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 26. 14:47ㆍ살아가는 이야기
망산(望山) 이란 산 이름은 섬이나 내륙이나 많이 있다. 글자 그대로 바라볼 望이니
산에 올라가서 보이지가 않으면 산이 아니기에 거제도 홍포 뒷산도 망산, 일운면 지세포에도 망산, 사등면 장좌마을에도 망산, 통영 사량도에도 망산, 장승포도 뒤질세라 망산이 거기에 있었다.
그야말로 해발은 해변에서 시작되니 내륙처럼 그렇게 만만히 봤다가는 큰코다치는 수가 있다. 이 망산은 해발 220m인데 금방 오를 듯해도 그렇지가 않다. 저 앞쪽에 있는
봉우리가 장승포의 망산 정상이다.
장승포 해안로 산책길을 다니면서 저 표지판을 보면서 이곳 장승포에도 애국지사가
있었구나! 꼭 한 번 유택이라도 보아야지 하다가 비로소 오늘 실행한다. 산 위로
200m라고 하니 "별로 멀지 않구먼" 혼자 중얼거린다.
표지판 앞에 서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다니는 해안로를 바라본다.
거제도에서 재선충으로 신음 중인 소나무 무덤이 보인다.
200m를 한참이나 지난 듯한데 아직도 갈길이 멀다. 중간에 평편한 바위가 있어서 잠시 쉬면서 가덕도 쪽을 조망한다. 망산에 왔으니 그냥 바라본다는 것이다.
재선충 소나무를 베어내면서 실명제로 하였다.
발품을 한참이나 파니 드디어 애국지사 옥영준 선생의 유택에 도달하였다. 우측에는
독립운동하는 지아비때문에 숱한 고초를 겪었을 부인이 이곳에서 같이 영생한다.
좌에 있는 묘소가 부인 의령 남씨의 유택인데 그런데 앞에서 보아 좌측인가? 뒤에서
보아 좌측인가? 가늠할 길이 없는데 추측으론 뒤에서 보아 좌측이 아닌가 한다.
묘소 바로 뒤로 작은 체육공원이 조성되었다. 玉志士님도 이곳에서 운동하시려나?
누군가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돌탑 사이로 길이 나있다.
소나무에 흰색 페인트로 표식이 되어있는데 추측건대 이 나무들은 사형선고를 받지 않은 나무일 것 같다.
가물다가 오래간만에 비 온 뒤끝이라 빽빽한 나무숲을 혼자 들어가니 어두컴컴해서 제법 음침한 느낌이 난다. 군데군데 봉분이 조금씩 파헤쳐지고, 어김없이 그곳에는 거제시에서 붙인 분묘 이장 공고가 있다.
정상에는 잡풀만 무성하고, 정상 바로 밑에 이런 바위들이 있다. 왜구가 대한해협을 건너 노략질하는 현장도 보았을 테고, 왜군과 이순신 장군의 해전도 묵묵히 보았을 바위는 말없이 그곳에 저 편한 대로 눕거나 서 있다.
장승포 앞바다에는 부산신항에서 선적 및 하역스케쥴을 기다리거나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싣고 갈 화물이 없는 대형선박들이 늘 저렇게 바다 위에 하염없이 정박해 있다.
가운데 지심도가 보인다.
아래로 낚시용 해상콘도도 고개를 내밀고,
오른쪽으로는 장승포항이 있다. 아래에는 장승해안로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작은
성냥개비를 세운 듯한 전봇대를 따라 산책로가 이어진다.
벌써 추석이 다가오는구나! 내려오는 길에 부지런하고, 효심이 깊은 후손을 둔 행복한 유택이 보인다. 산소 옆으로는 망자께서 드시라고 과실나무도 싱싱하게 자란다.
행복한 유택을 지나자마자 내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진다. 규모로 보면 거의 왕릉(?)
아니면 대장군의 무덤이다. 어떤 분이 모셔졌길래 이렇게 봉분이 웅장한가? 아직벌초는 하지 않았지만 궁금해진다.
특이한 점은 세로로 세운 큰 비석도 없고, 상석도 없이 무척 검소하다. 상석을 대신할
곳에는 작은 돌축대가 있고, 그 위에 아주 지극히 평범한 비석이 있다. 봉분 크기에
비하면 턱없이 작다.
처사 철성李公(宇祚)之墓라고 되어있는데 宇祚 글자는 희미하여 해독이 어려웠다.
학생이나 처사라는 것은 벼슬이 없는 사람이 고인이 되었을 때 비문이나 제사지낼 때
지방에 그렇게 쓰는데 대체로 학생으로 사용하는 것이 우세하다 보니 처사란 용어에
생소함이 느껴진다. 물론 불자끼리는 남자 신도를 보고 처사라고 부르긴 한다.
處士에 대해 두산백과에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처사는 조선조선 중기인 16세기 붕당정치(朋黨政治)로 인해 중앙관직으로 출사를 단념하고 고향에서 사림(士林)을 형성하며 지방에 은둔하게된 선비들이 형성되었다. 이들 선비들은 다양한 용어로 불리게 되었는데 처사뿐만아니라 은사(殷士), 유일(遺逸), 은일(隱逸), 일사(逸士), 일민(逸民) 등으로 불렸다. 이중 처사라는 용어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며, 지방의 은거하는 선비를 상징하는 호칭이 되었다. 특히 당시 북인(北人)으로 분류되어 중앙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던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호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고,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을 처사라고 호칭하였다.
그렇다면 이 무덤의 주인은 조선중기 이후에 벼슬을 돌과 같이 보고, 초야에 은둔하면서 후학을 양성한 어떤 유림의 일원인 듯한데 아마도 거제도에 낙향하여 조용히 일생을 보내신 분이 아니였던가 생각된다.
예나 지금이나 장승포항은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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