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멤피스 벨(Memphis Belle)의 주인공인 날으는 하늘의 요새

2011. 4. 17. 15:33쓸모있는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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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철없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가장 절박한 심정이 들 때는 어떤 때일까? 

건강을 잃었을 때?  직장에서 진급이 누락되었을 때?  아니면 사업하다 부도가 났을 때?

 

난, 기이하게도 2차대전 중에 독일을 폭격하기 위해 적진을 날고 있는 폭격기의 전방이나, 후방,

기체 상부나 하부에 설치된 기관총좌에 앉아 있었던 사수들이 아니었겠나 싶다.

적기가 자기가 탄 폭격기를 격추시키기 위해 달려들 때, 적기를 명중시키지 못하면 자신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  그정도로 절박한 상황이 또 어디 있겠는가

 

 

 

 

영화 멤피스 벨(Memphis Belle)은 1990년에 상영이 되었으며,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 영화는 1943년 여름, 유럽에서 있었던 한 치열한 공중전에 관한 이야기이다. 적지 후방 깊숙이 출격하는 공군 장병들은 매일 수백명씩 죽음에 직면하고 있었다. 살아서 돌아오는 자는 자꾸만 줄어들었다.}

  2차대전 당시, 영국에는 독일을 폭격하는 공군기지가 있었다. 이 공군기지에는 '멤피스 벨'이라 불리는 B-17 폭격기가 비치되어 있어 독일에 점령당한 유럽 전역을 상대로 폭격 임무를 수행한다. 이 벰피스 벨의 조종사는 갖 고등학교를 졸업한 18에서 22세까지의 조종사로 처음으로 집과 조국을 떠난 이들은 아직은 전쟁이라는 무거운 임무를 수행하긴 이르다. 그러나 위급한 상황에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오직 팀웍 뿐일 것이다.

  {1943년 5월 17일 멤피스 벨은 마지막 25차 출격을 끝냈다. 서유럽에서의 제공권을 잡기 위해서 25만여 대의 항공기가 싸웠고, 목숨을 잃은 승무원은 20만명 가까이 되었다. 이 영화는 역사상 가장 큰 항공전에서 싸운 용감한 젊은이들에게 바친다. 그들의 국적에 상관없이.}

 

일본군의 하와이 진주만 공격으로 촉발되었던 세계 제2차 세계대전

25만대의 전폭기가 동원되었고,20만명의 젊은 조종사, 승무원들이 전사했다.

 

이 영화는 24번의 임무를 무사히 치르고, 마지막 25번째의 임무에 투입되었던 '멤피스벨'이란

전폭기의 젊은 승무원 이야기를 실화를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실제 이 영화의 소재인 멤피스벨이란 B-17F 중전폭기는 당시 10개월간의 참전기간 동안

8대의 적기를 격추시키고, 12대에 손상을 입혔으며 총 25회의 작전동안 60여톤의 폭탄을

전선에 투하한 유명한 기체로, 현재도 미국 테네시주의 멤피스시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 마지막 임무는 가장 위험한 적지, 브레멘의 전투기 공장에 폭탄을 투하하고 돌아오는 것,

당연히 무수한 적기와 대공포의 화망을 뚫어야 한다.

그 와중에 승무원들은 다치고~  멤피스벨은 무참히 짓이겨진 상태로...

머나먼  도버해협을 건너 살아 돌아가야 한다.

 

전폭기의 좁은 공간안에 가득찬 공포

마지막 임무를 마치면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그것은 험난한 가시밭길을 넘어야 한다.

함께 한 동료 전폭기들은 하나하나 추락하고, 목표는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그래, 정말 아무대고 폭탄을 떨어뜨리고 그냥 돌아가고 싶다..

당연히 이런 고비에는 순수한 사명감에 임무를 완수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고,

반면에 살아남고 싶은 것은 평범한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나 기장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들의 심정은 잘안다. 하지만,  우리가 그냥 아무대고 폭탄을 투하해 무고한 시민들을 희생시킨다면, 나중에 누군가 다시 오늘과 같은 희생을 감수하고 지옥같은 여기를 다시와야 한다."

