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교육연수원과 이오덕, 권정생 선생 특별전시회

2018. 1. 23. 20:52살아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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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과천에 있던 중앙공무원 교육원이 분원을 만들어서 그 분원이 이곳 대구 혁신도시에 온 줄로 알았다.

 

 

 

자세히 보니 중앙공무원교육원이 아니라 중앙교육연수원이다. 그러니까 교육공무원과 교육분야 종사자 교육기관이었던 것이다. 예전에 길손이 가뭄에 콩나듯이 수원 파장동으로 가끔씩 교육가서 하숙집에서 숙식하며, 가까운 교육원에 다녔는데 짧게는 1주, 길게는 4주씩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전국에서 온 교감선생님들이 많이 보여서 뭐하러 왔나 하고 봤더니 행정자치부 산하 국가전문행정연수원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그동안 연혁을 보니 1999년 1월 행정자치부 산하 국가전문행정연수원 내 교육행정연수부에 통합되었고,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에서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184번지로 이전하였다가 2005년 1월 1일 교육인적자원부 직속 교육인적자원연수원으로 분리·독립되었다가, 같은 해 3월 7일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에 위치한 서울특별시교육연수원 교육동으로 이전하였다가 2015년 10월 19일 공공기관 지방 이전 계획에 따라 대구 신서 혁신도시로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곳에 근무하고 있었던 공무원들은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이렇게 저렇게 이곳에 왔는데 대프리카의 명성을 익히 알고 왔겠지만, 입장을 바꿔놓고 봐도 황망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길손이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그러나 너무 상심하지 말기 바란다. 교육원 뒤에는 한국가스공사도 사이좋게 들어왔으니~^^

 

 

 

 

 

 

 

교육기관 종사자 교육기관답게 '모든 아이는 우리 모두의 아이입니다.'라는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중앙교육연수원을 들어서면 1층 로비에 '아이처럼 살다'  2017. 이오덕. 권정생. 하이타니 겐지로의 따뜻한 만남이라는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길손은 권정생 선생의 강아지 똥이라는 글을 감명깊게 읽었기에 특별히 관심을 가져본다. 

 

 

 

 

권정생 선생과 이오덕 선생을 검색하니 이런 글이 몽실북클럽에 올라왔다. 올린 이(가시고기)는 내가 읽은 책,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 (이오덕,권정생)의 서평이었다.

 

아동문학가로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 하면 권정생님일 것입니다. 다양한 동화와

아동문학가로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 하면 권정생님일 것입니다. 다양한 동화와 동시를 쓰시면서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남기신 분이시며 동화 강아지똥은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었으며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오덕 선생님 또한 어린이들을 위한 문학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리고 글쓰기에 관한 연구를 많이 하신 분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권정생님과 이오덕님의 편지. 이 안에는 두분의 이야기가 많이 담겨져 있습니다. 특히 문학에 관한 이야기 뿐 아니라 서로와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면서 위로와 아픔을 같이 나누곤 하였습니다. 특히 이오덕 선생님은 궁핍한 삶을 살았던 권정생님께 추위와 물질적인 고통에서 벗어나는데 많은 도움을 주신 분입니다.
 
우리는 권정생님의 동화는 잘 알지만 그분의 삶은 잘 알지 못합니다. 권정생님은 일본에서 태어나 어릴적부터 배고픔 속에 살면서 결핵을 평생 앓고 계셨습니다. 그리하여 1969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강아지똥을 발표하였지만 항상 배고픔과 추위와 병과 아픔을 함께 하여야만 하였습니다. 그런 권정생님의 아픔을 덜어 주신 분이 이오덕 선생님이었습니다.

 

권정생님과 이오덕님의 편지. 이 안에는 두분의 이야기가 많이 담겨져 있습니다. 특히 문학에 관한 이야기 뿐 아니라 서로와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면서 위로와 아픔을 같이 나누곤 하였습니다. 특히 이오덕 선생님은 궁핍한 삶을 살았던 권정생님께 추위와 물질적인 고통에서 벗어나는데 많은 도움을 주신 분입니다.
 
우리는 권정생님의 동화는 잘 알지만 그분의 삶은 잘 알지 못합니다. 권정생님은 일본에서 태어나 어릴적부터 배고픔 속에 살면서 결핵을 평생 앓고 계셨습니다. 그리하여 1969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강아지똥을 발표하였지만 항상 배고픔과 추위와 병과 아픔을 함께 하여야만 하였습니다. 그런 권정생님의 아픔을 덜어 주신 분이 이오덕 선생님이었습니다.

 

부디 가을에는 덜 아프시길' '무리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모릅니다' 편지속 구절 하나 하나는 마지막 삶을 칠곡 연화 요양원에서 보내야 했던 권정생님께 크나큰 위로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느꼈습니다. 두 분이 같이 하셨기에 우리가 강아지똥이나 몽실 언니가 탄생할 수 있었으며 편하게 동화를 읽고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는 것을 책을 통해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8개월 전에 읽었던 책이랍니다.......문득 생각나서...

 

이오덕(德) 선생은 교육자이자 아동 문학가로 경북 청송에서 태어나 43년 동안 국민학교에서 교사, 교감, 교장을 지내다가 그만두고 우리말연구소를 만들어 글쓰기 교육운동과 우리말 연구에 힘썼으며, 안동 시골에서 이름 없는 권정생 선생을 발굴하고, 그와 교류하면서 불우했던 권정생선생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고 한다. 

