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1. 19. 22:12ㆍ살아가는 이야기
도회지의 은행가로수도 파랗게 입었던 여름옷을 누렇게 색이 바래 벗어던졌다.
오래간 만에 시골을 간다.
대구를 지나고 칠곡 동명을 지나, 긴 고개를 넘어가는 찰나 눈앞에 다부동일대가 잡힌다.
한국전쟁때 피에 젖고, 물들었던 곳, 저곳이 뚫렸다면 나도 김정일 치하에서 신음하겠지~~
고개를 넘어가니 멀리 짙은 비구름 사이로 다부동과 우측의 유학산(해발 839m)이 가을을 머금은 채 안개와 벗을 하며, 짐짓 과거사를 잊은 척하면서 그곳에 자리잡고 지나는 길손들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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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에서 격전지 다부동에 관한 글이 있기에 퍼왔다.
[옛길기행] <43>칠곡 유학산 '피의 능선길' 능선마다 포탄 골골이 핏빛…일진일퇴 다부동 전투의 현장 6`25전쟁 당시 왜관∼다부동을 잇는 유학산의 방어선은 낙동강전선의 교두보이자 대구를 방어하는 최후의 보루였다.
1950년 7월 29일부터 9월 24일까지 2개월여 전투 동안 아군, 적군 포함해 2만7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다부동 전투의 현장이 바로 유학산이다.
왜관 방향 79번 지방도에서 이어진 팥재~도봉사~839고지~헬기장~유학산(팔각정)~837고지~793고지~674고지~다부동전적기념관. 전적지를 따라 난 등산로를 걷다 보면 6`25전쟁 최대 격전지에서 빚어낸 참상의 아픔들이 되살아나는 듯하다.
다시 말해 ‘피의 능선길’은 장엄하다 못해 처절함이 골골마다 묻어나는 역사의 현장인 것이다.
◆6`25전쟁 최대 격전지 참상의 아픔 되살아나는 듯
팔공산이 팔공산맥 지나 가산산성을 거쳐 칠곡 다부동에 이르렀다가 두 갈래로 갈라져 아래로는 황학산, 소학산으로 연결되고, 위로 뻗은 산이 유학산이다. 호국의 고장 칠곡 유학산은 가산면 학산, 학상, 학하리와 석적면 성곡리에 동서로 길게 병풍을 쭉 펼쳐 놓은 것처럼 뻗어 있다.
서남쪽 산 중턱에는 깎아지른 듯한 웅대한 바위절벽이 솟아 정상까지 이어지고, 절벽 밑에서 고개를 들면 까마득히 보이는 정상이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그 높이가 어른 키로 50질이 된다 하여 ‘쉰질바위’, 또는 학이 노닐던 곳이라 해 '학바위'라고도 부른다. 산악인들에게는 암벽등반 훈련장으로 유명하다.
산행 들머리인 팥재 주차장에서 약 50분 오르면 도봉사다. 소형차로 도봉사까지 올라가는 등산객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도봉사에서 왼쪽 길을 따르면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 장승이 산행 초입에 반기고 섰다.
도봉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비구니들만 거주하는 사찰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신라시대의 고찰 천수사의 옛 터에 건립됐다고 한다. 1990년대 말에 대웅전과 요사채, 산신각을 증축했다고 한다.
잠깐이다 싶어 고개를 들면 헬기장이다. 여기서 5분 더 오르면 유학산 팔각정에 닿는다. 유학산의 정상이다. 팔각정에 오르면 남으로 소학산, 황악산과 중앙고속도로의 부드러운 흐름이 보이고, 북으로는 남구미와 선산 방향의 조망이 확 트인다.
정상에서 서쪽으로 1시간 거리에서 양 갈래 길이 나온다. 오른편은 신동리 쪽이고 북쪽으로 너추리, 절터, 용솟음바위, 용담사, 학상리로 산행을 이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동쪽 다부동 방향으로 주능선이 이어져 대부분은 이 길을 따른다.