(출처 : http://www.cyworld.com/8684137 )

 

         

 

 *  B-17 플라잉 포트리스(B-17 Flying Fortress)

보잉 B-17 플라잉 포트리스(날아다니는 요새, Boeing B-17 Flying Fortress)는 엔진 4개를 장착한 미국의 중폭격기로 미 육군 항공단(U.S. Army Air Corps, USAAC)의 요구에 따라 개발되었다.

 

1934년 8월 8일 미 육군 항공단은 마틴의 B-10 폭격기를 대체할 여러 엔진이 달린 폭격기를 제안 요청하였다. 최고속도는 적어도 200 mph(322 km/h)가 되어야 하며 일만 피트(3 km) 고도에서 10시간 동안 비행할 수 있고, 충분한 양의 폭탄을 적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조건이었다. 또한 필수 조건은 아니었지만 항공단은 250 mph(400 km/h)속도로 2000 마일(3200 km)을 비행할 수 있는 폭격기를 권장하였다. 항공단은 이러한 폭격기를 하와이(Hawaii), 파나마(Panama), 그리고 알래스카(Alaska)에서 공군 지원 목적으로 운용하고자 하였다. 오하이오(Ohio) 주의 데이톤(Dayton)에 위치한 라이트 비행장에서(Wright Field) 보잉은 더글라스(Duglas) 사(社)의 DB-1, 마틴(Martin) 사의 모델 146(Model 146)과 경합을 벌였다.

 

모델 299라고 명명된 B-17의 프로토타입은 기포드 에머리(E. Gifford Emery)와 에드워드 커티스 웰즈(Edward Curtis Wells)가 이끄는 팀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보잉사(社)의 경험으로 얻어진 기술력의 총아였다. 이 기체는 시험기인 보잉 XB-15 폭격기와 보잉 247 수송기를 결합한 것으로, 개방형 조종석(open cockpit) 대신에 조종실 개념을 도입한 보잉의 첫 항공기였다. B-17은 조종실 뒤 두 개의 폭탄 수납고에 총 4,800 파운드(2180 kg)의 폭탄을 적재할 수 있었으며 5정의 0.30 인치(7.62 mm) 구경 기관총을 탑재하였고, 7,000 피트(2130 m)에서 각각 750 마력(600 kW)을 내는 4개의 프랫 & 휘트니 R-1690 방사형 엔진(Pratt & Whitney R-1690 radial engine)을 장착하였다.

 

모델 299의 첫 비행은 1935년 7월 28일, 보잉의 주임 시험 조종사 레스 타워(Les Tower)에 의해 이루어졌다. 시애틀 타임즈(Seattle Times)의 기자 리처드 윌리암스(Richard Williams)는 여러 기관총을 장착하고 나타난 이 항공기를 보고 ‘Why, it’s a flying fortress!’라며 감탄하였고, 보잉은 그가 붙인 별명이 주는 가치를 이해하고 재빨리 이 이름의 상표권을 확보하였다. 모델 299는 8월 20일 시애틀에서 출발하여 평균 235 mph(378 km/h)속도로 9시간 3분을 비행하여 라이트 비행장에 도착하였는데, 이는 타사의 기종들보다 월등한 속도였다.

 

이륙 후 보잉의 4발 엔진 폭격기는 쌍발 엔진을 장착한 타사 기종들보다 뛰어난 성능을 보여주었고, 공군 총사령부(GHQ Air Force)의 프랭크 맥스웰 앤드류스(Frank Maxwell Andrews) 대장은 작은 쌍발의 항공기보다 이러한 대형 4발 장거리 폭격기가 더 효율적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의 의견은 항공단의 조달장교에게 반영되었고, 경합이 끝나기도 전에 항공단은 65대의 B-17을 구매하기로 결정하였다.

