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풍운아 - “사도세자의 고백”을 읽고

2011. 4. 4. 20:30살아가는 이야기

728x90

 

 

조선시대의 풍운아 - “사도세자의 고백”을 읽고

   

이덕일 著「사도세자의 고백」은 직장교육과정의 혁신도서로 선정되어 독후감을 쓸 3권 중의 한권으로 그동안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사도세자의 슬픈 죽음의 역사 한 부분을 정독하게 되는 기회를 이 책이 나에게 제공하였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조선 5백년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어 다른 혁신도서에 우선하여 이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는 한중록의 허구를 조목조목 짚어가며 사도세자와 그를 둘러싼 주변에서 벌어졌던 사건의 실체를 나름대로의 시각으로 밝히고자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중록閑中錄」, 있는 그대로 해석을 해보면 “한가한 날의 기록”, 혜경궁 홍씨가 남편인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을 지척에서 피맺힌 심정으로 보고 써내려간 기록이 한가한 날의 기록이라니?

타는 듯한 여름, 뒤주 속에서 8일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죽어가는 사랑하는 지아비를 애타게 그리고 사모하는 기록으로 치부하기에는 말 그대로 너무 한가함을 느낀다. 「사도세자의 고백」은 그렇게 혜경궁 홍씨의 정치적인 역정과 발자국을 빌어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세간의 해석과는 달리 그 나름대로의 시각으로 세자를 무덤에서 일으켜 세웠다.

 

한중록과 영조시대의 치적을 기록한 영조실록의 기록은 한사건의 기록에도 서로 다른 내용으로 기술되고 있는 것이 많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한중록이 정치적인 입장에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쓰여 진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반추해 보려면 사도세자의 부왕인 영조가 왕이 되기까지 온몸으로 겪었던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을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

영조는 숙종과 무수리 출신의 화경숙빈 최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의 작호는 연잉군이었다. 그는 노론의 지지를 받고 있는 입장이었으며 노론의 지지에 힘입어 경종 재임 시 왕세제로 책봉되어 경종을 대리하여 정사를 돌보는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대리청정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사도세자에게 불운이 닥쳐올 서막으로 오르게 되었다. 영조는 이 대리청정을 마음속으로는 왕통을 확실히 이어 받을 수 있다는 계산을 저변에 깔고 경종과의 관계에서 가깝지도 멀지도 않는 처신을 하고자 했다 후일 자신이 겪고 헤쳐 나왔던 신고의 세월을 사도세자도 자신을 대리한 대리청정을 통해 자신처럼 권력을 차지할 야망이 있다고 기정사실화 하여 권력투쟁의 상대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도세자가 당시 왕실의 기풍인 문을 따르지 않고 무를 숭상하고 북벌을 주장했던 효종의 유시를 따르는 듯한 행동을 보여 영조의 미움을 샀는데 이는 영조가 어린 사도세자를 생모 영빈이씨의 손에서 일찍 떼어내 보모에게 맡긴 때문이며, 세자가 보모와 생활할 때 한 상궁과 최 상궁이란 궁녀가 세자를 모셨는데 최 상궁은 학문을 가르치고 한 상궁은 무예를 가르쳤다. 그들은 소론으로서 노론인 혜경궁 홍씨는 그들이 은연중에 세자에게 노론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심어 주었다고 주장한다.

 

영조는 왕세제로 있을 때 목효룡의 고변사건(1722년)으로 당시의 수사기록인 임인옥안에 역모의 괴수로 올라 목숨이 풍전등화의 위험에 처해 있었으나 삼종의 혈맥 명분과 온건 소론의 적극적인 구원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이것이 영조가 노론이라고 칭해지던 때 소론의 지원에 힘입어 왕권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노론 소론을 모두 아우르는 탕평책을 쓴 충분한 이유가 된다.