 

 

 

 

 

 

 

 

 

 

이오덕 선생이 사셨던 무너미 마을은 아마도 충북 충주시 신니면 수월리가 아닌가 한다. 돌을 쌓아 만든 집은 남자의 자격에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경북 영양의 꿀쟁이 성악가(꿀포츠) 김성록 씨가 사는 집과 비슷하게 생겼다. 어쩌면 같은 집인지도 모르겠다.

 

 

 

 

'앙마 개구리'를 보니 지금은 멸종위기에 몰려서 우는 소리도 듣기 힘든 '맹꽁이'가 생각난다. 우리는 맹꽁이를 '앙마구리'라고 불렀다. 배가 볼록한 개구리 비슷한 몸으로 천천히 기어가다가 짓궂은 개구쟁이가 작대기로 몸을 살짝 건드리면,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네다리로 길게 버티면서 몸통을 한껏 부풀려 상대방에게 거짓 위력을 과시했던 맹꽁이, 그 맹꽁이 아니 앙마구리의 오앵거리는 소리가 듣고 싶다.

 

 

 

 

 

권정생 선생은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으며, 해방 직후 1946년 경북 청송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는 가난으로 인하여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전국을 돌며 걸식을 하다가, 1967년에 경북 안동군 일직면 조탑동 마을의 일직교회 종지기로 평생 그 교회에 딸린 문간방에서 혼자 살면서 글을 쓰다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빌뱅이 언덕 밑에 있었던 상엿집 옆터에 작은 방 두 칸 흙집을 마련하여 그곳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권정생 선생의 살아온 길이 눈물겹다. 1965년 29세 청년기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석 달 남짓 대구, 김천, 상주, 문경, 점촌에서 거지 생활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고 몇 달 뒤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내가 어릴 때 거지와 거지를 놀렸던 동네 아이로 권정생 선생을 만났을 수가 있었겠다.

 

 

 

 

1974년 38세 때 그 유명한 첫 단편 '강아지 똥'을 펴냈다. 길손이 고등학교 3학년에 다닐 무렵이다.

 

 

 

 

2007년 평생을 가난하게 살며, 아프고 가난한 아이들 곁에서 아이들 동무로 산 권정생은 7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동네 청년들이 빌뱅이 언덕 상엿집 옆터에 지어준 8평짜리 흙집에 1983년에 이사했다. 1986년 3월 27일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호롱불을 밝히고 살았다. 그는 1983년 4울 11일 이오덕 선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사온 집이 참 좋습니다. 따뜻하고, 조용하고, 그리고 마음대로 외로울 수 있고, 아플 수 있고, 생각에 젖을 수 있어요,'

 

 

 

 

 

 

 

 

권정생과 이오덕이 서로 소통했던 육필 편지도 전시되었다.

 

 

 

 

 

 

 

권정생 선생이 남긴 유언장과 그가 생전에 사용했던 마요네즈 병으로 만든 특이한 호롱불이 있었다. 길손도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호롱불을 사용했지만 병 속에 심지를 넣은 것은 생전 처음 본다.

 

 

 

 

 

마요네즈 병 안에 심지가 들어있었는데 사용하는 기름은 석유였는지 아니면 식물에서 짜낸 기름인지 확인되지 않지만, 속이 빈 작은 쇠 대롱 같은 곳에 심지를 넣고, 그 쇠 대롱을 철사로 묶어서 병 입구에 고정하였는데 위에 뚜껑을 벗기고 바깥으로 들고 나가면 훌륭한 램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잠을 잘 때 뚜껑을 닫으면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 불이 꺼질 것이다. 권정생 선생이 독창적으로 이 호롱을 만들었다면 정말 대단한 발명가(?)라고 아니 할 수가 없다.^^

 

 

 

 

그가 남긴 유서의 내용은 이렇다.

 

내가 죽은 뒤에 다음 3사람에게 부탁하노라

 

1. 최완택 목사, 민들레 교회

   이 사람은 술을 마시고, 돼지 죽통에 오줌을 눈 적은 있지만, 심성이 착한 사람이다.

 

2. 정효경 신부, 봉화군 명호면 비나리

   이 사람은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

 

3. 박연철 변호사

   이 사람은 민주 변호사로 알려졌지만,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우리 집에도 두세 번쯤 다녀갔다. 나는 대접 한 번 못했다.

 

위 세 사람은 내가 맡긴 모든 저작물을 잘 관리해주기를 바란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만약에 관리하기가 귀찮으면 한겨레 신문사에서 하고 있는 남북 어린이 어깨동무에 맡기면 된다.

 

유서의 내용이 비장한 느낌은 별로 없고, 그 유서가 약간 익살스럽기도 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배움의 깊이가 얕았지만, 글씨체가 수려하고,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오덕 선생의 영향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다.

 

목사님이 술을 마시고, 돼지 죽통에 쉬~하는 것은 본 적이 있는 것을 마지막 유서에 넣어서 그 유서를 보는 사람을 빙그레 웃게 만든다.

 

 

 

 

 

 

 

 

 

http://www.idaegu.com/?c=11&uid=373900 

‘맑은 영혼’의 아동문학가 권정생

 

http://hosabon.blog.me/221093412580

안동의 권 정생님

 

 

 

 

하이타니 겐지로 선생은 비록 일본인이고, 이오덕, 권정생 선생과는 직접적인 교류를 한 적은 없었겠지만, 비슷한 시대에 한국과 일본에서 아이들을 좋아했던 아동 문학가의 삶의 궤적은 비슷했다. 그래서 비록 국적은 다르지만, 이곳에 그의 발자취와 작품을 전시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