 

모델 299는 계속 개량을 거쳤고, 1935년 10월 30일 항공단의 시험 비행사 플로이어(Ployer), 힐(Hill) 그리고 보잉의 타워가 탑승한 2차 시험 비행이 있었다. 승무원들은 항공기 항공기 조종간을 잠그는 스위치를 해제하는 것을 잊어버렸고, 모델 299는 이륙 후 고꾸라져 지면에 충돌하였으며 승무원들은 모두 사망하였다. 모델 299의 시험은 실패로 돌아갔고, 항공단은 여전히 신중한 입장이었으며, 육군은 타사보다 높은 이 항공기의 가격을 불만스러워하였다. 육군 참모 말린 크레이그(Malin Craig)는 B-17 주문을 취소하기로 하였고 대신 더글라스의 쌍발 폭격기인 B-18 볼로(Douglas B-18 Bolo)를 133대 주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공단은 모델 299가 보여준 성능에 감명을 받았고, 1936년 1월 17일 시험비행 목적이라는 편법으로 13대의 TB-17을 주문하였다. YB-17은 기존 엔진보다 더 강력한 라이트 R-1820-39 싸이클론 엔진(Wright R-1820-39 Cyclone engine)을 장착하였으며 그 외에도 많은 개량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당초 지상에서 골격의 강도를 시험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14번째 YB-17은 소진식 터보과급기(exhaust-driven turbocharger)가 장착되었으며 1937년 비행 시험 예정이었지만 터보과급기에 결함이 발견되어 1938년 4월 29일에야 시험 비행을 할 수 있었다. 보잉은 개량에 10만 달러를 투자하였으며 1939년 완성된 기체는 상승고도와 최대속도가 더욱 향상되었다. 이 기체는 1939년 1월 31일 육군에 인도되어 B-17A 라는 명칭을 부여받았다.

1937년 3월 1일 주문된 13대 중 12대가 버지니아(Virginia)의 랭글리 비행장(Langley Field)으로 전달되어 제 2 폭격단(2nd Bombardment Group)에 인도되었고, 중폭격기 기술 개발 지원과 기타 소소한 문제들을 바로잡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과거의 참사가 재발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점검 목록이 제공되었다. 앤드류스 대장이 하달한 첫 임무로 세 대의 B-17이 이탈리아의 원양 정기선 렉스(Rex)의 사진을 찍기 위하여 대서양 방면으로 출발하였고, 이들은 주임 항법사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 중위의 지휘하에 800 마일(1290 km)을 비행하여 임무를 완수하였다. 이후 마지막 13번째의 TB-17이 라이트 비행장으로 전달되어 비행 테스트용으로 사용되었다.

활주로를 폭격하는 것으로는 독일군의 전투기 전력에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커 장군의 명령에 따라 별도의 B-17 그룹이 조직되어 독일 깊숙히 위치하는 주요 산업 시설들을 타격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제 8 공군은 이후 슈바인푸르트(Schweinfurt)의 볼 베어링 공장을 폭격하여 독일의 무기 생산에 차질을 야기하고자 하였다. 이 임무를 위하여 1943년 8월 17일에 230대의 B-17이 첫 출격하였고, 곧 300 대의 독일 공군 전투기와 조우하였다. 36대의 폭격기가 격추되었으며 200 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폭격 그 자체는 그다지 큰 피해를 주지 못하였다.

 

1943년 10월 14일 두번째 폭격이 시도되었고, 훗날 이 날은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로 알려지게 되었다. 291대가 출격하여 59대가 독일 전투기, 특히 대공포에 의하여 격추되었고, 돌아가던 중 1대는 영국 해협에, 5대는 영국 본토에서 추락하였으며 12대 이상의 폭격기가 크게 손상되어 전투 불능이 되거나 동체 착륙하였다. 총합 77기의 폭격기를 잃고 122대의 폭격기가 손상을 입어 수리를 받아야 했다. 전투인원 2,900명 중 650명이 돌아오지 못했고, 이중 일부는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이들 중 5명은 사망하였고, 43명이 살아남아 훗날 귀향하였으며, 나머지 594명의 승무원들은 최종적으로 행방불명 처리되었다. 피해를 입지 않고 돌아온 폭격기는 33대에 불과하였다.

