥이 조선 사회에서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숙종 때에 이르러 기호학파는 사상적,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게 된다. 소론 측에서 송시열의 주자학 중심의 사상에 비판을 가하는 가운데 1680년(숙종 6) 송시열의 노론과 윤증, 박세채 등의 소론이 남인에 대한 처벌을 둘러싸고 대립하게 된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이 회덕(현 대전광역시 대덕구)에 살았고, 소론의 영수인 윤증이 니산(현 논산시 은성면)에 살았다고 하여 회니시비(懷尼是非)라고도 불렀다.

그 후에도 사상적 논쟁은 계속되는데 송시열을 잇는 권상하의 제자 한원진(韓元震, 1682~1751)과 이간(李柬, 1677~1727)이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차이 여부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인성과 물성이 다름을 주장한 권상하와 한원진 등이 호서에 산다하여 호론이라고 하였고, 인성과 물성이 다르지 않음을 주장한 이간의 의견을 옹호하는 학자들이 서울에 거주하고 있어 낙론이라 불렀다. 후일 호론은 대체로 정통주의를 주장하는 위정척사 계열로 이어졌고, 낙론은 북학파, 개화파로 이어졌다.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예학[禮學]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묘역 입구에는 광산김씨의 부흥을 일으킨 사계 김장생의 7대 조모 '증 정경부인 양천허씨 사실기' 비석이 있다. 

 

 

 

 

 

왼쪽 제일 밑에는 사계 김장생 선생의 숙부인 김공휘(輝)의 묘를 시작으로 양천 허씨의 아들인 김철산, 그 위로는 김철산의 부인 안동 김씨, 그리고 사계 김장생의 동생인 김선생(金善生)의 묘가 있다.   

 

 

 

 

 

이곳은 소위 조상의 묘 위에 자손의 묘를 쓴 역장(逆葬)을 한 곳이다. 엄격한 유교 질서 사회에서 이해가 쉽지 않는 부분이지만, 묘소 오른쪽 밑에서 위로 보면, 앞에 보이는 것이 양천 허씨의 묘소이고, 그 뒤에 곡장(曲墻)을 두른 묘가 사계 김장생 선생의 묘소다.  

 

여기서 평소 장난기가 많은 길손의 생각은 엉뚱한 곳으로 향한다. 혹시 저승에서 염라대왕이 선착순으로 선물을 준다고 하면 아무래도 자손들이 조상보다 먼저 뛰어나가서 받을 수는 없지 않는가? 특히 어느 집안보다 예(禮)를 중시하는 광산 김씨 문중에서~ 그래서 저승에서 선물을 배급할 때 조상님이 먼저 나가셔서 받으라는 갸륵한 마음에서 역장을 했을 수도 있겠다.^^

 

 

 

 

김공휘는 파주 목사를 지내고, 통정대부에 올랐다고 한다.

 

 

 

 

 

김공휘의 묘 바로 뒤에는 양천 허씨의 아들이며, 조선 전기 논산 지역에 광산김씨의 터를 잡은 입향조()인 김철산(金鐵山)의 묘가 있다. 그는 어머니 양천 허씨보다 일찍 죽어 이곳에 묻혔다. 그런데 이 묘소는 김철산 부부의 합장묘(墓)가 아니라 부부를 같은 묏자리에 합장하지 아니하고 앞뒤로 나란히  쌍분( 墳)이었다. 

 

 

 

 

 

비문 왼쪽에 '부인 안동김씨(夫人 安東金氏 )부후(祔後)' 이렇게 되어 있다. 다른 곳에는 '祔左' 라고 되어 있는데 그래서 짐작하기를 김철산의 묘 뒤에 있는 봉분이 '안동 김씨'의 묘소일 것이다. 

 

 

 

 

 

김철산(金鐵山)은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나중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김철산과 김선생(金善生) 묘소 사이에는 문인석만 있고, 상석과 비석이 없이 두 봉분이 서로 붙어 있는 느낌의 묘가 있는데  이것은 김철산의 부인 안동 김씨의 묘다. 아무리 역장이 허용되었다고 하지만, 지아비 묘소 위에 지어미의 묘가 있는 것이 정말 특이하다. 

