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이 슬픔을 안고 잠든 장릉(莊陵)

2015. 5. 7. 08:39여행이야기

728x90

 

 

 

 

입구를 들어서며 왼쪽 앞으로 보이는 흰 건물은 단종 역사관이며, 그 위쪽으로 보이는 한옥은 재실이다.

 

 

 

 

 

 

오른쪽으로는 단종이 잠든 장릉을 오르는 완만한 계단이 시작되고, 계단 오른쪽에는 작은 비각이 있다.

 

 

 

 

 

 

 

 

영월 호장 엄흥도가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동을지산에 밀장하였는데 오랫동안 묘의 위치조차 알 수 없다가 1541년(중종 36)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이 묘를 찾아내어 묘역을 정비하였다고 한다.

 

 

 

 

 

 

 

 

1~200m를 오르자 완만한 경사로에 장릉(莊陵)이 보인다.

 

 

 

 

 

 

 

맞은편 산에는 멋진 금강송 군락지가 보인다. 이 터는 기가 센 곳이라고 하는데 길손의 아둔한 눈에는 이곳이 명당으로 보인다.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충신들이 그를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밝혀져 영월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단종이 죽자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호장 엄흥도가 장사를 지냈다. 중종 이후 조정에서 단종에 대한 제사와 무덤에 대한 의견이 나오게 되어, 선조 때에 이르러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을 세우게 되었다. 숙종 7년(1681)에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하였고, 숙종 24년(1698)에 복위시켜 이름을 장릉이라 하였다.

무덤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다. 능의 양식은 간단하고 작은 후릉의 양식을 따랐으므로 석물은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편이다. 명릉이래 만들어진 사각지붕형의 등인 '장명등'은 장릉에서 첫선을 보이게 된다. 특히 장릉은 무덤 제도에 의해 정해진것 외에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배식단사를 설치하였다. 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있는 곳은 이곳 뿐이며,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이한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단종의 유택인 이곳 장릉은 세조로부터 사약을 받은 단종의 주검은 곧 강물에 버려졌으며, 단종의 주검을 수습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그 주검을 수습하는 이가 없었는데 영월 호장 엄흥도가 죽음을 무릅쓰고 시신을 거두어 현재의 능이 있는 곳에 암장하고는 숨어 살았다고 한다. 능 자리는 인기척에 놀라 달아난 한 마리 노루가 앉았던 자리라고 전해진다고 한다.

 

 

 

 

 

 

 

장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석물 또한 단출하다. 봉분 앞에 상석이 있고, 상석 좌우에 망주석 1쌍이 서 있으며, 그 아랫단에 사각형 장명등과 문인석·석마() 각 1쌍이 있으나 무인석은 없다.[출처 : 두산백과]

 

 

 

 

 

 

 

 

 

 

 

능 뒤편을 지키는 사자인지 호랑이가 앉아 있다.

 

 

 

 

 

 

 

능의 오른쪽으로는 양(羊)을 상징하는 석물이 있다. 석물 양의 모습은 아마도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 아닌가 한다.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양을 배치함으로써 후손들의 번성을 기원하였지 않나 싶다.

 

 

 

 

 

 

 

 

 

 

 

위패에는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웠던 사육신이나 생육신, 그리고 단종을 위해 고난을 겪었던 많은 분들의 직함과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홍살문 뒤로 대리석으로 만든 길이 있다. 왼쪽은 기단이 조금 높다.

 

 

 

 

 

 

 

 

 

 

 

 

 

 

정자각의 지붕 꼭대기 위 언덕에는 단종의 장릉이 있다. 보통의 제를 올리는 건물은 능의 정면에 배치되는데 장릉이 있는 능선은 정자각을 지을 만한 터가 없으므로 이렇게 밑에 배치하지 않았나 싶다. 이곳에서 엎드려 절을 하면 자연스럽게 曲拜가 될 것이다.

 

 

 

 

 

 

 

 

 

장릉에 서 있는 문인석이 이곳을 내려다 보고 있다.

 

 

 

 

 

 

 

 

 

 

 

영천 옆에 서 있는 이 나무는 느릅나무이다. 길손은 이렇게 큰 느릅나무는 처음 본다. 가난하여 먹을 것이 별로 없던 어린 시절에 어머니는 느릅나무 잎을 따서 밀가루와 버무려 떡을 찌고, 느릅 잎이 밀가루보다 많은 느릅 떡으로 허기진 배를 달랬었다. 느릅 껍질은 종기가 날 때 고름을 빨아들이는 데도 썼으니 정말 고마운 나무로 길손은 알고 있다.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암장한 영월 호장 엄흥도를 기리는 '정려각'이다. 戶長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향리직의 우두머리로 지금의 면장쯤으로 보면 된다고 한다.

 

그런데 길손의 불경스런 생각인지 모르지만, 엄흥도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영월의 북쪽 5리쯤 되는 동을지()에 장사 지내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고 하며 암장을 하면서 단종의 유택이라고 표시 할 수 없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세월이 많이 지난 중종 때의 영월 군수 박충원이라는 사람이 현몽으로 단종의 유택을 찾아 정비하였다고 하는 것이 과연 현실성이 있느냐 하는 점이다. 요즘의 과학으로는 쉽게 풀 수도 있는 의문이겠지만 아무래도 단종 능침에 잠들어 계시는 분이 혹시 딴 분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재실(齋室)의 왼쪽 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별 이상한 것으로 당파싸움을 했다.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정말 사사롭고 속칭 돈도 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늘 싸움을 했다. 재실은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으로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숙식과 제사음식을 장만하고, 음복(), 망제()를 지내는 곳인데 길손이 문을 들어가면서 위를 보니 조선왕실 문양인 배꽃(梨花)문양이 있다.

 

 

 

 

 

 

 

배꽃 문양을 삼지창 문양이 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이곳은 오른쪽으로 재실 들어가는 문이다.

 

 

 

 

 

 

이것은 재실 오른쪽 문 위에 있는 태극문양이다. 태극문양과 배꽃문양을 어느 쪽에다 설치하느냐를 두고 아마도 몇 달간 침을 튀기면서 격론을 벌였을 것이다. 예법 중에서도 喪事 시나 祭祀 시의 예법을 선비들은 더 중하게 여기지 않았는가? 그래서 길손은 저것을 보면서 웃음이 났다.^^

 

지금도 나라 돌아가는 꼴을 보면, 조상 욕할 것 하나도 없다. 맨날 당파 싸움에 허송세월 보내다가 임진왜란, 일제강점기를 재탕하는 때가 올 수도 있으니 신 당파싸움에 목을 매는 위정자들아!! 옛것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어떻겠느냐?

 

 

 

 

 

 

 

 

 

 

 

 

단종 역사관이다.

 

 

 

 

 

 

 

문종실록인데 크기가 대단하다. 지금의 책 길이의 3배가량은 됨 직한데 그 내용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길손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앞으로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와 한글을 병용한다고 하는데 정말 잘한 결정이다. 원래 우리 말이 한자어가 대부분인데 한글전용만 고집한다면 국수주의자가 아니고 뭐겠나? 요즘 젊은이들이 한자를 제대로 모르니 웃기는 일도 자주 벌어진다. 한글을 정말 사랑하려면 漢字부터 사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