이 막대한 피해를 겪고난 미 육군 항공단은 호위 전투기 없이 중폭격기가 적의 전투기 요격을 방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달았고, 영국 본토에서부터 독일까지 호위가 가능한 전투기가 확보되기 전까지 독일에 대한 주간폭격을 무기한 연기하였다.

 

1944년 2월 24일 슈바인푸르트에 대한 세번째 폭격 시도가 있었고, 이 주는 ‘대단한 주(Big Week)’로 기록되었다. P-51 머스탱(Mustang) 전투기가 폭격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덕분에 231대의 B-17중 11대만이 손실되었다. 머스탱의 호위는 폭격기의 손실률을 7% 아래로 떨어뜨렸으며 주간 3,500 대의 B-17중 단 244대만이 격추되었다.

 

1945년 4월 27일까지 폭격기 손실이 극히 적었기 때문에 교체용 폭격기가 도착하는 일은 없었으며, 단지 폭격 임무당 폭격기 수만 줄어들었다. 전투기와 연계된 폭격은 효율성 면에서 성공적이었다.

대서양 전선에서는 단 5개의 B-17폭격단만이 유지되었으며 모든 개량형을 총합해보아도 1942년 9월 최고로 많은 수를 기록한 것이 총 168대였다. 미 제 5 공군의 B-17들은 일본군의 항로를 훼방하는 임무를 주로 수행하였다. 항공단의 처음 방침은 폭격기를 고고도에 유지한채 폭격을 가하는 것이었지만 이렇게 해서는 명중률이 1% 정도밖에 나지 않았다. 제 5 공군의 사령관 조지 케니(George Kenney) 중장은 최저고도에서 폭탄을 투하, 물수제비 뜨듯 폭탄을 수면에 튕겨 명중시키는 새로운 저공비행 폭격법(skip-bombing, 반도 폭격, 스킵 폭격, 물수제비 뜨기 폭격 모두 같은 의미)의 등장에 열광하였고, 1942년 10월 23일 제 64 편대의 B-17 12대를 동원하여 절반은 10,000 피트(3 km) 상공에서, 나머지 절반은 100 피트(30 m) 고도에서 각각 일본 선박의 측면을 공격하도록 하는 실험을 하였다.

 

2차 대전 동안 미국은 총 32개의 해양 전투 비행단에 B-17을 배치하였다. 1944년 8월 그 수는 4,574대로 최고치를 기록하였으며, 유럽의 목표물에 640,036 톤(또는 580,630톤)의 폭탄을 쏟아부었다. 같은 시기 동안 B-24 리버레이터(Liberator)는 452,508 톤(또는 410,508 톤)을 쏟아부었으며, 다른 미국 항공기들의 총합은 463,544 톤(또는 420,520 톤)이었다. 약 4750대, 전체 B-17의 3분의 1이 전투중 손실되었다.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호위 전투기가 따라붙기까지 B-17의 방어는 오로지 자체의 .50 인치 구경(12.7 mm) M2 브라우닝(Browning) 기관총 뿐이었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보잉은 승무원들의 제안을 참고하여 방어력과 무장을 증가시킨 개량형들을 계속 선보였다. C형에는 .50 구경 4정에 .30 구경(7.62 mm) 1정이 장착되었지만 훗날 G형에 가서는 .50 구경 13정이 장착되게 되었다. 그러나 폭격기는 전투기와 공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성격의 항공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폭탄을 떨어뜨리고 나면 귀환길에 개개의 폭격기는 직선으로 그리고 위아래로 회피 기동을 실시하며 직접적인 타격을 피하고자 하였다.