 

 

 

 

 

 

사계 김장생 선생의 묘소 바로 밑에는 양천 허씨의 묘소가 있다.

 

 

 

 

 

양천 허씨 묘소를 앞에서 바라보니 중앙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제사 음식을 진설하는 넓적하고 장방형으로 만든 '상석(床石)'이라고 불리는 돌이 있는데 그것은 음식을 진설하는 곳이 아니라 영혼이 나와서 노는 '혼유석(魂遊石)'이라고 한다. 길손의 짐작으론 혼유석 오른쪽 뒤편 무덤 앞에 붙어있는 넓적한 돌판이 '상석(床石)'이 아닐까 한다. 다르게 말한 것이라면 댓글로 지적해 주시기를 부탁한다. 

 

 

 

묘소 옆에는 마치 말고삐를 매는 것처럼 생긴 석물이 있었는데 이게 뭔가? 실제로 이곳에 말을 가져와서 고삐를 맬 일도 없을 것인데~

 

*  이 석물의 용도가 궁금하여 결국 오늘(12월 18일 오후 3시)논산 사계 선생 후손에게 전화로 문의한 결과 의외의 답변을 들었다. 이 석물의 용도는 묘소에서 행사를 할 때 천막의 끈을 묶는 용도라고 했다. 옛날에는 '채알'을 친다고 했는데 광목으로 만든 흰 천막의 끝에 달린 끈을 묶는 용도인데 온갖 상상을 한 내가 우습게 되었다.

 

 

 

 

 

이렇게 동그랗게 생긴 석물이 돌출이 되었는데 이것은 또 뭐꼬??

 

이것도 천막의 끈을 묶는 용도의 돌이다.

 

 

 

 

 

구멍이 뚫리고, 돌출된 돌은 반대편 묘소 옆에도 설치되어 있어서 길손의 궁금증을 최대로 자극한다.

 

이것도 천막의 끈을 묶는 용도의 돌이다.

 

 

 

 

 

 

이 묘소는 왼쪽의 맨 위쪽에 있는 묘소인데 김장생 선생의 동생인 '김선생'의 묘소다. 金先生이 아니라 金善生임에 유의해야 한다. 

 

 

 

 

 

드디어 주인공인 사계 김장생 선생의 묘소에 도착했다. 마치 왕릉처럼 곡장(曲墻)으로 둘러쳐져 있다. 무덤의 규모도 어마어마하게 느껴진다. 광산 김씨는 세도가로 알려지기보다는 대학자를 많이 배출한 가문이다. 

 

 

 

 

 

이곳에도 어김없이 의문의 돌이 있다.

 

 

 

 

 

불경스럽지만, 김장생 선생에게 용서를 구하고 산소 뒤에서 앞쪽을 바라본다. 양천 허씨 묘소의 봉분이 보일 듯 말 듯 하다.

 

 

 

 

 

묘소  뒤편의 모습이다.

 

 

 

 

 

사계 김장생 선생 묘소를 두른 곡장(曲墻)

 

 

 

 

 

 

양천 허씨의 묘소 뒤에서

 

 

 

 

 

김 선생의 묘소 옆에도 의문의 돌이 있는데 혼백이 말을 타고 와서 이곳에 말을 붙들어 맸나?

 

 

 

 

 

묘소 앞에는 사계 김장생 선생의 14대 종손이 사는 종가(宗家)와 광산 김씨의 재실인 염수재(齋)가 있다.

 

 

 

 

사계 김장생 선생의 묘소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는 '김장생 선생 신도비(碑)' 시간이 촉박하여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보았는데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다. 신도비(碑)죽은 사람의 평생 사적을 기록하여 무덤 앞에 세운 비()라고 되어 있는데 무덤에서 거의 수백m 떨어진 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