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그렇게 외진 곳에 묘를 썼나? 삼척 준경묘(濬慶墓)!!

2016. 4. 9. 12:32여행이야기

728x90



동해에서 삼척 미로면에 있는 조선왕조의 뿌리인 준경묘(墓)를 가기위해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넣었더니 내비는 곧장 직진하라고 하는데 삼거리에 준경묘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어 잠시 내려서 확인하고, 그래도 미덥지 못하여 300여m 떨어진 민가에 가서 이 방향이 맞는 것을 확인하고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있는 준경묘 올라가는 입구를 찾았다.






한국관광공사에서 펴낸 '대한민국 구석구석'에 의하면 준경묘는 활기리 능곡에 있으며, 조선 왕조의 태동을 예언한 백우금관의 전설(백마리 소 대신 흰소와 금관 대신 보리짚으로 관을 만들어 사용)이 있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 양무장군의 묘로서, 1899년에 영경묘와 같이 묘소를 수축, 비각과 목조대왕 구거지 비각을 건축하였다. 특히 이 일대는 울창한 송림과 원시림으로 산림욕이 적당하며 인근에 관광농원이 있다. 전주이씨 실존묘로서 남한에서는 최고의 시조묘이며 매년 4월 20일 전주이씨 대종 종약원 주관으로 제향을 올린다고 한다.






이 길이 준경묘를 가는 길 입구다. 그냥 쳐다만 보아도 이것은 묘를 찾아가는 길이 아니라 험난한 등산길을 가는 예감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을 통해 백두대간의 댓재로 연결되고, 두타산과 청옥산을 갈 수가 있다니 말이다. 준경묘는 이곳에서 1.8km 올라가야 한다.





준경묘 입구에 있는 미로면 활기리 어떤 밭에서 부자가 밭을 간다. 아들은 소가 되고, 늙은 아버지는 농부가 되었다.






준경묘 가는 길 입구에 서 있는 차량 차단기를 보고, 처음에는 원망스런 마음이 잠시 있었으나 준경묘를 가보고는 이 차단기를 설치한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가파른 산길도 산길이거니와 승용 차량으로 그곳에 용케 오른다고 해도 마주 오는 차량이 있을 때는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두타산 등산로 안내도가 이곳에 있는 것이 이곳에서 주 등산로로 이어짐을 볼 수가 있다.







길옆에는 활기리 주민이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토종벌통도 있고,








길손은 깔딱고개를 오르면서 희열을 느낀다. 아~~!! 이제 드디어 사진으로 만 보던 평지가 저곳에 펼쳐질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러면서 올라온 길을 되돌아보는 여유도 생겼다.






그러나 아뿔싸~! 만약 이렇게 평범한 곳에 묘를 썼다면 천하의 명당이 아니지






올라온 방향에서 오른쪽으로 90도 방향을 전환하면서 비포장길이 나타난다.








길밑으로는 100m가 족히 넘는 낭떠러지 길이다.






만약 산 아래에 차단기가 없었다면 차 한대 겨우 지나가는 저 앞에서 맞은편에서 차량이라도 오면 어떤 강심장도 쉽게 후진할 수가 없을 것이다.






도대체 옛날이면 호랑이가 튀어나올 것 같은 깊은 골에 기껏 올라왔더니 다시 내려가는 길이 보인다. 흔히 등산길에서 경험했지만, 이것은 정말 맥이 빠진다. 고려 시대에는 산길도 좁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이곳까지 상여를 매고 왔을까? 그냥 시신을 업고 온 것은 아닐까?






