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사벌 경천대(擎天臺)

2016. 7. 3. 19:48여행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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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래간만에 사벌 경천대를 왔다. 밑으로는 낙동강이 도도히 휘감아 돌아가는 절벽 위에 우뚝 솟은 바위가 세월의 모진 풍파를 이기고 한결같이 저 자리에 서 있다.

 

 

 

 

 

 

 

 

내 블로그에서 '먼 길을 가는 나그네'라는 뜻의 '길손'을 나 자신을 일컫는 일인칭 명사처럼 사용하고 있는데 그 '길손'이 이 공원에 설치된 나무 조각품을 기증한 사람의 예명이라니 참 인연도 그런 인연이 있는가 보다

 

 

 

 

 

 

 

나그네가 쉴 수 있도록 의자가 즐비한 이곳은 우암 채득기 선생이 거처했던 집터라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기록된 것을 보면, 우암 채득기(沂 ; 1605(선조 38)∼1646(인조 24) ) 선생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서 본관은 인천(). 자는 영이(), 호는 우담()·학정(). 충청북도 충주 출생이고 학문이 속성하여 경사백가()에 통달하였으며, 역학·천문·지리·복서·음률·병서에도 조예가 깊었다.

 

32세 되던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분감척의()하여 화산() 선유동()에 들어가 종로()의 계()를 삼고자 하였다. 다시 상산( : 지금의 상주)의 무지산()에 들어 두문불출하고 독서에 전심하였다.

 

그 뒤 봉림대군( : 뒤의 효종)을 비롯한 세자·대군이 심양에 볼모로 가게 되어 인조가 그를 왕호()로 불렀으나, 병을 핑계로 불응하여 3년 동안 보은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다시 인조의 권유에 의하여 나가 심양에서 대군들을 잘 받들었다. 이 때 세자 왕호에 오르는 감격의 정회를 읊은 가사 「봉산곡()」을 지었으며, 특히 효종의 총애를 받았다. 환국시 임금의 소명이 있었으나 사양하고 낙동강상 옥주봉() 아래에 복거하였다. 1798년(정조 22) 집의에 추증되었으며, 상주상의사()에 제향되었다

 

 

 

 

 

 

봉산곡(鳳山曲)은  천대별곡()이라고도 하는데 우암 채득기가 지은 가사로 구성 및 형식은  4음보 1구로 헤아려 모두 102구(전구 1구 포함)이다.

 

음수율은 3·4조와 4·4조가 주조를 이루며, 2·3조, 4·3조, 2·4조 등도 드물게 나온다. 「봉산곡」은 장지()에 귀글체로 쓰여졌고, 「천대별곡」은 『군신언지록()』에 줄글체로 쓰여져서 전한다.

 

 

병자호란 때에 세자와 대군이 볼모가 되어 청나라의 심양()에 들어갈 때 작가가 왕자를 호종()하라는 명을 받고 대궐에 나아가 임금의 망극한 은혜를 읊은 시이다.

 

내용은 7단으로 나눌 수 있다. 제1단에서는 왕명을 받고 감격하여 장도에 오르면서 은둔지의 자연경물을 읊고 되돌아오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다. 제2단에서는 오랑캐에 대한 원분과 증오의 생각을 이길 길 없어 속세를 떠나 은둔하여 안빈낙도()하는 심회를 읊었다.

 

제3단에서는 은둔지의 천연적 기경()을 찬미하였다. 제4단에서는 은둔지의 가을과 겨울의 경물의 아름다운 변화상을 찬미하였다. 제5단에서는 유유자적하는 자신의 생활상을 읊었다. 제6단에서는 우국충군의 지극한 정을 노래하였다.

 

제7단에서는 성은의 망극함을 갚고 자연으로 다시 돌아오겠다고 읊었다.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는 가사작품으로서, 그 내용과 작자가 분명히 전해오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가사문학사상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경천대를 오르는 계단에 놓인 돌확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가? 식수를 보관하였던가? 아니면 치성을 드렸던 곳인가?

 

 

 

 

 

돌은 화강암이 아니고 부스러지기 쉬운 잡석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