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답사(2) : 성주 한개 마을

2011. 4. 20. 00:14여행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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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있는 한옥 보존마을인 '한개마을'은 2007년 12월 31일 중요민속자료 제255호로 지정된 영취산 아래 성산 이씨가 모여사는 전형적인 집성촌으로 조선 세종 때 진주 목사를 지낸 이우가 처음 자리를 잡은 후 대를 이어 살아 왔으며 현재 월봉공 지정현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100여 채의 전통가옥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각 가옥들이 서로의 영역을 지켜가며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풍수지리설로 보아 영남 최고의 길지로 꼽히며,조선 영조 때 사도세자의 호위무관을 지낸 이석문,

조선 말기의 유학자 이진상 등 명현을 많이 배출하였다.

이석문이 사도세자를 기리며 북쪽으로 사립문을 냈다는 북비고택, 이진상이 학문을 닦던 한주종택,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교리댁 등이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 한개마을에서는 33명의 대과 급제자가 배출되었다고 하는데, 한창 전성기에는 150여호가

있었으나 지금은 75호가 살고 있다고 한다.

 

한개마을 입구 : 한개란 "큰 개울가" 뜻이라고 함. 앞에는 큰 개천이 흘렀고, 뒤에는 영취산, 양옆에

좌청룡, 우백호의 작은 산으로 둘러싸인 명당터라 한다.

 

 

 

 

 

 

교리댁 입구 대문

 

교리댁 바깥 채

 

              말을 타고 내릴 때 사용하는 上馬石으로 가정집에 있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마석에는 "雲西迎月" 이라는 글귀가 음각되어 있다.  운서영월(雲西迎月:.‘구름은 서쪽으로 흐르고 달을 맞는다.’  놀러왔던 친구가 돌아갈 무렵 비가오니 "이보게 친구 비 그치면 돌아가게" 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좌측에 보이는 곳이 마굿간

 

 

150년 수령의 탱자나무, 교리댁의 선조가 제주도에 귀양갔을 때 가져와 심은 감귤나무인데 기후가

맞지 않아 탱자나무 형상을 하였다고 하는데, 제주도에 위리안치된 곳의 울타리에 탱자나무를 가져와 후손들에게 당쟁으로 희생된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고, 후손들에게 경계를 삼도록 교훈적인 의미로 심었다는 설도 있다고 함.

 

 

        뒷 뜰의 조상을 모신 사당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당으로 뽑혔다고 한다.

 

 

 

돈재 이석문의 신도비

 

북비고택의 솟을 대문

 

 

 

 

 

 

앞에 보이는 여닫이 문이 북쪽을 향해 배치되어 있다.

 

 

 

 

北扉(북비 : 북쪽 문짝)

 

北扉(북비 : 북쪽 문짝)

 

한개마을을 빛낸 이석문을 북비공(北扉公)으로 부르는 연유는 '북비'(北扉: 북쪽으로 난 여닫이 외문짝)를 이 집의 택호로 사용한 데에 연유하고 있다. 이석문은 영조 15년(1739년) 27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으로 활약했다. 그는 1762년에 사도세자의 참변을 직접 목격하고 영조에게 잘못이라 간하였으며,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자 세손을 업고 어전에 나아가 세자를 구하려다가 파직되어 낙향하였다. 이석문은 고택에 북쪽으로 문을 내고 세자가 묻힌 북녘을 향해 매일같이 절을 올렸다고 합니다. 후에 영조가 지난 일을 후회하며 벼슬을 내렸으나 그는 끝내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 뒤에서 바라본 한개마을

 

 

 

한주(寒洲)댁의 사랑채인 이곳은 主理世家의 편액과 한주, 대계, 삼주의 현판이 있는데, 이 것은

한주 이진상과 그의 아들 대계 이승희, 그의 손자 삼주 이기원 三代가 성리학을 연구하고 후학들에게

가르쳐서 主理(주희와 퇴계를 잇는 주리론)世家를 이루었다고 한다.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선생은 조선 왕조가 역사적 파국에 놓였던 19세기 후반 출현한 탁월한 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학문적 기본 입장을 ‘주자를 조술하고 퇴계를 법도로 삼는다’고 밝혀, 자신의 서재를 조운헌도제(祖雲憲陶齊)라고 이름 붙였다. 주자학을 학문적 근원으로 삼고 퇴계학을 학문 방법의 기준으로 삼아, 주자와 퇴계의 이론을 그 시대의 새로운 빛으로 조명하고 해석함으로써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열었던 것이다.

한주 선생은 성리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면서 자신의 성리학적 입장을 확고하게 정립했고, 예학과 경세론에 관한 저술도 남겼다. 특히 조선 왕조가 붕괴의 위기에 처하자 ‘춘추의리’를 시대 정신으로 새롭게 각성하면서 ‘춘추집전(春秋集傳)’, ‘춘추익전(春秋翼傳)’ 등을 저술해 의리 정신과 역사 인식을 밝혔다. 더불어 그는 도학의 심법이 지향하는 핵심 개념을 ‘도(道)’로 삼았다.[출처:매일신문]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서재인 조운헌도제(祖雲憲陶齊)

 

 

 

 

한개마을에 초가집이 있었는데 천정 석가래를 받친 대들보 부분이 사각형 형태가 특이하다고 하였으며, 양반집은 사당이 별채로 있었으나 평민이 사는 초가 삼칸에는 사당을 별채로 할 수가 없어 위폐만을 정면 아래에 보이는 조그만 광에 모셔두었다가 제사 때에 문을 열고 내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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