워낙 호젓한 곳이라 사람 본 적이 가물가물한 다람쥐가 길손을 보고도 겁을 내지 않는다. "아저씨 내리막이라고 짜증 내지 말고, 조금만 힘을 더 내요. 이곳을 지나면 수월하게 올라갈 수가 있어요!" 하면서 "땅콩 하나 주세요"하는데 불쌍한 이 길손은 땅콩 한 개도 없다. "미안하다 다람쥐야 추운 겨울을 용케도 버텼구나~ 건강하게 준경묘 주변에서 식솔들과 오손 도손 잘살거라"







개복숭아 나무가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다. 밑에는 꽃으로 난리가 났는데







마지막 깔딱고개를 오르려다 뒤를 돌아본 길손은 가슴이 철렁하였다. 뭐 호랑이와 늑대를 보았나? 아니다. 죽은 소나무를 본 것이다. 그런데 죽은 소나무가 너를 잡아먹기라도 하느냐?


내가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고물 사진기로 이렇게 소나무와 주변 풍경을 열심히 찍고, 블로그에 올리는 것은 이렇게 울창한 소나무 숲이 '소나무 재선충'때문에 멀지 않은 장래에 멸종의 날이 오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 명줄이 길다면 죽기 전에 목도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아~~!!

소나무 재선충병이 강원도에 도착하였다고 하더구나!!

우선 먹고 살기 힘든데 그놈의 재선충이 뭐 대단하냐고 하겠지만

소나무가 멸종하면 우리 민족의 정체성도 조금씩 바뀔 것이다.

산림청에만 맡기지 말고, 누구라도 우리의 땅에서 자라는 이 멋진 황장목(금강송)을 반드시 살려야 한다.


제발 저 죽은 소나무가 재선충 때문이 아니라 수명이 다해 죽었다면 좋으련만~~





소나무 숲을 스치는 강한 바람 소리가 마치 범이 포효하는 것 같다. 깊은 산길을 가기에는 늦은 시간인데 이렇게 마지막 깔딱고개가 지친 길손을 맞는다. 저기를 지나면 마침내 준경묘가 오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하면서 마지막 힘을 낸다.






깔딱 고개를 오르니 오른쪽에 철제 보호 우리 안에 멋진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밝게 누런 빛을 띠면서 아주 곧게 자란 소나무가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주변에 황장목이 많지만 이렇게 곧은 소나무도 잘 없다.






한국의 풍수지리에 의하면 2001년 5월 8일 산림청장의 주례로 충북 보은군 내속리산 상판리에 있는 천연기념물 제103호인 정이품송()을 신랑으로 맞아 준경묘역에서 세계 최초의 소나무 전통혼례식을 가졌다는 것이다. 보은군수가 신랑(삼산초등학교 6학년 이상훈 대역)의 혼주가 되고, 삼척시장이 신부(삼척초등학교 6학년 노신영 대역)의 혼주가 되어 많은 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이 거행되어 한국기네스북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정2품송과 혼례를 치렀으니 이젠 이 소나무는 정부인송()이라 불러야 옳을 것 같다.





 

혼례 소나무 옆에 오래된 돌담이 있다. 세월의 무게가 범상치 않게 내려앉은 곳이다. 그러나 주변에 어떤 설명도 없다.

 

 

 

 



정사각형으로 쌓여진 돌담이 있고 돌담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계단까지 있다. 옛사람들이 살았던 자리인가? 아니면 서낭당이었나?

 

 

 

 


돌담 안에는 작은 건물의 잔해로 보이는 것이 눈에 띈다. 이 건물의 용도는 뭐였을까? 능참봉이 살았을까? 돌담 안의 또 작은 돌담은 무엇을 뜻하나? 기괴한 느낌마저 드는 것은 길손의 두려운 마음때문일까?

 

 

 






가파른 길을 굽이굽이 돌아 숨이 턱에 차고, 비로소 안정을 찾을 즈음 호랑이가 살았음직 한 깊은 골짜기에 넓은 분지가 나타난다. 사진으로 여러 번 보았던 바로 그곳이다. 입구에 황장목들이 오후 4시 40분경 늦게 도착한 길손을 서산으로 기우는 햇살과 함께 맞아주고 있다.


