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들바위와 거북바위

2011. 12. 31. 22:19여행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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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전공하고 전혀 다른 과목을 수강신청하고, 교수를 따라서 대구시내와 인근의 작은 유적을

답사하고 다닌다.

 

중구 대봉동에는 건들바위라는 바위가 있다. 건들 건들 흔들려서 건들바위던가?

아니면 애초에 '건달바위' 동생이 '건들바위' 인가?

 

* 건들바위

 

대구광역시 중구 대봉동에 있는 기자석(祈子石).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2호. 고생대에 암벽의 균열로 생긴 입석으로 옆 절벽과 더불어 대구분지의 지반구조를 잘 나타내는 바위이다.

 

삿갓 쓴 늙은이와 같다 하여 ‘삿갓바위’라고도 한다. 200년전만 하더라도 이곳은 맑은 물이 흘러 낚시를 하면서 즐기던 경치좋은 명소였다. 서거정(徐巨正)의 대구십경(大邱十景) 중의 입암조어(笠巖釣魚) 시제(詩題)가 바로 이곳이다.

 

1776년(정조 1) 대구판관으로 부임한 이서(李?)가 이 일대의 하천 범람을 막기 위하여 제방을 쌓아 물줄기를 신천(新川)으로 돌렸기 때문에 물이 흐르지 않는다.

 

그 후로 질퍽한 논으로 변하여 이 바위는 절벽 앞 논 가장자리에 위치하게 되었다. 때때로 무당이나 점장이가 촛불을 켜놓고 치성을 드리기도 하고, 기자석으로써 아낙네의 비손하는 곳이기도 하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안내문을 확대하여서 읽어보니

 

대구 층(大邱 層 : Daegu Formation) 약 1억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최적된 지층이며, 경상층군(慶尙層群)의 하부로부터 7번째 지층에 해당된다. 이 지층은 적색, 황갈색 또는 암회색을 띠는 이암(泥岩),

셰일(Shale), 사암(沙岩)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적색을 띠는 이암과 셰일이 많다는 점이 특징이다.

 

드물게 회색석회암의 박층(薄層, 얇은 층)을 협재(狹在)하기도 한다. 물결자국, 건렬 등의 퇴적구조는 많이 발견되지만, 하천이나 호수에서 퇴적되었기 때문에 화석은 매우 드물다.

 

이러한 대구층이 도시배발로 인해 거의 사라져 그 특색을 찾기 어려우나 이곳에 그 일부가 남아있어

보존한다.

 

 

 

 

 

 

 

 

대구 향교 명륜당에서 결혼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도에 표신된 것을 보니 대구 중구 봉산동 제일중학교 자리에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거북이가 땅을 파고 들어가 앉아있는 형상이다.

 

 

관덕정 순교 기념관

 

 

"성 이윤일 요한" 立像

 

우리나라 성인 103위 가운데 첫 번째에 이름을 올린 평신도가 정하상 바오로라면, 마지막에 이름을 올린 평신도는 이윤일 요한이다. 대구 남문 밖 관덕정에서 참수당한 이 성인의 유해는 현재 대구 관덕정순교성지에 모셔져 있다.

이윤일 성인은 충청도 홍주 출신의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충청도를 떠나 경상도 상주 갈골로 이주했으며,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는 다시 문경의 여우목(호항리)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당시 그곳은 성인의 처갓집 식구들(순교자 박사의 후손)이 많이 살던 곳이었다.

103위 성인 가운데 많은 이들이 ‘회장’의 직분을 다했던 것처럼, 이윤일 요한 또한 공소회장으로 활동하며 이곳에서 외교인 30호를 입교시켰다. 그는 본래 성품이 순량해 남을 꾸짖거나 탓하는 일이 없었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화평한 모습을 보였다고도 전해진다. 또 아버지에게 효성도 지극해 동네 외인들이 그를 위해 효자문을 세워야 마땅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터지고 그 여파가 경상도에까지 이르러 이윤일 성인은 그해 11월 가족을 포함한 마을교우 30여 명과 함께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그는 우선 문경관아로 끌려갔는데, 3일 동안 혹형과 고문을 당한 후 상주로 이송됐다. 상주에서는 한 달에 세 번씩 3개월 동안 혹형과 고문을 받았다고 전해지며, 다시 대구감영으로 이송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윤일 성인은 사형선고를 받고도 본래의 여유와 기쁨을 잃지 않으며 끊임없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다른 이들에게 모범이 됐다. 1867년 1월 21일, 대구 남문 밖 관덕정에서 52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의 시신은 후손에 의해 처음 대구 비산동 날뫼 뒷산으로 이장됐다가 경기도 용인군 묵리, 미리내성지 무명순교자 묘역을 거쳐 1987년 대구 성모당에 안치됐다. 이후 성인은 대구대교구 제2 주보성인이 됐으며, 1991년 관덕정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봉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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