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생활 에피소드(11)

2011. 7. 31. 18:56지난 날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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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는 곳에는 "의식주"가 반드시 존재를 하지요. 군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먹고, 입히고, 재우고

그리고 나서 뭐라도 시켜야지 먹이고 입히지도 않으면서 전쟁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후반기 교육하는 곳이 그런 것을 가르치는 곳이었습니다.

 

조리하는 병사(취사병), 밥하는 것이야 별로 배울게 없겠지만 반찬 만드는 것은 솜씨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교육도 있었던 것 같고, 1종(주,부식), 3종(유류),  2.4종(피복, 개인 장구류)의 수불, 세탁, 피복이나 군화수리, 전사하거나 사고로 죽은 사병의 시신을 처리하는 "영현", 낙하산 접는 것을 가르치는 것 등 등 정말로 이상한 것들만 집합해 놓은 것 같은 후반기 교육이었습니다.

 

교육중간에 가족들이 면회오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지금은 100일 휴가가  있지만 그때는 훈련소에서는 면회가 없고,  자식이나 형제들을 군대에 보내놓고 난 후  처음하는 면회였으니 가족이나 병사들의 기대가 얼마나 컸을런지 미뤄 짐작을 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후반기 교육을 받고 3주쯤으로 생각이 되는데 일요일 면회가 있다고 합니다. 당일 호명이 된 병사는 못내는 광이지만 군화도 닦고,  옷도 깨끗이 세탁해서 입고, 정문 주변에 있는 넓은 공터에서 가족들을 만나 가족들이 가지고 온 음식을 먹으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나에게는 아무도 면회를 오지 않았지만 같이 입대를 했던 중학교 동기의 가족들이 면회를 왔었습니다. 비록 우리 가족은 아니지만 그래도 동기의 가족 편으로 내 소식을 집에 전할 수가 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고, 그렇게 첫번째의 면회는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1주일 후,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내게도 면회가 왔다고 준비를 하라고 합니다. 군복과 군화를 급히 입고, 신고,  면회소에 나가 보니 형님 혼자서 면회를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얘기인 즉선 저번에 면회 왔다 갔던 중학교 동기의 부모님이 일부러 형을 찾아가서 동생인 나를 병참학교에서 보았는데 내가 가족이 온 것으로 착각하고 나왔다가 돌아가는데 눈물을 글썽이더라고 전하더랍니다.

 

형이 그 얘길 듣고 일주일간 마음도 아프고, 뜬 눈으로 지새다시피 하다가 일요일이 되자 득달같이 달려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는 모양입니다.

형님이 그렇게 생각하고 찾아 주니 고맙기가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형님과 하루 해를 같이 보내고, 나는 일병을 달고 휴가 때가 되면(당시는 10개월이 되면 첫 휴가를 갔음) 고향으로 가겠다고 약속을 했고, 형님은 무사히 군복무를 하고 있는 나를 보고 나서 안도하면서 고향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입대할 때 논산훈련소에서 탈영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형이었으니 행여나 탈영할까봐 말은 안하지만 노심초사 하였나 봅니다..

 

후반기 교육에서 각종 물품을 수령하는 절차, 불출증을 가지고 불출하는 방법 등의 보급 행정을 배우면서 때때로 평가 받기도 하고, 그러면서 시간은 흘렀는데,  사실 나는 후반기 교육대에서 처음 서울대 상대, 연대 상대 출신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보급 주특기라서 그런지 상대출신들이 가끔씩 섞여 있었지요. 시골학교에서 서울대 어떤 학과라도 들어가면 플래카드가 걸리고, 난리가 나는데  서울대 상대출신을 한 내무반에서 보고 있으니 군대란 곳이 참 묘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서울대, 연세대 상대 출신이라해서 군대에서도 마찬가지로 두각을 나타내라는 법은 없었나 봅니다. 내가 근무했던 자대에서는 졸병 통신병 중에 고대 법대를 수석 입학하였던 병사가 있었는데 고문관도 그런 고문관이 없었지요. 사회에서 공부 잘하는 것하고, 군대생활 요령있게 하는 것하고는 별개인가 봅니다.

 

이상하리만치 군대 공부가 술술 풀립니다. 공개적으로 외우는 암송평가에는 두각을 나타내서 다른 병사대신 참가하기도 하고, 어쨌던 내가 100여명 중에서 다크호스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얼마 동안 후반기 교육을 받았는지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대략 약 7~8주 정도가 아닌가 생각되네요.

 

후반기 교육이 끝나면 전방, 후방 각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데, 졸업이 다가오니 서부전선의 101보충대, 동부전선의 103보충대, 그리고 제일 선호하는'후방' 이렇게 있었는데,

이 세곳을 놓고 동기들이 모여서 사다리를 탑니다. 장난으로 그렇게 하였던 거지요. 나는 항상 103보충대로 떨어지는 것으로 사다리가 타지고, 내 중학교 동기는 후방으로 자주 나와서 싱글벙글 웃습니다. 비록 장난이라도 후방으로 떨어지니 기분이 좋았겠지요.

 

드디어 시간도 흘러서 졸업식 날입니다. 그런데 구대장(하사)이  갑자기 나를 찾습니다. 나는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데 그의 말이 내가 1등이랍니다. 그래서 예행연습을 하여야 하니 빨리 행사장에 미리 오라고 합니다. 고향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1등을 하였던 기억이 가물 가물한데 군대에서 1등을 하다니~ 그리고, 서울대, 연대 상대출신들도 있는데서..  나는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1등에게는 부상으로 자대에 가서 1주일의 특박이 있다고 어떤 장교가 얘기를 해줍니다. 전부

부러워서 야단들입니다. 그렇게 예행연습을 하고 병참학교에서 교육중인 교육생들이 연병장에

모두 집합한 가운데 수료식이 열리고, 나는 병참학교장 상을 받았습니다. 병참학교장은 육군 준장입니다. 새까만 이등병이 원스타 앞에 서서 상장을 받기위해 거수경례를 하였을 때 사실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군대에서는 장성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수료식이 모두 끝나고, 오후에 자신들이 제대할 때까지 생활해야 할 부대가 정해졌습니다. 나는 사다리타기의 징크스를 깨고, 오산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고, 중학교 동기는 인제 가면 언제 오나 하는 103보충대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쪽으로 떨어지리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그이기에 그의 상실감은 이만 저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습니다. 뭐라고 위로할 수도 없고~

 

다음날 아침 모두 각자의 길을 가기 위해 헤어지는데 친구는 나를 붙들고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오열을 합니다. 나는 그냥 그의  울음이 그치기만을 기다립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떠난 친구와는 그뒤로 지금까지 한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때의 그의 슬프고 괴로운 표정이 생생한데도~ 그렇게 후반기 교육은 끝이 났습니다.

 

因緣生(인연생) 從緣生(종연생)~

인생은 인연따라 왔다가 인연따라 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23살에 고향을 떠나 사회생활을 갓 시작하여 그때의 인연들과 만났다가 헤어졌고, 논산훈련소서 만났다가 헤어졌고, 후반기 교육하면서 새로운 인연들과 만났다 헤어졌고, 또 다른 인연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이 나이까지 왔지만 앞으로 또 얼마의 만남과 헤어짐이 있을런지~ 인생이 허무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병참학교 부대보급병반 제 45*기 졸업기념사진,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중대장이고, 양옆으로 하사(구대장)들입니다. 제일 앞줄 우측에서 3번째가 접니다. 네 번째가 친구지요. 흑백의 희미한 사진이지만 한 사람, 한 사람 전부 기억이 납니다. 신기해요!!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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