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13. 21:55ㆍ여행이야기
노보텔 체크 카운터 앞에서 네다바이 당한 이후에 일행들의 가방멘 모습을 보니
어지간한 소매치기는 포기하는 것이 낫다 싶을 정도로 앞으로 단단히들 메고있네 그랴~
파리를 갔으니 파리 시청사 구경하는 것이 예의고 순서겠다.
첫 인상은 공무원들 근무하는 곳이 이렇게 멋져도 되남? 대리석 건물이 아름답고 넘 멋져보여서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대리석 건물도 이태리 로마에서 본 건물에 비하면 새발의 피란 것을
인식하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파리 시청 청사 건물 모습
파리 시청 청사 측면 모습
다음으로 노틀담의 꼽추의 배경으로 잘 알려진 노틀담 사원으로 향했다.
노틀담 사원은 고딕양식 건축물 중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어지는 중세의 성당으로
파리의 발상지인 시테섬 동쪽에 있다. 1163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00여년에 걸친 공사끝에
완성된 성당으로 지금도 파리 대주교가 안에 거처를 하며, 프랑스 최대의 파이프오르간이 있고
내부 중앙에 '장미의 창'이라고 하는 스테인드 그래스가 있다.
노틀담 사원 전경
내부 중앙에 있는 화려한 스테인드 그라스
다음 장소로 움직이는 도중에 콩코드 광장을 지나게 되었다.
콩코드 광장은 동서길이 360m, 남북길이 210m로 파리시내에서 가장 큰 광장으로 동쪽은 튈르리 공원에 이어지고 북쪽은 루아얄가(街)를 통해서 마드렌 성당과 마주하며, 서쪽은 상젤리제 거리와 통해있고 남쪽으로는 세느강에 걸쳐있는 콩크로드다리가 있다. 광장의 중앙에는 이집트로부터 기증받은(?)
이집트 룩소르의 오벨리스크가 위용을 뽐내고 있다.
콩코드 광장은 18세기 경에 루이 15세의 명에 의해 조성이 되었으며 가브리엘이 설계하였고 중앙에
루이 15세의 像이 있어 루이 15세 광장으로 불리다가 프랑스 혁명 때 루이 15세 상이 파괴되고
'혁명광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등 1,000여명이 기요틴에 의해 처형된 곳이며, 뒤에 화합을 뜻하는
'콩코르드 광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 단두대(斷頭臺)또는 기요틴(Guillotine) [출처 : 위키 백과사전]
1791년에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국민의회에서 계급에 상관없이 참수형에 처할 죄수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왕의 주치의이자 외과학회의 사무국장이던 안토닌 루이 박사와 파리 의료기기부의 해부학 교수인 조세프 이그나스 기요탱 박사를 필두로 이 건에 관한 위원회가 형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이탈리아의 “만나이아” (혹은 만나자)와 스코틀랜드의 “메이든”, 그리고 “헬리팩스 기벳” 등의 참수기구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전처럼 무딘 도끼나 교수형으로 사형수의 형을 집행하는 것은 인도적이지 않고, 형집행자들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주기에, 기구로 형을 집행하자는 주제의 논문으로 제출하였다. 기요탱은 이 기구로 사형수들이 고통없이 죽을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실제로 이 기구의 설계에 기요탱 박사의 공헌은 미미하고, 안토닌 루이 박사가 기요탱 박사가 제안한 생각을 발전시켜, 설계한 뒤 이 기구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그 사형기구가 루이종, 또는 루이세트로 불렸으나, 언론에서 기억하기 쉽다는 이유로 기요탱 박사의 이름을 따서 이름붙여졌다. 그 결과 기요탱 박사의 이름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단두대의 구조는 2개 기둥이 맨꼭대기에 연결되어있고 두 기둥 사이에 날이 비스듬한 묵직한 무쇠칼이 끼워져 있다. 사형 집행인이 밧줄을 끊으면 칼이 떨어져 목을 자르는 것이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도 여기서 죽었으며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인 당통 역시 이 기구로 인하여 죽었고, 과학자 라부아지에도 여기에서 죽었다. 단두대로 많은 사람을 죽인 로베스피에르는 역설적으로 이 기구에 의해 죽었다. 단두대를 고안한 기요탱 박사도 단두대에서 죽었다고 전해지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는 1814년 5월 26일에 자연사하였다.
프랑스에서 단두대를 마지막으로 사용한 때는 1977년이었으며, 1981년에는 사형제를 폐지했다.
1930년에 아돌프 히틀러는 기요틴을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데 사용하였으며 그 수만 2만명을 넘는다. (이는 프랑스에서의 기요틴으로 인한 죽은 자들의 수 보다 많은 수치이다.)그 밖에도 벨기에나 스웨덴,남베트남,룩셈부르크도 단두대를 사용한 바 있다.
멀리 에펠탑이 보이는 콩코르드 광장
콩코르드 광장의 오벨리스크[ obelisk ]
* 오벨리스크[ obelisk ] [출처 : 네이버 용어사전]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을 상징하는 돌로 된 4각주. 끝이 가늘고 피라미드형을 한 정상에 황금을 붙였으며 본체와 기대(基台) 표면에 봉헌의 명문(銘文)을 새겼다.
원래는 헤리오폴리스의 레신전의 성석(聖石) 벤벤을 모방한 것. 제5왕조(B.C. 2494경~B.C. 2345경)의 국왕들은 돌로 쌓은 오벨리스크를 신체(神體)로 하는 태양신전을 건립하고,
돌기둥 형태의 것은 제12왕조경(B.C. 1919경 이후)부터 신전내에, 신왕국시대(B.C. 1567경~B.C. 1085경)에는 필론 앞에 한쌍씩 세웠다.
대부분은 애스원산(産)의 화강암제. 후에 아시리아왕과 로마황제에 의하여 반출되어 현재 이집트 국내에 서 있는 것은 5기에 불과하다.
이 중 최대의 것은 카르나크의 아몬 대신전에 하트세프수트 여왕이 건립한 높이 30m의 오벨리스크이다.
런던, 파리, 로마, 이스탄불 및 뉴욕 등의 광장과 공원에도 이집트로부터 반출된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이집트 세력이 일찍부터 미친 시리아, 팔레스티나에는 이집트신들에 대한 신앙으로 중기 청동기시대에 세운 비블로스의 태양 신전에 높이 80~150cm의 소형 오벨리스크가 다수 봉납되어 오벨리스크 신전이라는 이름이 있다.
같은 형의 소형 오벨리스크는 팔레스티나와 시리아에서도 발견되어 동(東) 지중해 연안지방(레반트)에 대한 이집트 문화의 보급을 표시하고 있다. 특히 메소포타미아의 『마니슈투스의 오벨리스크』(수사 출토, 루브르 박물관), 아슈르바니파(?)의 『백작 오벨리스크』(니네베 출토, 대영박물관), 샤르마네얄 3세의 『검은 오벨리스크』(니므루드 출토, 대영박물관)라 통칭되는 4각주 석비는 국왕의 업적, 전쟁, 숭배 및 공납 등의 명문과 부조를 한 말하자면 기념비인데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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