약 5분 지나면 송신탑이 나오고, 좀 더 가면 작은 헬기장을 만난다. 약간 내리막길이 이어지다가 철계단을 내려선 후 오르막이 시작된다. 20분간 더 오르면 전망바위다. 남으로는 바위절벽이고 북사면은 철쭉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20분 더 가면 유학산 제2봉인 837고지이다. 한국전쟁 때 다부동 쪽은 국군이 막고, 낙동강 쪽은 미군이 맡아 경찰대와 주민들이 연합해 인민군 정예 3개 사단을 섬멸한 봉이다.
한국전쟁 초반 전세에 밀린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고 북한군과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유학산 ‘다부동 전투’의 중심이다.
8, 9월의 폭염 아래 수십 차례나 계속된 피의 탈환전이 이곳 유학산 자락에서 펼쳐져 피아 간 수만을 헤아리는 젊고 고귀한 생명들의 희생을 가져왔다. 유학산에서는 멀리 908호선 도로와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과 함께 ‘금무봉 전투’ ‘자고산 전투’ 및 융단폭격 등으로 대표되는 조국수호 최후의 보루 현장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그 유명한 837고지. 1950년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유학산 동편에서 국군 제12연대 제1대대와 북한군 사이에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전장인 것이다.
유학산과 동쪽 줄기 837고지 일대는 높이 800m 이상의 분수령 능선이 동서로 4㎞나 뻗어 있는 고지다. 고지의 북측 경사면은 경사가 완만해 정상에 오르기 쉬운 반면, 남쪽 경사면은 북쪽과 달리 가파르다.
특히 등고선 700m 지점에서 정상까지는 50m 높이의 암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계곡의 시류점이 거미줄과 같이 엉켜 있다. 유학산의 고지는 5번도로와 25번도로를 통해 대구로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지점이다. 따라서 837고지는 다부동전투에서 최고의 요지였다.
국군 제12연대가 사단 일선 중앙의 숲데미산(수암산)에서 유학산 일대를 담당했다. 8월 13일 아침 왼쪽으로부터 제2대대를 숲데미산에, 제3대대를 유학산 주봉인 839고지에 각각 배치해 놓고 제2봉인 837고지에는 제1대대를 배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837고지는 국군 1대대 병력이 배치되기 전에 북한군이 먼저 점령해 있었다. 그 때문에 837고지의 반격과 후퇴는 유학산 일원의 전투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였고, 국군의 피해도 컸다.
1950년 8월 22일에 우측 다부동의 제11연대 제3대대는 674고지를 탈환한 후 위봉(威鳳) 골재까지 진출했다.
8월 23일 오전 2시 무렵 제11연대 제1대대는 837고지를 탈환한 후 820고지를 넘어가 제3대대와 만나고, 북쪽 경사면 5, 6부 능선까지 진출해 북한군 패잔병을 제압했다. 같은 날 오전 6시 무렵 좌측의 제3대대도 유학산 주봉을 탈환했다. 이로써 국군이 유학산을 완전 장악한 것이다.
다시 말해 유학산은 대구 진입로를 감찰, 방어하는 제1의 요지여서 인민군의 강공세에 방어선이 동명 지천까지 밀렸으나, UN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에 맞춰 한미 연합작전으로 다시 격퇴시켰다. 유학산은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55일 동안 9회에 걸쳐 주인이 바뀌는 치열한 전투로 수만 명이 희생되는 참혹한 전투를 치른 곳이다.
837봉을 지나면 길은 완만하나 양쪽으로 급사면을 이루고 있다. 약 20분 더 오르면 유해발굴지점이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유해 2구 206점, 유품 264점'이라고 적혔는데, 이것만 보아도 얼마나 치열한 전투였는가를 알 수 있다.
