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신원사(新元寺) 중악단(中嶽壇)의 일필휘지(一筆揮之)

2021. 8. 14. 21:18여행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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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악단 솟을 대문 뒷편에 달린 현판에는 대원군 이하응이 친필로 썼다고 알려진 낙은재(樂隱齋)라는 글씨가 있다.

 

 

문화콘텐츠닷컴은 공주 계룡산 신원사 중악단을 이렇게 묘사했다. 

 

조선 태조 3년(1394)에 창건한 신원사의 산신각이 있는 곳이 중악단이다. 산신은 원래 산하 대지의 국토를 수호하는 신이며, 산신제는 민족 정기의 고양과 모든 백성의 합일 및 번영을 기원하는 행사인 팔관회를 후에 기우제, 산신제라 부르게 된 것이다.

제단의 명칭은 계룡산신 제단이라는 뜻에서 계룡단이라고 하였으나, 고종 때 묘향산과 지리산 산신각을 각각 상악단과 하악단이라 지칭하고는, 두 산 사이에 있는 계룡산 산신각을 중악단이라 부르게 되었다.

구릉지에 동북, 서남을 중심축으로 하여 대문간채, 중악단을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하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는데, 건물 배치와 공간 구성에 단묘 건축의 격식과 기법을 엄격히 적용하고 있다.

계룡산 중악단은 궁궐 양식을 그대로 축소하여 만든 건물로 안에는 산신도가 모셔져 있다. 유교를 치국이념으로 하였던 조선왕조의 삼악(상악, 중악, 하악) 가운데 하나로 유일하게 현존하고 있으니, 그 역사적 상징과 구조적 측면에서 매우 귀한 유적으로 꼽힌다. .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1394년 이곳에서 처음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지며, 1651년에 제단이 폐지되었다가 그 후 1879년, 명성황후의 명으로 다시 짓고는 중악단으로 이름을 명명하였다.

특히 대문간채의 중앙 및 중문간채의 중앙 판문에는 신장상을 그렸고, 이들의 화방벽 및 둘레의 담장에는 와편으로 수(壽). 복(福). 강(康), 령(寧), 길(吉), 희(喜) 등의 국민의 염원을 담은 문자와 무늬가 각각 상징적인 의미를 담은 채 장식되어 있다.

삼국시대 산천에 대한 제사가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국가행사제로 거행되면서 무병, 장수, 복록과 같은 개인의 행운을 기원하는 ‘수호신’에서 기우제나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호국신’의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곳의 담장에는 개인의 기도와 더불어 나라의 안위를 위한 마음 깊은 곳 온갖 바람이 여러 종류의 문자와 길상무늬로 가득 차 있게 된 것이다.

신원사 중악단 처마 밑, 바람에 흔들려 퍼지는 은은한 풍경소리를 들으면, 조선의 국운을 빌었던 명성황후의 애절한 소망이 아직도 들리는 듯 하다. 산신령께 국태민안을 기원하지 않았을까.

참고자료
문화콘텐츠닷컴 원문보기

[네이버 지식백과] 계룡산 중악단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국 전통의 담), 2010., 한국콘텐츠진흥원)

 

 

 

 

 

8월 13일 오후 18시 30분경에 이곳에 도착해서 현판을 보니 새로운 현판이 달렸다. 

 

 

 

'계룡산신제일도장'이란 현판도 예전에 못 보던 것이다.

 

 

 

 

조선 시대 궁궐 건축양식으로 부드러운 곡선과 균형미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산신각 중앙 위 현판에는 힘찬 글씨체로 '중악단'이라고 쓰여 있다. 

 

 

 

 

현판 왼쪽 관지에 '辛卯年  直指御史  李重夏 書(신묘년 직지어사 이중하 서)'라고 쓰여 있다.  직지어사(直指御史)는 임금의 명령을 직접받아 파견된 어사로써 암행어사(暗行御史)를 달리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직지어사 直指御史  李重夏[1846년(헌종 12) ~ 1917년]에 대한 행장을 살펴보니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후경(厚卿), 호는 규당(圭堂)·탄재(坦齋). 현감 이인식(李寅)의 아들이다.

 

좌랑()으로서 1882년(고종 1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교리가 되었다.

1885년 공조참의·안변부사가 되었다가 토문감계사(使)로서 청국측 대표 덕옥()·가원계()·진영() 등과 백두산에서 백두산정계비와 토문강지계()를 심사하였다. 국경 문제를 놓고 담판을 벌였으나 견해차가 심한데다 청국측이 강압적인 태도로 나와 회담은 실패하였다.

 

1886년 덕원항감리()가 되었다가 1887년 다시 토문감계사가 되어 회담을 재개했는데, 청국측이 조선측의 주장을 거절, 위협하자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국경은 줄일 수 없다.”며 끝내 양보하지 않았다. 1890년 이조참의가 되어 충청도암행어사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894년 외무부협판·의정부도헌이 되었고,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도선무사(使)·영월영천안핵사(使)·경상도위무사(使)로 진압에 앞장섰다. 이 해 말 김홍집내각의 내무부협판이 되어 갑오농민운동 때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나, 이듬해 김홍집내각이 무너지고 지방제도가 개편되자 대구부관찰사로 임명되었다.

 

관찰사 재직시 을미의병 봉기로 많은 관리가 희생되었으나 이중하는 민심을 얻어 무사하였다. 1898년 만민공동회()의 요구로 성립된 중추원에서, 무기명투표로 11명의 대신후보자를 선출할 때, 2위로 천거되기도 하였다. 1903년 외무부협판 칙임2등()이 되어 문헌비고찬집당상()을 맡았다. 그 뒤 평안남도관찰사·경상북도관찰사·궁내부특진관을 거쳐 장례원경()이 되었다.

 

1909년 일진회()가 대한제국과 일본의 '정합방론()'을 주장하자 민영소()·김종한() 등과 국시유세단()을 조직하여 그 해 12월 5일 원각사()에서 임시국민대연설회를 열고, 그 주장이 부당함을 공격하였다. 또, 1910년 규장각제학으로 한일합방에 극렬히 반대하였다. 지방관리 재직시 청렴하고 강직한 인품으로 이름이 높았다.

 

저서로 『규당문집』·『감계전말()』·『감계일기()』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중하[李重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