사도세자빈 혜경궁은 노론의 영수로서 후일 사도세자를 뒤주속에 가두어 굶겨 죽이는데 기여한 홍봉한의 여식이었으며 세자빈으로 간택되었을 당시에도 성품이 조숙하였다. 세자주변이 영조, 인원왕후, 홍봉한 등 모두 노론일색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사도세자는 정치적으로 소론을 두둔하는 듯한 입장을 취했는데 이것이 바로 장인과 부인과도 정적으로 갈라서게 되는 비극의 시작이 되었다.

영조 25년 1월 영조는 왕위를 세자에게 전위한다는 소동 끝에 결국 대리청정을 세자에게 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진심어린 양위의 뜻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세자의 심정을 떠보려는 행동이었음을 어린 사도세자도 알고 있었다. 영조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 것은 계획적인 일이었다. 하나의 목적은 국정을 잘 가르쳐 성군을 만들고 싶었고 또 하나의 목적은 자신의 과거, 즉 자신이 경종을 독살했다는 혐의를 벗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는 대리청정기간동안 과묵하고 속내를 좀처럼 보이질 않아 신하들에게는 임금보다 어려운 세자로 인식되었다. 이것 또한 후일 세자에게 불리하게 작용되는 한 이유가 되었다. 그동안 살얼음판위를 걷는 것처럼 지내왔던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이른바 영조 31년(1755)에 발생한 “나주벽서”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30여 년간 이어져온 탕평책을 영조 스스로 포기하기에 이르렀고 스스로 노론의 당인임을 인정하는 듯한 행동을 하며 벽서사건주모자와 소론을 박멸하게 되었으나 세자는 영조와 달리 소론에게 동정적인 감정을 가지게 되었으니 이것이 영조와 정치적인 인식차이를 갖게 되었고 급기야 노론은 세자를 후세의 안녕을 위해서도 제거되어야할 정적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 하여 버렸다. 영조는 모후가 천민인 무수리출신이라는 것과 경종의 독살설의 망령에서 치세 내내 헤어나질 못하고 콤플렉스로 일생을 살아왔다고 보여 진다. 어쩌면 이것은 역설적으로 영조가 빠져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의혹만 더해지고 구차해지는 이유와도 같았다.

 

사도세자는 장인 홍봉한이 노론의 당인으로서 자기의 정치적인 목적달성과 노론을 위해 세자빈을 동궁의 정보원격으로 두고 세자주변의 세세한 일들을 보고받고 있었다. 급기야 혜경궁 마저 자신을 음해하는 세력들과 결탁하자 세자는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영조는 재위 52년 기간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의 정당성을 과시하기 위해 음식물과 탕제를 거부하는 등으로 자기합리화를 시도하는 성격변화가 심한 임금이었다. 사소한 일에도 정치적인 행동으로 끊임없이 사도세자를 떠보았고 세자가 자신에게 복종하고 딴마음을 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안심을 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사도세자로 하여금 마음의 병을 가져오게 한 것 같았다. 세자는 종기 등 병 치료를 위해 온양온천 행차 시 백성의 질곡의 소리를 듣고 즉석에서 지방관들에게 조세와 부역을 감면하는 지시를 하여 해결해 줌으로써 세자의 온양행차는 세자의 성군으로서의 자질을 만천하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정신병이 있다는 등 노론이 조직적으로 전파한 소문이 거짓으로 밝혀지는 계기가 되었다 세자의 온양행이 가져온 결과 이렇게 되자 다급해진 것은 노론이었다.

 