이곳이 갈림길이다. 오른쪽 주릉을 타고 내리막길로 15분 가면 ‘전적비 1.56㎞, 837고지 1.24㎞’ 이정표가 있다. 여기가 1950년 8월 13일부터 15일까지 유학산 동편에서 전투가 벌어진 674고지이다.
674고지는 동쪽에 다부원 협곡을 통하는 북편관문과 서쪽으로 왜관 방면 도로를 잇는 Y선의 감찰 방어고지다. 인민군이 차지한 이 고지는 8부 능선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1대 3의 열세한 병력에다 학도병과 신병으로 이뤄진 아군은 산에서 내던지는 수류탄 공세로 번번이 물러서야 했다. 10여 차례나 뺏고 빼앗기는 육탄전을 거듭하다가 산악전술상 개인장비를 가볍게 했다. 기관총과 박격포의 지원사격 아래 특공대가 백병전을 감행해 비로소 완전 탈환했던 피로 얼룩진 고지다.
◆곳곳에 피로 얼룩진 고지
674고지를 담당한 제12연대 제1대대는 8월 13일 오후 2시 무렵 사단 사령부로부터 고지 탈환을 명령받았다. 같은 날 오후 5시 무렵 제12연대 제1대대는 다시 다부동으로 역행군해 674고지 맞은편의 516고지 밑에 포진했다. 포진한 뒤 바로 진지 구축 작업을 실시했다. 이 와중에도 북한군의 포격이 집중됐다. 8월 14일 오전 3시 무렵에는 국군 헌병 경찰대로 위장한 북한군과 근접 사격전이 벌어져 북한군 4명, 국군 2명이 전사했다.
8월 14일 새벽 국군 1`3중대가 674고지 8부 능선까지 진출했으나 674고지에서 방어하는 북한군으로 인해 4, 5부 능선으로 후퇴하고, 209고지에 대대 관측소를 설치했다. 8월 14일 오후 2시부터 674고지를 공격해 정상을 탈환했지만 출격한 미 공군기가 정상을 무차별 폭격하는 바람에 고지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8월 15일 국군은 오전 8시 3, 4부 능선에 배치된 박격포의 지원을 받고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가파른 지형으로 인해 박격포 사거리 측정이 어렵고 북한군은 1개 대대로 증강돼 있어 고지를 탈환하지 못했다.
8월 15일 오후 학도병과 신병들로 구성된 제11연대 예하 대대(11연대 3대대, 15연대 2대대 배속)가 다부동에 배치되면서 사단의 전투 지형 선이 9㎞에서 8㎞로 되고, 제3대대가 제1대대를 대신해 674고지를 담당하게 됐다.
제12연대 제1대대는 다부동 서쪽 2㎞에 위치한 학산리의 듬티로 이동했다. 이후 제11연대 제3대대는 10여 차례 674고지를 주고받는 치열한 전투 끝에 8월 22일 새벽 특공대를 투입, 고지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는 계속 내리막길이다. 15분여 가면 400여 개의 통나무가 약 50m 길이의 계단을 이루고 있고, 계단을 내려서면 송전탑이 나온다. 여기서 10분 거리에 왜관 방향 79번 지방도를 만나게 된다. 국도를 건너 중앙고속도로 밑을 지나면 다부동 전적기념관에 도착한다.
1981년 11월 30일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에 개관한 전적기념관은 전시관과 기념비`야외전시장`관리사무소 등의 시설이 갖춰져 있다. 특히 기념비는 구국 용사를 위한 충혼비로, 1995년 6월 25일에 25m 높이로 세워졌다.
이 밖에도 야외에는 조지훈의 시비와 전차`장갑차 등 대형 전투장비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또 외관을 전차 모양으로 꾸민 전시관에는 57밀리 무반동총과 81밀리 박격포, 90밀리 로켓포, 3.5인치 로켓포 등 전쟁에 사용되었던 각종 화기와 노획물들이 전시돼 한국전쟁의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칠곡`김성우기자 swki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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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에 개관한 전적기념관은 전시관과 기념비·야외전시장·관리사무소 등의 시설이 갖춰져 있다.
