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4. 26. 09:58ㆍ맛집과 요리
보리(麥)는 적어도 나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다. 영어로는 barley(발-리)이니 보리와 비슷하긴 하다. '불교에서 수행 결과 얻어지는 깨달음의 지혜 또는 그 지혜를 얻기 위한 수도 과정을 이르는 말'로서 보리(菩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억지춘향격으로 해석한다면 나는 지혜를 얻기 위한 지난한 修道 과정이라는 말이 보리(麥)와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길손이 어렸던 시절, 가을 추수가 끝나면 땅이 마르기 전, 꾸덕꾸덕할 때 여름내 벼가 자랐던 긴 줄을 따라 괭이로 깨꼴(경상도 방언)을 땄다. 괭이로 논바닥을 한 땀 한 땀 파고, 흙을 떠서 새로운 고랑을 만드는 일인데 그 고랑에는 퇴비와 재, 그리고 비료를 뿌리고 보리 씨앗을 심는다.
깨꼴을 따는 과정은 실로 힘들고, 단순 반복적인 노동으로 엄청나고 지난한 인내를 필요로 하는데 하루 이틀에 끝날 일도 아니어서 깨꼴을 따기 위해 논에 나갈 때는 대나무로 만든 오래된 소반에 삼베보자기로 덮은 보리 개떡과 군데군데 세월의 상처가 아로새겨진 낡은 주전자에 집 안에 있는 우물에서 길은 물을 가지고 나가는 것은 필수였고, 그 깨꼴 작업을 마치면 벌써 작고하신 할머니는 여러 날 몸살을 앓았다.
그렇게 깨꼴을 따고, 보리 씨앗을 뿌리면 다음은 어린이에게 신나는 과정이 있었는데 보리 씨앗을 덮을 때다. 소가 끄는 나무 썰매(둥그런 큰 통나무 두 개를 50~60cm 간격으로 밑에 두고, 위에 나무판자를 얹어 못을 박아 견고하게 한 다음 그것에 굵다란 나일론 봇줄을 두 줄로 길게 달아서 소의 멍에와 연결한 다음, 나무 썰매(끌게)에 아이 둘을 태우고, 이랑 사이를 다니면서 흙덩이를 부수고, 땅바닥을 골랐다.
그렇게 해서 겨울 초입에 보리싹이 올라오면 보리를 덮은 흙이 들떠서 보리가 냉해를 입거나 활착에 어려움이 있기에 겨울에 온 가족이 나서서 보리밟기를 해야 한다.
이 정도까지는 애교로 봐준다. 문제는 보리가 누렇게 익는 6월의 보리 수확과 탈곡 시기이다. 날카롭게 삐쭉삐쭉 솟아올라 쳐다만 봐도 눈이 찔릴 것 같아서 저절로 찡그려지는 보리 '까끄레기'는 마치 악마와 같았다.
추수한 보릿단은 지게로 때로는 소달구지로 시골 좁은 마당에 운반하여 모아놓고 타작을 하는데 짚으로 단단한 새끼줄을 길게 꼬아 만든 채찍같이 생긴 줄을 보릿단에 둘둘 말아서 어깨 위로 회전시켜 바닥에 놓아둔 굵은 나무통이나 큰 돌에 내려쳐서 보리가 떨어지도록 한다. 채찍 줄을 보릿단과 나무통이 고루 만나서 털리도록 이리저리 조정하면서 오른쪽 어깨 쪽으로 왼쪽 어깨 쪽으로 돌려치면서 하루를 하면 일꾼의 삼베적삼은 온통 보리 까끄레기와 땀으로 온통 범벅이 된다.
그렇게 어렵게 탈곡한 보리는 방앗간으로 가서 껍질을 벗기게 되는데 그때 나오는 보릿가루로 개떡을 만들어 먹었다. 보리쌀은 쌀과 비교하면 생긴 것도 보기 흉할 뿐만 아니라 밥을 할 때도 미리 삶아 놓지 않으면 퍼지지 않기 때문에 늘 어머니는 철사로 둥그렇게 만든 채반에 삼베 보자기를 펴고, 그곳에 삶은 보리쌀을 고루 펴서 초가지붕 처마에 달아놓았다가 밥 지을 때마다 채반에서 조금씩 내려서 보리밥을 했다.
그렇게 만든 보리밥은 까슬까슬한 게 입에서 겉돌고 맛도 없어서 배가 고프니 억지로 먹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쌀이 귀하니 보리밥을 먹지 않을 수가 없었고, 내 친구들은 모두 그렇게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보리밥이 유난히 많이 들어가서 검은빛이 도는 도시락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 찌그러진 양은 도시락 뚜껑으로 보리밥이 적나라하게 보이지 않게 숨겨서 먹었던 눈물겨운 추억도 있다.
그래서 늘 나는 보리는 왜 파종할 때부터 타작해서 먹을 때까지 이다지도 사람을 골탕 먹이나? 하면서 보리를 원망한 적이 많았다.
그런 사연으로 나는 보리밥을 잘 먹지 않는다. 아무리 좋다고 해도 일부러 보리밥집에 가는 경우는 없다. 오늘도 직장 동료 따라 온 길이다.
보리밥이나 쌀밥이나 값이 같다는 것은 보리쌀이 쌀과 비교하면 예전처럼 천대받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보리밥 색깔이 옛날의 그것처럼 그렇게 검지 않다.
'5.16 장학 범동창회상청회 대구 경북지부'의 간판이 보리밥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5.16혁명이라고 배웠던 우리 베이버부머들은 쿠데타라는 현재의 역사인식에 동의하기가 상당한 어려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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