사도세자는 백성들이 세자에게 보인 흠모에 대해 영조의 오해를 살까 두려워 온양에서 돌아온 후부터 관서행을 떠나기까지의 부왕과의 정치적인 대면을 약 8개월 정도 끊고 있었는데 같은 대궐에 살면서 한번도 만나지 않았다는 것이 현재까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영조37년(1761)봄에 세자는 영조 몰래한 평안도지방 유람이 비참한 죽음의 시초가 되었다는 것이 후세의 대체적인 견해이다 즉 평안도지방을 유람하면서 많은 비행을 저질러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노론들이 세자의 관서미행에서 비위를 빌미로 여러 가지 계략을 걸어 세자를 어려운 지경에 몰아 후일 자신들의 안위를 얻고자 영조에게 세자의 비위사실을 고해 바쳤으나 영조가 예상외로 일찍 용서함으로써 무위로 끝났다. 세자가 관서로 간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의도적이고 뚜렷한 목적을 지닌 정치행위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여인들을 데려옴으로써 미행의 목적이 여자임을 위장해 노론의 견제를 희석시키려고 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노론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최고의 승부수를 띄운다. 세자의 관서행을 계기로 세자제거 계획이 무위로 돌아가자 만약 69세의 늙은 영조가 덜컥 세상이라도 뜨면 대리청정 하는 세자의 즉위를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노론이 보기에 세자는 영조가 죽을 때를 대비해 군사행동을 단행하는 자구책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노론은 세자의 이 자구책을 영조에 대한 역모로 몰아 사도세자 제거에 나섰다.

 

즉 나경언 이란 자가 세자가 왕손의 어미를 죽이고, 여승을 대궐 안에 들이는 비행을 저질렀다는 고변을 하도록 사주하여 뒤주 속에서 죽임을 당하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다. 그 고변은 20여일 후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는 결과를 가져왔다. 주변에서 속속 죄여오는 음해세력으로부터 세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구책으로 동궁에 지하무기고를 짓고 소론영수 조재호는 춘천에서 동지들을 규합했으나 결국 이 자구책이 영조가 세자를 왕권을 위협하는 위험한 인물이며, 변란을 꾀한 인물이라고 몰지는 않았을까? 이 것이 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진짜 이유가 된 것은 아닐까?

 

드디어 영조 38년 윤 5월 13일 세자는 영조로부터 자결을 요구받다 뒤주에 갇히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무려 8일 동안 한여름 밀폐된 공간에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살려달라는 애절한 간청에도 불구하고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권력 앞에서는 부자지간도, 부부의 연도, 사위와 장인의 관계도 뛰어넘는 것을 보여준 권력무상의 드라마를 나는 “사도세자의 고백”을 통해 똑똑히 보았다. 부부란 무엇인가? 그냥 헤어지면 남남이던가?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현모양처를 가장한 간악한 여인의 음흉한 넋두리였던가? 사도세자의 아들이 정조로 즉위하자 사도세자의 죽임에 앞장선 풍산 홍씨 등 노론명문가들은 몰락의 길을 걷고, 홍봉한을 비롯한 친정이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되어 집단살육 당할 수도 있는 어려움에 처하자 친정을 살리기 위해 한중록을 써서 친정과 관련된 일련의 일들이 사도세자의 죽음과 아무 관련이 없음을 변명하기 위함이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도세자가 죽은 지 240여년이 흐른 지금 사도세자는 저자의 깊은 통찰력에 힘입어 명예를 회복하고 책속에서 다시 살아났다.

 

권력 앞에서 온갖 중상모략이 난무하는 오늘의 정치현실도 영조 때의 그 것과 별반 다른 것이 있던가? 하는 무력감과 아쉬움에 만감이 교차한다. 사도세자는 240여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현대를 사는 나에게 그렇게 무겁고 새롭고 진한 감동으로 모습으로 나에게 닥아 왔다.

 

조선의 풍운아 사도세자!!

끝도 보이지 않는 당파싸움에 성격장애를 가진 부왕 영조와 국가의 안위보다 자기가 속한 당의 이익만을 앞세운 간신모리배들 사이에서 외줄타기처럼 위태롭게, 때론 현명히 처신해오던 사도세자, 결국 의로움을 택한 대가로 부왕과 지어미로부터도 버림받고, 간신배들로부터 죽임을 당한 비운의 세자!!

 

조선의 왕으로 등극해보지 못한 비극의 세자가 시공을 뛰어넘어 “사도세자의 고백”이란 책으로 이렇게 내게 다가와서 진한 감동을 주고 그는 다시 저 먼 영겁의 뒤안길로 멀어져 간다.

 

부디 영면하소서! 사도세자여!!

 

 

 

https://www.youtube.com/watch?v=AClGsYbjr7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