유학산 정상 부분(839m)에 지어진 정자다. 등반객들의 좋은 쉼터가 되고 있다. 팔각정에 오르면 남으로 소학산과 황악산이 보이고 북으로는 남구미와 선산 방향의 조망이 확 트인다.
칠곡군에서 유학산을 찾는 등산객 등 탐방객들을 위해 대형 안내 표지판을 설치해 놓고 있다.
도봉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신라시대의 고찰 천수사의 옛 터에 건립됐다고 한다. 1990년대 말에 대웅전과 요사채, 산신각을 증축했다.
유학산에서 대각선으로 마주하고 있는 해발 450m의 이름없는 봉우리, 이곳은 유학산(839m)의 절반 높이밖에 되지 않는데 당연히 높은 곳에 내려다보면서 공격하는 적들에게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었으리라, 물론 북쪽인 유학산에는 괴뢰군들이 있었을 테고, 그보다 조금 남쪽인 이곳에는 한국군이 주둔하였을 텐데, 주민들의 목격담을 들으면 옆의 작은 개울로 전사자의 검붉은 피가 흘러서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귀신골이라고 하여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구름이 뒤덮인 완만한 골짜기를 이루는 유학산 능선, 집들이 제법 높은 곳에 위치를 하고, 저곳에는 밤이면 밤마다, 되놈 귀신, 함경도 귀신, 평안도 귀신, 황해도 귀신들이 각자의 사투리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ㅋㅋ~~^^
돌아오는 길에 찍은 유학산 정상
유학산 맞은 편에 있는 황학산의 한 봉우리, 구름이 이는 것이 마치 혼령이 이는 듯하다.
경북 구미시 해평면의 어느 낙동강변, 강속의 퇴적물이 깨끗하게 치워진 것을 볼 수가 있다.
해평면 해평리 숭선대교에서 본 낙동강 하류
해평면 해평리 숭선대교에서 본 낙동강 상류지역, 좌측으로 멀리 '구미보' 상부가 보인다.
낙동강에서 건져 올린 퇴적물을 논에다 붓고, 논 돋우기 작업을 하고 있다. 마치 봄에 모를 내기 전의
모습과 비슷하다.
낙단대교 위에서 상류 쪽을 보니 멀리 낙단교(洛丹橋)와 낙단보의 모습이 보인다. 낙단교는 상주시 낙동면과 의성군 단밀면 사이의 낙동강에 만든 교량이다. 낙단교는 낙동진(洛東津)이 있었던 자리에 세워졌으며, 1985년 4월 23일에 착공하여 1986년 8월 30일에 완공되었는데, 당시 상주 국회의원은 전두환 전 대통령과 동서지간인 김상구 전 호주대사가 힘을 쏟아 그동안 상주, 선산, 의성 3개 군민의 숙원이던 다리를 1986년 9월 16일에 전두환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이 있었으며, 다리의 길이는 434m, 폭은 10m이다. 일개 교량 준공식에 대통령이 참석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낙단대교 위에서 하류쪽을 본 모습
천평 - 상주 간의 국도의 낙동을 지나면서, 비가 내린 후여서 멀리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다.
메타쉐콰이어 가로수가 상주시내 진입을 마중한다.
곶감이 가지런하게 달려있다.
습도가 낮아야 곶감이 제대로 건조되는데, 대형선풍기로 곶감을 말린다.
군데군데 곰팡이 핀 곶감이 보인다. 올해는 습도가 높아서인지 곶감 꼭지가 물러져서 꼭지가
떨어지면서 밑으로 곶감이 낙하한다고 한다. 아무래도 올해에는 곶감이 비싸질 것 같다.
겨우내 우공들이 먹을 사료가 가을겆이가 끝난 들판에 놓여있다.
돌아오는 길에 구름사이로 비치는 서광(?), 좋은 일이 있으려나??!!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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