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량의 백비(白碑)

2012. 12. 18. 19:55여행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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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량(朴守良, 1491 ~ 1554년)은 조선 중기의  정치가이다. 자는 군수(君遂), 시호는 정혜(貞惠), 본관은 태인(泰仁)이다

 

전남 장성(長城) 출생으로 1513년(중종 8년) 진사가 되고 1514년(중종 9년)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지평(持平)·헌납(獻納)·장령(掌令)· 사간(司諫)을 역임했다.

1534-5년 함경도 경차관(咸鏡道敬差官)이 되어 안원보 권관(安原堡權官) 전주남(全周男)이 야인(野人)들에게 결박당하여 소와 말을 주고 풀려난 사실을 감추고, 또 절도사도 보고하지 않은 죄상등을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이후 1536년 노모의 봉양을 청하여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제수받았으나, 삼공(三公)이 '대간이나 시종이 될 만한 이에게 적절치 않다'고 부당성을 간하자, 모친을 모셔오도록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통정대부로 승진해 병조참지로 임명되었고 또 의항(蟻項) 공사의 찰리사를 맡아 수행하였다. 또 동부승지로 특진되고, 이듬해 명나라 사신의 접대를 맡고 전위사(餞慰使)가 되어 의주까지 동행하여 사신을 전송했다. 그 후 호조, 예조, 공조참판(參判), 한성판윤(判尹)을 지냈다.

1546년(명종 1)에 동지춘추관사가 되어 《중종실록》, 《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고, 지중추부사·형조판서(判書)·우참찬(右參贊 : 1550년)으로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도총관(都摠管) 등을 겸직, 이듬 해 좌참찬(左參贊)에 올랐다. 이 해 노모(老母)의 봉양을 위해 사임을 요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전라도 관찰사(觀察使)에 전직되어 고향의 노모를 봉양하였다. .(1552년)다시 한성부 판윤 호조판서등을 역임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로 있다가 죽었다. 사후 왕명에 의해 찬성(贊成:종1품)으로 증직되었다.

 

주세붕과 깊이 교유하여 유림(儒林)간에 학자로 존경을 받았으며 신중·치밀하고 효성이 지극했으며 청렴하여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고,관리 생활 30여 년 동안 남의 집을 빌어서 살았다. 40여년의 관리생활에서도 집 한칸을 마련하지 못할 정도로 청렴결백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1544년 사망시 명종이 형편이 어려워 운구할 형편이 되지않는다는 말을 듣고 관인들로 호송케하고 장사비용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명종이 청백의 상징으로 백비(白碑)를 하사하였다고 하며 현재까지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묘소에 아무 글씨도 없는 한국에서 유일한 백비(白碑)가 서있다. 시호는 정혜(貞惠)이다.

[출처 : 위키백과]

 

 

 

 

 

 

 

 

무덤의 규모는 청백리에 맞지 않게 웅장하나 그것은 후일 후손들이 조금씩 조금씩 무덤을 손질하면서 이렇게 큰 규모가 되었단다. 지금보다 옹색하게 작게 하였으면 더욱 빛나보일 것을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곳에도 아무런 글씨가 없다.

 

 

 

청백리 박수량 선생의 白碑는 비석이 흰색이어서 백비가 아니라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아서 백비라고 한다. 지금 그의 후손 중의 한분이 장성 부군수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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