야사에 의하면 이성계의 증조부 '이안사'는 전주에 살면서 전주 관아의 관기를 사랑했는데 사또와 삼각관계였다가 사또를 혼내주고 이곳 삼척으로 왔다는 說이 있다고 한다. 그는 어느 스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 부친인 이양무의 묘를 이곳에 썼다고 하니 그 정성이 정말 놀랍다.






이 안내석은 별것이 아니다. 언젠가 아름다운 숲으로 지정되었다는 것인데 이곳이 아름답지 않다면 어느 곳이 아름다우랴? 쓸데없는 노고를 하였다.






한국콘텐츠 진흥원의 문화원형백과 한국의 풍수지리에서는 이곳 준경묘(慶墓)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조선왕조의 뿌리,
풍수가에서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터 잡은 준경묘에 가장 많이 붙이는 수식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에 묻힌 이양무(: 고려 의종 때 정중부와 함께 무신정권을 수립했던 이의방의 동생인 이인의 아들)장군은 이한()을 시조로 한 전주이씨()의 17세 손으로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의 5대조 할아버지다. 이성계의 가계()를 보면, 목조()로 추존된 고조부 안사(), 익조()로 추존된 증조부 행리(), 도조()로 추존된 조부 춘(椿), 환조()로 추존된 부친 자춘()으로 이어지는데 이들 능들은 모두가 지금은 갈 수도 없는 북한의 함흥 땅에 있다고 전해지고 있어 풍수가에서는 이곳 묘에다 이런 수식어를 붙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주에 살던 이양무 장군이 이곳 삼척 땅 활기리에 묻히게 된 것은 고려 고종 18년(1231년) 그의 아들 안사가 지방 관리들과의 불화로 생명에 위협을 느끼자 고령의 부모와 그를 따르던 170여 가구의 식솔들을 거느리고 삼척 땅 활기리()로 피신해왔는데, 그 이듬해에 운명하였기 때문에 이곳에 묻혔다고 한다. 이안사의 삼척 피신에 대해서 <<용비어천가()>>는 “전주에 살았던 지방호족인 목조에게 사랑하는 관기()가 있었는데, 안렴사(使)로 부임한 산성별감()이라는 관리가 그 기생을 탐하게 되자 목조와 대판 싸움이 벌어지고, 그때 목조는 지방장관인 지주사()를 포함한 관헌들을 싸잡아 모욕을 하게 된다. 그러자 지주사는 산성별감과 음모하여, 이안사를 목자왕기설() 등으로 음해()하려들자 만약 이것이 고려왕실에 알려지면 멸문지화()를 피할 수가 없다고 느낀 목조가 야반도주를 한다.”라 적고 있다.

오늘날 이양무의 무덤을 준경묘라 부르게 된 것은 고종36년(1899년)에 그 동안 실묘()하였던 이곳 이양무의 묘와 이곳에서 4km 정도 떨어진 하사전리에서 그의 부인 묘를 찾아 대대적인 묘역 정비공사 후 이양무의 묘를 준경묘()라 하고, 그의 부인 묘를 영경묘()로 정하면서다.

준경묘 찾는 길은 태백시나 동해시에서 38번 국도를 타고 삼척시 미로면에 들어서면 도로가에는 ‘준경묘 입구’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표지판을 따라 약1.5km를 가면 활기리 마을이다. 백호자락에만 드문드문 몇 채의 집이 들어 서있는 작은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준경묘 1.8km’라는 표지판을 또 세워 산으로 난 시멘트 포장길을 화살표로 가리키고 있다. 준경묘를 오르기에 앞서 이안사가 이곳에 피신하여 터 잡고 살았다는 집터를 살피기 위해 마을의 중앙을 흐르는 개울에 놓인 다리를 건너는데, 다리의 명칭을 이 마을의 지명을 붙인 활기교()가 아닌 황기교()라 적고 있다.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아 마을 어르신께 여쭈니 활기()라는 지명은 본래 황제가 나왔다는 황터 곧 황기()가 변한 것이라 한다. 그 황제가 조선의 왕을 칭하느냐는 필자의 물음에 긍정도 부정도 않는다.

