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5. 6. 10:03ㆍ여행이야기
맑을 '청', 깨우칠 '령', 물가 '포', '淸泠浦'의 뜻을 알기에 앞서 이름 그대로가 심금을 울린다. 마치 소쩍새보다는 '두견새'라고 하면 더 의미심장한 느낌이 오는 것처럼 말이다.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는 '淸泠浦'의 지명의 유래는]
청령포라는 지명은 1763년(영조 39년)에 세워진 단종유지비에 영조가 직접 ‘단묘재본부시유지’라고 써서 내렸고, 이것을 화강석 비좌 위에 올려진 오석으로 된 비신에 새겼다. 비의 뒷면에 1763년 9월에 원주감영으로 하여금 쓰게 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고, 지명 청령포라고 썼다. 이로 보아 청령포라는 지명은 유래가 깊은 것으로 보인다.
들어가면서 오른쪽으로는 어림짐작으로 20칸 정도로 보이는 제법 규모가 있는 기와집이 있다. 이곳을 단종이 머물렀다고 해서 '단종 어가(御家)'라고 한다. 길손의 짧은 생각으로는 임금이 사는 곳이면 궁궐인데 왜 굳이 '어가(御家)'라고 했을까? 세조 당시에는 단종의 복위를 꾀하는 무리와 단종을 동일 시 했기 때문에 죄인처럼 지내는 노산군이 임시 거처하는 처소를 '어가'로 부를 리 만무했을 것이고, 아마도 후일 단종이 복권된 이후에 임금이 거처한 일반 여염집을 빗대어서 임금이 머물렀던 여염집 정도로 해서 '어가'로 표현하지 않았겠나 싶다.
이곳에 재현된 단종 어가는 2000년 4월5일 단종문화제와 때를 맞춰 승정원일지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그 당시의 모습을 나름대로 재연했다고 한다. 어가에는 당시 단종이 머물던 본 채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사랑채가 있으며 밀납인형으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가 담장 안에 유지비각이 위치해 있다. 이 어가는 어가 또는 적소라는 명칭에 대한 논란과 주거형태, 어가의 위치 등 여러 가지 문제로 한동안 논란을 겪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승정원일지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재현했다.[출처: 문화콘텐츠닷컴]
초가집으로 재현된 사랑채는 폐위된 노산군을 모시던 관노와 궁녀들이 기거하던 곳이라고 한다.
절묘하게 담장으로 굽은 소나무를 배치했다. 아니 담장을 배치한 것이 맞다. 이게 스토리텔링이 된다. 소나무가 단종 어가 쪽을 보면서 아침, 저녁으로 문안 인사를 하는 듯하다. 관광객이 많아 소나무 밑에 아무도 없기를 바랐으나 그것은 장마철에 비 안 오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어디에서 온 지 모를 아이가 모델이 되었다.
작은 비각 안에 모셔진 '단묘유지비'는 단종이 머무르던 옛 집터를 기념하기 위해 영조 39년(1763) 어필로 원주 감영에서 세운 것이다. 비 앞면에 ‘단묘재본부시유지’(端廟在本府時遺址, 단종이 여기 계실 때의 옛터)라고 씌어 있다. 비각 주위에 자연석을 놓아 외곽 표시를 해놓았다.
밀랍으로 재현한 단종이 자신을 알현하는 어느 선배의 모습이다. 일반인들은 사람을 마주보고 직배(直拜)하지만, 당시의 임금에게는 곡배(曲拜)를 했다. 이것도 당시의 노산군에게는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시대 당시의 곡배는 임금을 보고 절을 하는 것을 말하는데 임금은 남쪽을 향해 앉고, 절하는 사람은 임금을 마주 보지않고, 동쪽이나 서쪽을 보면서 절을 하는 것이다.
