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8. 12. 09:56ㆍ살아가는 이야기
어제저녁부터 벌겋게 달궈진 대지를 식히는 단비가 온다. 연일 36~37도를 오르내리는 더위에 지쳐가는 몸과 마음을 추스르게 해주는 그런 단비다.
가뭄이 들면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이 생각난다. 논이 갈라지고 터지면 농사짓는 어머니의 가슴은 갈라진 논바닥처럼 골이 지고, 찢어지는 아픔이 아로새겨진다.
우리 논이 있는 곳 1.5Km쯤 위에 있는 덤붕(웅덩이의 방언)에는 이미 며칠 째 예약이 되어있다. 해가 뉘엇뉘엇 넘어가는 저녁무렵에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다. 할머니와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덤붕으로 향한다.
물을 푸는 두레박은 반원형의 양철통 양옆으로 반달모양의 송판을 잘라서 대고, 그 송판 위쪽 가장자리 두 곳에는 짚으로 꼬아 만든 새끼줄이 4m쯤 길이로 양쪽에 네줄이 달려있다.
덤붕은 3m 정도의 깊이에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돌은 검은색으로 미끌미끌한 이끼가 끼어있고, 바닥에는 용천수가 솟아난다.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나는 교대로 양손에 새끼줄 끝을 부여잡고, 덤붕 가장자리에 버티고 서서 허리를 숙이며 물바가지를 웅덩이에 비스듬히 넣으면서 동시에 허리를 펴고 팔에 힘을 주면서 두레박을 들어 올리면 묵직한 물 한 두레박이 올라온다. 물바가지가 무릎높이에 왔을 때 물도랑 쪽을 낮추고 뒤를 들어 올리면 물이 도랑으로 쏟아진다. 그렇게 어둠이 내려앉은 웅덩이에 작은 호롱불에 의지하여 감으로 어림짐작 물을 푼다.
그렇게 3~4시간을 웅덩이에서 물을 푸었나 보다 배고픈 시절에 칼국수 끓여 먹고 시작한 물푸기가 허기로 다가왔을 무렵, 풀이 우거진 도랑을 따라 논까지 내려갔던 어머니의 외마디 외침이 들려온다.
땀내 나는 삼베 고쟁이를 입고 밤에 제 논에 나왔던, 평소에 얌체 짓 많이 하는 윗마을 싸가지 없는 영감탱이가 누가 물을 푸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제 논으로 물길을 우리 몰래 돌린 것이다. 3~4시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숨넘어가는 어머니의 악다구니가 시작된다.
물과 땀에 전 검정고무신이 자꾸 벗어지지만, 어두운 좁은 논둑 길을 한달음에 달려가니 어머니와 그 영감탱이가 언성을 높이고 싸우고 있다. 어린 마음에도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내가 19세만 되었어도 그 영감은 논에서 내 손에 초주검이 되었으리라
이제는 30여 년 전에 경지정리가 되어 옛 모습은 사라지고, 그 실루엣은 그냥 내 머릿 속에 추억으로 남아있지만, 그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누가 고의로 나무를 죽였나? 참나무 한 그루가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는다. 그 나무는 이렇게 내리는 비도 소용이 없겠지만, 그 나무도 비를 반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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