황기교를 건너자 말자 이 마을의 청룡자락에는 안내문이나 그 어떤 표시도 없는 최근에야 세운 듯한 비각() 하나가 나타난다. 이안사가 이곳에 피신 와서 살았던 집터를 표시한 비각이란다. 그런데 이 집터를 기준으로 좌우()의 공간과 현재 마을이 들어선 개울 건너 명당을 다 합쳐봐야 스무 가구정도 들어설만한 협소한 공간이라 그를 따라온 170여 가구의 식솔들은 과연 어디에서 살았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드디어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게 만든(?) 천하의 길지(吉地)이자 명당인 준경묘 입구에 도착했다. 길손의 눈에는 거침없이 위엄이 있는 땅으로 보인다.






이제는 차량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이곳이지만, 이렇게 산이 높은 곳에도 농토로도 사용할 수 있는 비교적 넓은 땅이 있으니 놀랍다.






오른쪽으로도 마찬가지다. 늪도 있는 것으로 보아 농사도 가능할 듯하다.






준경묘가 있는 분지에서 내려가는 물이 이곳으로 모여서 내려가는 개울가에도 커다란 황장목 군락이 있다.






해가 서산을 넘어가는 시간이라 역광이 비친다. 사진기도 허술하고 역광까지 가세하니  이 좋은 경관이 말이 아니다. 멀리 제실과 비각, 그리고 준경묘가 보인다.









준경묘를 향해 오르는 길 왼쪽으로는 아람드리 황장목 군락이 보인다. 2008년 12월 10일 문화재청은 광화문과 숭례문 복원을 위해 이곳 준경묘에서 황장목 20본을 벌채하였다.






홍살문을 지나면, 바로 제실과 연결되는 돌길이 놓여있고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준경묘 뒤에는 큰 산봉우리가 있다. 경봉당 스님이 오래 주석하셨던 양산 통도사 극락암 뒷산 뒤에도 더 큰 영축산 봉우리가 극락암을 감싸 안은 듯이 보였는데 이곳도 그런 분위기다. 






비각 오른쪽으로 작은 골짜기가 있고, 반대쪽에도 작은 골짜기가 있으며, 그 사이 작은 봉우리 끝부분에 준경묘가 자리하여 풍수 문외한이 보더라도 명당이라는 느낌이 온다.






비각 뒤에 이곳을 평평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굳이 이렇게 작은 언덕을 만든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단지 보기 좋아지라고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성계의 고조부이며, 목조로 추증된 이안사의 아버지 이양무가 잠들어 있는 준경묘(濬慶墓)가 눈앞에 있다. 봉분 아래에는 돌로 만든 기단 석축이 있고, 그 밑으로 작은 둔덕을 둔 것이 특이하다. 바닥에 작은 점처럼 박힌 돌을 뽑지 않고 그냥 둔 것도 그렇고


야사에는 이 험한 곳에 묘터를 잡게 된 이유를 이렇게 전한다. 

이성계 증조부인 이안사가 전주에서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로 피신 와 자리를 잡고 산지 1년 만에 아버지(이양무)의 상(喪)을 당하게 된다. 이안사는 아버지 묘 자리를 구하려고 이산 저산 산등성이를 넘어 사방으로 헤매고 돌아다녔으나 마땅한 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다. 마침 활기리 노동(盧洞) 산마루에 이르러 몹시 고단하여 나무 밑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한 도승이 동자승과 함께 나타나 주위를 두루 살펴 인적이 없음을 확인한 뒤 한 곳을 가리키면서 "대지(大地)로다 길지(吉地)로다"하는 것이었다.