단종 어가를 나와 주위를 둘러보는 중에 마치 송이버섯같이 생긴 비석이 있다. 대구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이 머리에 쓴 바위 모자처럼 비석의 '이수' 부분도 세월의 풍상을 이기지 못하고 반은 떨어져 나갔고, 비신(碑身)도 마른 이끼로 덮여있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비석의 뒷면이다.
비석의 앞면이다. 그곳에는 ‘청령포금표’(淸冷浦禁標)' 라고 씌어 있다. 이 금표비는 영월부사 윤양래가 1726년(영조 2)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길손은 처음 이 금표비가 이곳에 유배된 단종의 행동반경을 제한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영조 2년에 세운 이 금표비는 유배지를 보호하기 위해 백성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영조가 이 단종대왕을 극진히 모신 것 같다. 현재의 시각으로 본다면 단종의 유적을 보호하려고 그랬던 것 같다.
[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此後泥生亦在當禁(동서삼백척 남북사백구십척차후니생역재당금)]
즉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과 또한 진흙이 쌓여 생기는 땅도 왕이 계시던 곳이므로 뭇사람은 들어오지 말라’라는 금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면 진흙이 쌓여 생기는 땅은 무엇을 뜻할까? 길손의 잔머리론 아마도 강이 범람하여 모래나 진흙이 강가에 쌓여서 넓어지므로 그곳조차도 들어오지 말라는 어명으로 보인다. 그러니 배로는 절대 접근하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금표비를 돌아 노산대를 향해 가는 길, 곧게 우거진 금강송 사이로 유난히 우뚝 서고 우람하게 생긴 군계일학의 금강송이 있다. 마치 두 나무로 보이지만, 밑동에서 가지가 벌어져 자라 결국 한 나무이다. 그 금강송의 이름은 '관음송(觀音松)'이다. 전설에 의하면 단종이 유배되어 이 소나무 숲을 거닐 때 소나무 밑동 가지 사이에 쉬었다고 전해진다니 수령은 어림잡아 600년 가까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자라고 있는 모든 소나무 가운데 가장 키가 큰 소나무로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두산백과에서는 이 관음송을 표현하길 천연기념물 제349호. 나무의 크기는 높이 30m, 가슴높이 둘레 5m이다. 지상 1.2m 높이에서 2개로 갈라져 동서로 약간 비스듬히 자랐다. 갈라진 줄기의 밑둘레는 각각 3.3m, 2.95m이며, 수관 폭은 동서 23.3m, 남북 20m이며, 수령 600년으로 추정된다. 한강 상류지역인 영월군 남면의 강 가운데 고립된 작은 섬의 소나무숲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이 나무는 조선 초 단종(端宗:1441∼57) 유배시의 수령을 80년으로 계산하였다고 한다. 단종이이 유배생활을 할 때, 이 소나무의 갈라진 사이에 걸터앉아서 쉬었다는 전설이 있다.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고[觀], 오열하는 소리[音]를 들었다는 뜻에서 관음송이라 불렀다고 한다.
노산대를 오르면서 단종 어가를 보니 짙은 실록사이로 보일 듯, 말 듯
청령포를 휘돌아가는 강에는 높이 80m 되는 낭떠러지가 있는데, 이를 ‘노산대’라고 한다. 단종이 해질 무렵 이 봉우리에 올라 한양의 궁궐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하며, 노산군으로 강등된 당시 단종의 이름을 본따 ‘노산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노산대'에서 '평창강'이라고도 부르고, '서강西江'으로도 불리는 강을 내려다보며, 당시 어린 나이에 엄청난 슬픔과 시련을 가지고 단종이 보았던 봄의 경치를 길손이 본다. 이 빼어난 절경도 유배된 단종에게는 절경으로 보이지 않았으리라
노산대 옆에는 뽕나무가 한 그루 자라고 있다. 아직 조그만 오디가 달렸는데 과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고, 소나무만 수성한 청령포에서 단종의 영혼이라도 간식으로 드시도록 자생한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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