 

1943년 항공단의 조사에 따르면 독일에 격추된 폭격기의 절반 이상이 폭격 대형을 벗어났다가 변을 당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된 미국은 새로운 상자형 폭격 대형을 개발하여 대형 안의 폭격기 각각이 서로를 엄호해줄 수 있도록 하였고, 적의 전투기 조종사들로 하여금 위험한 목표물로 인식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대형으로 움직이게 되면 개개의 폭격기들이 회피기동을 하기가 곤란하였다. 대형 내의 폭격기는 직선 비행만을 하게 되었으며, 이는 적의 전투기에 대한 좋은 방어 수단이 된 대신에 독일군의 88 mm 대공포에게는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또한 독일 전투기들은 새로운 전술을 고안하여 폭격기와 마주하는 대신 빠른 속도로 사격을 하며 지나치는 방법을 취함으로써 최소 위험으로 최대의 피해를 안겼다. 결과적으로 B-17의 손실률은 25%까지 다시 증가하였으며 슈바인푸르트에 대한 네번째 공격에서의 경우 B-17 총 291대 중 60대가 손실되었다. 이후 P-51 머스탱이 등장하면서 B-17은 겨우 안심하고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B-17의 생존성은 뛰어난 편이어서 어느정도 피해를 입어도 귀환에 지장이 없었다. 2차 대전중 제 8 공군의 B-17 조종사였던 월리 호프만(Wally Hoffman)은 적의 포화로 비행기 자체는 절단나도(cut and slashed almost to pieces) 승무원은 귀환할 수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마틴 카이든(Martin Caidin)이 보고한 케이스를 보면, 공중에서 포케불프 190과 충돌하여 엔진을 하나 잃고 좌우측 안정기가 손상된채 충격으로 대형에서도 벗어나 목격자들로부터 격추되었다고 보고되었던 B-17이 단 한명의 부상자도 없이 귀환한 사례도 있다. B-17의 견고함은 더 작고 가벼운 동시대의 B-24 리버레이터는 물론 영국의 아브로 랭카스터(Avro Lancaster) 중폭격기를 압도하였다.

꼬리는 박살난데다가 엔진 하나뿐으로, 또는 대공포화에 한쪽 날개가 잘려나간채 기지로 귀환했다는 B-17의 이야기는 흔한 것이었다. 상당한 내구성과 엄청난 동원 수량, 그리고 ‘멤피스 벨(Memphis Belle)’의 영광은 B-17의 명성을 더욱 드높였다.

 

한편 격추된 B-17과 B-24를 조사한 독일 공군은 최소한 후미에 20발의 20 mm 기관포를 명중시켜야 이들을 격추시킬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보통의 실력을 가진 조종사는 2%의 확률로 폭격기를 명중시킬 수 있었으며, 따라서 그 20발의 명중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1,000발의 20 mm 기관포탄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독일 최강의 요격기중 하나였던 포케불프 190은 초기에 2정의 20 mm 기관포에 총합 500발의 기관포탄을 장비하였다. 이 전투기의 유효사거리인 400 미터는 B-17의 1,000 미터에 비해서도 턱없이 부족하였다. 그러나 독일 전투기 조종사들은 후미에 20발을 때려넣는 대신 상대적으로 무장이 취약한 전방에 4-5발만 명중시켜도 폭격기를 격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포케불프 190 전투기에도 개량이 일어나 기관포는 2정에서 4정으로 두배 증가되었고, 적재 기관포탄의 수도 증가되었다. 또한 1944년에는 30 mm MK 108 캐논포가 개발되어 단 몇발만으로도 B-17을 격추시킬 수 있게 되었다. 대전 후반에 등장한 Me 262 전투기는 B-17의 격추에 더욱 효율적이었다. R4M 로켓을 장비한 이 제트 전투기는 폭격기의  50 사정거리 밖에서 단 한발의 명중탄으로 폭격기를 격추할 수 있었다. [출처 : Cursed Soul's Lair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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