 

이안사가 나무 밑에 앉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모르는 도승은 이어서 말하기를, "이곳이 제대로 발복하려면 개토제(開土祭)에 소 백(百)마리를 잡아서 제사를 지내야 하고, 시신을 금관(金棺)에 안장해 장사를 지내야 한다. 그러면 5대손 안에 왕자가 출생해 기울어 가는 이 나라를 바로 잡고 창업주가 될 것이다. 또한 이 땅은 천하의 명당이니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하는 것이었다. 동자승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더 있다가 그들은 다른 곳으로 길을 떠났다. 자신의 귀를 의심한 이안사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생각에 골몰하였으나 가난한 살림살이에 소 백 마리를 어디서 구하며, 더구나 금으로 만든 관은 어디서도 구할 수가 없었다. 부친의 묏자리를 명당에 쓰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형편상 어쩔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안사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궁여지책을 찾아내게 되었는데, 소 백(百) 마리는 흰 소 한 마리로 대신하고 금관은 귀리 짚으로 대신하면 될 것 같았다. 흰 소를 한자로 쓰면 백우(白牛)이므로 숫자상 일백 백자와 발음이 통하게 되어 백우(百牛)가 될 수 있고, 귀리짚은 같은 황금색이므로 금관과 의미가 통할 것이라 판단하였다. 마침 처가에 흰 얼룩소가 있었는데, 다음날 아침 처가에 간 이안사는 밭갈이 할 일이 있다며 흰 소를 잠시만 빌려 달라고 하여 소를 끌고 노동(盧洞) 산마루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처가에서 빌린 흰 소를 잡아서 제물로 사용하고, 부친을 넣을 관은 귀리짚으로 대신해 아버지의 장사를 치렀다.(출처 경북일보)






왼쪽은 준경묘 둔덕이고 오른쪽으로 작은 골짜기 입구가 있다.






왼쪽 골짜기 모습이다. 묘가 있는 봉우리 양쪽으로 흐르던 물길은 작은 분지를 거쳐 한곳으로 모여서 밑으로 내려간다.






재실쪽에서 올라온 입구를 바라본다.






산과 골은 깊고, 해가 지려고 하니 마음도 바쁘다. 비각만 보고 안의 비석 내용은 볼 겨를이 없다. 주변 산봉우리의 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성난 맹수의 울음소리 같아 길손의 마음을 움츠리게 한다.






제사를 지내는 재실이다. 이곳에서 매년 청명일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묘지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석축의 가장자리는 원래 그곳에 있던 바위를 이용한 것이 이채롭다.








망자에게 예를 표한 후에 무엄하게도 봉분 뒤에 올랐다. 이것은 봉분 뒤의 모습인데 풍수지리적으로 워낙 명당터여서 그런지 토성이 아주 낮다.






봉분 뒤쪽으로 멀리 주봉이 있는데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다. 길손이 워낙 겁이 많은 탓도 있지만, 이곳에 홀로서니 마치 중앙으로 큰 범이 올 것만 같아서 오금이 저린다. 작은 숲길처럼 보이는 것이 있지만, 감히 그곳으로 발길을 옮기지를 못하겠다.







봉분 뒤에서 본 좌우 골짜기의 모습이다.










봉분 앞으로 큰 묘와 같이 생긴 봉우리가 있는데 능선을 따라 황장목이 분포하는 것이 특이하고, 강한 바람이 이곳을 스치면서 내는 바람 소리가 마치 큰 짐승이 포효하는 듯 들려서 가뜩이나 움츠린 길손의 가슴을 더 두근거리게 한다. 








봉분 주위에 있는 이 돌은 봉분을 두르는 요석(腰石)을 대신한 것도 아닐 것이다. 빼낼 수도 있는 것을 그냥 둔 것도 아마 풍수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아니면 빙산처럼 밑에 큰 바위로 도사리고 있을 수도 있고







축대 가장자리가 처음 시작되는 곳에 있는 큰 자연석








준경묘 앞산 7부 능선에 활엽수 사이로 늠름하게 서 있는 황장목이 눈에 띈다.







내려오는 길에 눈길이 가는 멧돼지 흔적








이렇게 높은 곳에도 늪이 있고, 수초가 있는 것이 신기하다. 사람이 살려고 마음먹으면 살 수도 있을 것 같다. 농사지을 땅도 조금 있고, 생명수인 물까지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