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12. 19:30ㆍ살아가는 이야기
구미시 해평면 낙산 1리의 논(畓) 사이에 보물 제469호 통일 신라 시대 3층 석탑이 있다. 안내문에는 이곳에 통일 신라 시대의 사찰이 있었다고 하는데 기록에 없으니 그냥 무명사찰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인근에는 가야와 신라의 무덤이 200기 가량 있는 낙산리 고분군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과 이 사찰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근처 백성들이 안녕을 빌었던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사찰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빈터에는 석탑만 남았다.
탑 주변에 세워진 작은 비석에 1971년도에 시공했다는 것이 아마도 문화재 보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새로 시공한 화강암과 옛 화강암의 색조가 달라 구분하기가 쉽다.
탑 왼쪽으로 '냉산'이 보이는데 그 오른쪽 산줄기 너무에는 '도리사(桃李寺)가 있다.
그 당시에는 '하였읍니다.'가 맞는 맞춤법인데 '하였음니다.'로 된 것은 문화재 보수가 얼마나 허투루 이루어진 것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아무리 문맹이 많았던 시기였다고 하나 이것 하나 제대로 감수하지 못한 것은 문화재 당국이나 군청, 면사무소 공무원의 무사안일이 이유일 것이다. 길손이 사소한 것을 지적하는 것은 비석이 한 번 세워지면 수백년 아니 수천년을 갈 수도 있으므로 지금의 지자체 공무원들이 교훈 삼아 후일에 경계해야 할 덕목으로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탑 기단부의 넓적하고 반듯하게 생긴 돌이 있으니 누군가 몰래 가져가서 요긴하게 사용하였을 것인데 길손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가 고난을 겪던 조선 시대거나 일제강점기가 아니었나 싶다. 훔쳐간 것은 훔쳐간 것이고, 그러면 보수할 때 신경을 써야지 이곳도 대충 보수하여서 아래 기단부가 내려앉았고, 그사이에는 틈이 생겨서 흉하게 보인다. 이런 사소한 것만 봐도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기술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나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탑신부에 사용된 돌이 어느 채석장 한 곳에서 채굴한 석재라고는 믿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돌의 색깔이 마치 흙으로 빚은 것처럼 보이는 석재의 모서리 부분이 각이 지지 않고, 둥그스름한 것이 8세기에 만들어진 원래의 탑을 이미 옛날에 누군가 보수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길손이 보기에는 석재라기보다는 단단한 흙벽돌로 만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올라가서 망치로 두드려 볼 수도 없는 입장이고, 보수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제일 밑에 답신부 밑 부분과 비교하면 어떻게 잘 못되었나 금방 알 수가 있다.
석탑 주변에서 사방팔방으로 둘러보았다. 지도를 보니 저 너머에는 선산 도리사가 있다.
탑 주변에는 농민들이 사용하는 트랙터나 경운기 바퀴자국으로 인해서 생긴 구덩이에 물이 고인 곳이 있었는데 무엇인가 작은 움직임이 있는 듯하여 들여다 보니
그곳에는 농민들이 친환경 농법을 위해 키우는 우렁쉥인지 아니면 다른 조개류가 사는지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언젠가 어느 풍수지리 하는 사람이 쓴 글을 보니 산소를 이장하려고 봉분을 파헤치니 관에는 물이 가득 차서 고인의 머리는 고인의 다리 밑에 있었고, 관속에는 작은 민물조개로 보이는 것이 살고 있었다고 하여 놀란 적이 있었는데 정말 기묘하다. 만약에 농민이 지난해에 논에 제초용으로 풀어놓았던 우렁쉥이의 알이라면 혹독했던 겨울을 이곳에서 날 수가 있었을까? 그리고 민물조개는 어떻게 묘 안에 들어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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